이재명 대통령이 던진, 새로운 금융의 균형점에 대한 질문
2025년 9월, 대통령이 던진 “초우량 고객에게 금리를 조금 더 받아 어려운 이들을 돕자”라는 한마디 제안은 대한민국 금융 시스템의 심장부로 파고들었다.
연초에 ‘불황 속 성과급 파티’로 질타당한 이후 숨죽이고 있던 금융권에는 거대한 파문이 일었다. ‘시장 원칙의 훼손’이자 ‘금융 질서의 붕괴’를 초래할 위험한 포퓰리즘이라는 격렬한 경고가 터져 나왔다. 다른 한쪽에서는 불평등에 신음하던 대중의 공감대를 얻으며 ‘상생 금융’의 가능성을 제시한 과감한 시도라는 기대 섞인 목소리가 피어올랐다.
이 극단적인 반응의 격돌은, 이번 논쟁이 단순히 금리 몇 퍼센트포인트를 조정하는 기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님을 명백히 보여준다. 이는 우리 사회가 금융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으며, 그 역할과 책임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설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상기시키는 질문이다. 금융은 철저한 위험 계산과 이윤 추구라는 자본주의의 첨병인가? 아니면 국민 경제의 혈맥으로서 사회 전체의 안정을 도모해야 할 공적 인프라인가?
우리는 여기서 성역처럼 여겨졌던 ‘원칙’과 당위처럼 들리는 ‘연대’라는 두 가치 사이에서 소모적인 싸움을 하기보다, 양극단 너머에 존재하는 문제의 본질을 탐색해야만 한다. 감성과 이성, 효율과 형평, 단기적 이익과 장기적 안정성 사이에서 위태롭게 줄타기하는 이 논쟁의 지형도를 면밀히 살핌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소모적 대립을 넘어 한국 사회를 위한 새로운 금융의 균형점을 향한 생산적 논의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금융권이 그토록 수호하고자 하는 ‘원칙’의 핵심은 '리스크 기반 가격 책정(Risk-Based Pricing)'이다. 이는 돈을 빌려줬을 때 돌려받지 못할 확률, 즉 신용 리스크가 높은 차주에게는 높은 금리를, 리스크가 낮은 차주에게는 낮은 금리를 부과해야 한다는 논리다. 이는 단순히 은행의 이익을 위한 논리가 아니라, 금융 시스템 전체의 안정을 지키는 근간으로 여겨진다.
은행의 대출 재원은 공중에서 떨어진 돈이 아니다. 대다수 국민이 맡긴 소중한 예금이다. 은행은 이 예금을 안전하게 지키고 불려야 할 ‘수탁자로서의 책임(Fiduciary Duty)'을 진다. 만약 리스크를 무시하고 모든 사람에게 낮은 금리로 돈을 빌려준다면, 부실 대출이 급증할 것이고 이는 곧 은행의 손실로 이어진다. 손실이 누적되어 은행의 건전성이 악화되면, 최악의 경우 예금 지급 불능 사태나 은행 파산으로 이어져 사회 전체에 걷잡을 수 없는 충격을 주게 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부실한 주택담보대출에서 시작된 리스크 관리 실패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똑똑히 보여준 역사적 교훈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신용점수는 개인의 ‘성실성’이나 ‘도덕성’을 평가하는 잣대가 아니라, 과거의 금융 거래 데이터를 바탕으로 미래의 상환 확률을 예측하는 통계적 도구다. 데이터가 부족하거나 연체 이력이 많아 통계적으로 ‘고위험군’으로 분류된 이들에게 높은 금리를 적용하는 것은, ‘차별’이 아닌 합리적 ‘차등’이라는 것이 금융권의 항변이다. 따라서 정치적 혹은 사회적 논리로 이 가격 결정 메커니즘에 인위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시스템의 예측 가능성을 무너뜨리고 금융 전체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위험천만한 발상이라는 것이다. 이 견고한 원칙의 성벽은, 수백 년간 이어진 금융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위기를 거치며 학습한 생존의 논리인 셈이다.
그러나 금융권이 쌓아 올린 원칙의 성벽은 너무나 높고 견고한 나머지, 성벽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실을 제대로 비추지 못한다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닌다. 바로 ‘기회의 불평등’ 문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신용은 성실함만으로 쌓을 수 없다. 신용평가 시스템이 요구하는 ‘성실함’이란, ‘금융 거래를 활발히 하고 연체 없이 상환하는’ 행위를 통해 증명되어야 한다. 하지만 소득이 낮고 자산이 부족한 이들은 애초에 이 증명의 장에 입장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신용카드 발급을 거절당하고, 안정적인 소득 증빙이 어려워 대출 심사에서 탈락하는 이들, 이른바 ‘신 파일러(Thin Filer)’는 아무리 성실하게 현금으로 생활비를 관리해도 시스템상으로는 ‘유령’ 취급을 받는다.
