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 정리 중
Friday, November 22, 2024
평소에 정리정돈을 잘하는 편이다. 주위가 산만하면 집중이 안돼서 쓰고 난 물건은 항상 제자리에 둬야 속이 후련하다. 아이러니하게 어렸을 때 우리 집은 정리정돈이라곤 1도 없는 그런 가정환경이었다. 한번 쓴 물건이 제자리에 돌아가는 법이 없었고 돌아가더라도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다. 그런 가정환경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 남은 사람이 나였다. 나 빼고 다 그런 환경에 동화돼서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집안을 어지렵혔고 난 그런 환경이 너무 싫었다. 아마 그 때문에 정리 정돈하는 것에 집착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결벽증 같은 완벽주의로 정리하는 건 아니다. 귀찮을 때나 피곤할 때는 책상 위나 화장대 위에 그냥 올려놓을 때도 있다. 그러다가 그냥 한 번에 날 잡아서 정리하기도 한다.
이런 성격은 일할 때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내가 일하는 날에는 내 주위만큼은 정리정돈을 해야 안심이 된다.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 중간에 끊기더라도 바로 찾을 수 있게끔 나만의 시스템으로 일을 한다. 업무상 서류 작업이 많기 때문에 여러 개의 서류들이 한꺼번에 다뤄야 할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중간에 책상정리를 한번 싹 하고 시작해야 마음이 편하다. 어떨 때는 까먹고 스캔을 안 했는데 중간에 다른 일을 하다가 갑자기 생각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나 자신이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오늘은 예약된 고객 스케줄도 끝나고 딱히 급하게 할 일도 없어서 뭘 할까 하고 사무실을 둘러보다가 책상밑에 쌓여 있는 over stock을 발견했다. 굳이 정리할 필요는 없지만 갑자기 정리하고 싶어졌다. 그냥 박스에 그대로 담아져 있길래 종류별로 분류를 해 놓고 리필함에 채워 넣을 수 있는 것들은 최대한 채워 넣었다. 내가 이 부서에 올 때부터 있던 박스니 최소 6개월 넘게 그대로 있던 재고였다. 아무렇지 않게 쑤셔 넣었으니 찾아보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재고가 있음에도 찾지 못해 주문하고 또 주문하고. 아무리 무제한으로 주문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정리하는 게 귀찮아서 새로 물건을 사는 행위가 누군가의 집과 비슷하다.
매니저가 이런 나의 수고를 알아줬으면 한다. 사실, 똑같이 월급 받고 일하는데 뭐 하러 사서 고생하냐고 하겠지만 어쩌겠는가! 내 성격이 이런 것을. 이제 더 이상 숨겨진 재고들이 없겠지? 근데 만약 있더라도 다음엔 정리하진 않을 거야. 왜냐면,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줄 알 테니까. 머래.
오늘의 픽:
내 눈엔 다 똑같이 생긴 dome 정리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