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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원 Nov 15. 2023

내가 사랑하는 가을이니까

일상 09

생각이 많이 지워졌다 생기고 있다. 역시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건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라서, 매번 공격적으로 잠에 들어 비실비실 눈을 뜨고 바깥에 기어 나오는 날들이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할 수 있는 것도 많은데 나는 아직도 준비가 안 된 것 같은 느낌. 이건 강박인지 완벽주의에 기인한 자만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세상은 네게 완벽함을 원하지만 특별히 그것을 기대하지도 않으니 너무 걱정할 것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여봐도, '이 정도는 되어야지' 하는 생각에 매일 같이 날 채찍질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별 것 아니라고 외쳐봤자 날 이 구덩이에서 꺼내 줄 트리거가 없다. 혼자 쩔쩔 매는 시간들이 사실 엄청나게 괴롭다. 


괴로우니 주변이 조금만 어두워지고 눈만 감아도 이전에 미웠던 것들이 자꾸 생각난다. 이전 일기에서는 미움이라는 말을 참 입에 올리기 힘들다고 했는데, 가만 생각해보면 그냥 뱉기 주저할 뿐 그 감정은 여전히 마음에 있는 듯하다. 어리석고 어린 생각이 차곡차곡 쌓여갈 때마다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원망하고 괴로워한다. 정말 나쁜 버릇이라는 걸 아는데 왜 고치질 못하는지.. 이 편린적인 나쁜 버릇들을 덮으려다보니 한가지 욕심이 생겼다. 매사에 감사하고 행복을 비는 방법을 체득하고 체화하는 것. 딱히 진전이 있는 건 아니지만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고 무엇이 나를 감사하게 하는지 정도는 알게 되었다. 언젠가는 정답을 알게 되지 않을까. 내가 아는 것들을 내게 선물처럼 던져주는 방식 말이야. 


화가 날 때마다 형태 없는 하얀 거짓말을 하는 버릇도 슬슬 지워나가야 할텐데. 왜 이렇게 속에 쌓인 화도 분노도 많은지, 나도 여느 소설속에 나오는 어떤 어린아이처럼 하얗고 두터운 컵에 담긴 따뜻한 핫초콜릿 한 잔에 마음을 녹이는 방법을 알고 싶다. 그 애는 고작 마시멜로우 하나 띄운 뜨거운 초콜릿 한 잔일 뿐이지만 도톰한 뺨이 발그레하게 물들면서 며칠 전에 있었던 슬픈 기억들이 사실은 손에 나뭇가시가 살짝 스쳤던 일인 것마냥 웃어버리지. 똑같은 시련을 겪어도 따뜻한 벽난로와 그 앞에서 마신 핫초콜릿을 기억해내며 으쌰! 하고 넘길 수 있는 강인한 아이로 크는거지. 이전에는 핫초콜릿 한 잔이 필요했는데, 지금은 그런 심성이 필요하다. 소소한 것에도 아주 나쁜 일들을 웃어넘길 수 있는 그런 심성으로. 


그래, 나는 나의 것들을 정말 사랑한다. 내가 배우는 것들도, 내가 알고 있는 것들도, 내가 새로 내게 가르치고자 했던 것들도 모두 다. 그래서 내가 스쳐온 것들을 기록해 놓은 보물상자를 열어보면 행복해. 그건 6평짜리 방 안에서 내 입맛대로 방을 꾸며놓고 어느 날 밤에 문득 집에 돌아와 방문을 열어보았을 때의 기분과 같다. 집으로 돌아왔는데도 집이 아닌 것 같을 때, 유일하게 나의 공간이 되어주는 그 좁은 방이 안겨주는 안락함 같은 것. 언젠가부터 LP를 보면 생각나는 얼굴에 공연히 머리가 저려와서 열지 못하고 있는 턴테이블 상자를 언젠가 열었을 떄 이런 기분이 들었으면 해. 그것도 나의 기억이 만든 먼지라고, 그렇게 받아들이는 순간이 왔으면 해. 그러길 바라. 


요새는 소설을 다시 쓰고 싶어졌다.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쓰라, 쓰라 해도 단 한 줄도 안 적어지던 것들이, 요새는 이상하게 머릿속에 단편적이고 추상적인 이야기들이 떠올라 자꾸만 노트북을 켜고 싶게 만든다. 그래봤자 정말 자신이 없고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도 난감하지만. 나는 네가 글을 썼음 좋겠어, 하고 잔뜩 주정을 부리던 아버지가 생각난다. 당신이 일을 열심히 해서 내가 언제든 굶어죽지 않을 만큼 돈을 많이 벌고, 나중에는 꼭 내가 유유자적 조용한 숲속 집에서 내가 쓰고 싶은 글 잔뜩 쓰며 살게 해주고 싶으시다 했었는데. 바라진 않지만 나도 언젠가는 내가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글을 한 자라도 적어봐야겠지. 일기와는 사뭇 다른 형태의 글이지만, 내가 꿈꾸는 세계에 내가 원하는 인물들이 뛰노는 공간을 적는 건 언제 해도 재밌으니까. 


쓴 맛과 다크 초콜릿 향이 묘하게 감도는 원두로 내린 커피도, 고요한 바람과 찬란한 빛의 단풍과 고아한 빗물처럼 흩날리는 낙엽도, 우아한 클래식이 흐르는 미술관도, 작품을 보며 도란도란 나누는 목소리들도, 텁텁하고 건조하지만 왠지 모르게 기분 좋은 책먼지 냄새도 모두 나의 위안이 된다. 그러니 도랑에 머리를 처박고 허우적거리지 말자. 지금은 언제 질 지 모르는, 내가 좋아하는 풍성한 단풍을 봐. 노랗고 붉은 산등성이를 보고, 사람이 북적거리는 가로수길의 큰 나무를 보고, 그렇게 마음을 다스려보자. 누가 뭐라하든 지금은 내가 사랑하는 가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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