이들에게 낮은 신용점수는 ‘불성실의 증거’가 아니라 ‘기회 박탈의 근거’로 작용한다. 금융권의 ‘리스크 관리’라는 원칙은 안타깝게도 이처럼 출발선이 다른 현실을 외면한다. 리스크를 측정할 데이터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잠재적 고위험군으로 분류하고 높은 금리를 매기거나 아예 문을 닫아버리는 것은, 결과적으로 가난을 대물림하고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걷어차는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이는 ‘원칙’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원칙을 적용하는 현실 세계가 완벽하게 평평하지 않다는 의미다. 성실하게 살아가지만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로 자신의 신뢰를 증명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이들의 존재는, 금융의 원칙이 사회적 연대의 가치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한 어려운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논쟁의 또 다른 핵심에는 ‘은행의 이익’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금융권의 시각에서 은행의 이익은 시스템을 지탱하는 ‘필수 에너지원’이다. 이익이 나야만 미래의 부실에 대비한 대손충당금을 쌓을 수 있고, 국제결제은행(BIS)이 요구하는 자본 건전성 기준을 충족시켜 외부 충격에도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금융 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다. 이익이 없는 은행은 곧 부실한 은행이며, 이는 경제 전체에 더 큰 위험을 초래한다.
하지만 비판적 시각에서 은행의 이익은 그 원천과 규모 면에서 문제를 드러낸다. 특히 금리 상승기에 예금금리는 찔끔 올리면서 대출금리는 가파르게 올려 막대한 ‘예대마진’을 확보하고, 그 이익으로 역대급 ‘성과급 파티’를 벌이는 모습은 국민적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이는 은행이 사회 전체의 고통에 편승해 손쉬운 ‘이자 장사’로 배를 불렸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만든다.
특히 그 이익의 상당 부분이 금융 취약계층이 이용할 수밖에 없는 리볼빙, 카드론 등 고금리 상품에서 나온다는 점은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금융권은 이 상품들이 불법 사금융 시장으로의 유입을 막는 ‘필요악’이자 제도권 내의 마지막 안전판이라고 항변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연 20%에 육박하는 금리와 복리 구조는 사실상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기 힘든 ‘부채의 덫’으로 기능하며, 이들의 재기를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비판 또한 사실이다.
결국 은행의 이익은 시스템 안정을 위한 기반이라는 측면과,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물이라는 두 얼굴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이 두 얼굴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 것인가가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과제다.
금융권은 종종 자신들의 입장을 ‘이성’과 ‘현실’로, 비판 진영의 입장을 ‘감성’과 ‘이상’으로 프레임화한다. 그러나 장기 불황과 저성장이 고착화된 지금, 사회 구성원 다수를 금융 시스템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 과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선택인지 되물을 필요가 있다.
오히려 포용적 금융은 가장 냉철하고 이성적인 거시 경제 전략일 수 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불황의 핵심은 수요 부족이다. 소득이 낮은 계층일수록 추가 소득이나 여유 자금을 곧바로 소비로 연결하는 ‘한계소비성향’이 높다. 즉, 금융 취약계층의 이자 부담을 덜어주고 이들의 가처분소득을 늘려주는 것은, 사회 전체의 소비를 진작시켜 내수 경제를 활성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다.
반대로 이들을 높은 부채의 굴레에 가두고 금융 시스템에서 배제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유발한다. 이들의 좌절은 사회적 불안과 갈등을 증폭시키고, 이들이 무너졌을 때 발생하는 복지 비용은 결국 모든 납세자의 부담으로 돌아온다. 잠재력 있는 인재들이 자금 부족으로 꿈을 포기하는 것은 국가 전체의 성장 동력을 갉아먹는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포용적 금융은 단순히 어려운 사람을 돕는 ‘감성적’ 시혜가 아니다. 사회 전체의 붕괴를 막고, 꺼져가는 경제의 엔진을 다시 점화하며, 장기적인 성장 기반을 다지는 ‘사회적 이성’의 발현이다. 단기적·미시적 리스크 관리에만 매몰되어 거시적·장기적 안정을 해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비이성적인 선택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소모적인 대립을 넘어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해법은 어느 한쪽의 완전한 승리가 아니라, 양쪽의 논리를 모두 수용하며 한 단계 진화하는 ‘창조적 종합’에 있다.
첫째, ‘리스크’를 더 정교하게 재정의해야 한다. ‘데이터가 없으면 고위험’이라는 낡은 공식을 넘어, 통신비·공과금 납부 내역 등 다양한 비금융 데이터를 활용하는 ‘대안신용평가’를 고도화해야 한다. 이는 리스크 관리라는 금융의 원칙을 지키면서도 ‘성실한 저신용자’를 발굴해 내는 기술적 해법이다.
둘째, ‘역할 분담’을 명확히 해야 한다. 모든 금융 부담을 민간 은행에 떠넘기는 것도, 모든 사회적 책임을 외면하게 두는 것도 정답이 아니다. 정부는 서민금융진흥원 등을 통해 고위험 영역의 리스크를 흡수하는 ‘정책서민금융’의 방파제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 민간 은행은 이 방파제 위에서 자신들의 효율성과 전문성을 발휘해 포용적 금융 상품을 공급하는 모델을 구축해야 한다.
셋째, ‘인센티브’를 재설계해야 한다. ‘착한 금융’이 기업의 이익과 연결되도록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서민금융 지원 실적이 우수한 은행에 규제를 완화해주거나, ESG 경영 평가에서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등, 금융사가 처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이익이 되기 때문에 스스로 포용적 금융에 나서도록 유도해야 한다.
질문은 이미 던져졌고, 논쟁은 시작되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누가 옳은가’를 따지는 이념 투쟁이 아니라,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현실적 지혜다. 금융의 안정성과 효율성이라는 ‘차가운 머리’와, 사회적 연대와 포용이라는 ‘따뜻한 가슴’이 서로 반발하는 대신, 함께 작동하는 새로운 시스템을 상상해야 할 때다. 그것이 바로 원칙과 연대 사이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대한민국 금융의 새로운 균형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