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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둥이 May 06. 2024

향기가 없는 꽃이라도.


한때 식물 키우기에 재미를 들였던 적이 있다. 하루 온종일 키우는 것에 빠져서 살았다. 많은 과정이 있었지만 다 생략하고, 지금은 아이가 학교에서 받아 온 토마토 씨를 싹 틔운 것이 전부다.


창밖으로 비 내리는 모습을 보다가 문득 우리 집에도 저런 푸르른 것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베란다 너머로 나무가 몇 그루나 보이지만 집 안에 있는 것과는 느낌이 다르니까.



분리수거하려고 내놓았던 와인병을 다시 꺼내왔다. 분명 와인을 담았던 병이긴 한데 누가 봐도 소주병스럽다. 뭐가 됐든 좋다. 너무 길면 세워두기 위태로울 테고, 너무 짧으면 꽃을 끼워 넣기가 힘들 테니까.


병 안에 남아있던 물기를 대충 털어서 한참을 쳐다봤다. 병을 감싸고 있는 라벨을 떼려니 귀찮다. 그렇다고 이대로 두기에는 좀 애매하다.



아이가 어릴 적 쓰던 스카프를 가져왔다. 안 쓴 지 몇 년은 된 것 같은데 뭐가 그리 아까워서 고이 모셔 둔 건지. 오늘에야 자기 역할을 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그리 생각해야 마음이 편하다)



스카프를 대충 접어 병에 두르고 리본 끈을 묶었다. 다소 투박하다. 하지만 내게 꾸미기 능력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이대로 만족하기로 했다.



블로그를 방치해 두면서 같이 방치해 둔 조화를 가져와서 꽂았다. 의식의 흐름대로 아무렇게나 밀어 넣었다. 입구가 좁아서 생각보다 많이 들어가지 않는다. 아마 진짜 화병이었다면 가지고 있는 조화를 모두 꽂았을 텐데.


어쨌든 예쁘다. 맘에 든다. 좋다. 사용한 재료가 어쩌면 버려졌을지도 모르는 물건들이라서 애정이 가는 건지, 꽃이라서 마냥 좋은 건지 모르겠다.


밖에서 아무렇게나 자란 꽃도 좋고 일부러 화단에 심어 놓은 꽃도 좋고 꽃 그림을 봐도 좋은데, 이상하게 사서 집에 두고 싶지는 않았다. 나무보다는 꽃을 좋아하지만 집에서 키우던 건 매번 나무였다. 아마 꽃이 금방 시드는 게 보기 싫어서 그랬던 것 같다.


오늘 탄생한 조화 화병은 시들 염려가 없어서 좋다. 향기가 없어도 좋다. 한동안은 매일 같이 들여다보겠지. 그러다 한참을 잊어버려도 그대로 자리 잡고 있겠지.



투박하고 인위적이지만 그래도 예쁜, 내 화병은 거실 한편에 자리를 잡았다. 계속 쳐다봤더니 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잘 어울린다.


오늘은 시원하게 내리는 빗소리에 위안을 받고, 야무지게 다시 태어난 화병을 보며 기뻐했다. 그리고 소소한 일상의 행복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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