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응을 못하니 근심이 가득하다
어젯밤에 딸이 엄마밥이 먹고 싶다고 오늘 집에 들르겠다고 했다. 제 집에서 아침을 뜨고 올 줄 알았는데 새벽같이 들이닥쳤나보다. 딸이 오는 것도 모르고 있다가 현관문에 신문을 주우러 갔다가 딸 방 침대에 사람이 누워있는 것을 보고 기겁을 하였다. 딸은 새벽 4시쯤 일어나 그림을 그리다가 첫차를 타고 왔다고 한다. 밤새 눈이 내린 세상은 얼어붙어 춥고 미끄러웠는데 새벽이라 날이 추운지도 모르고 가볍게 옷을 입고 나섰다가 된통 혼이 났나보다. 수면 잠옷에 이불을 뒤집어쓰고도 추운지 이를 덜덜 떨었다.
요즘 나의 생활 반경은 집에서 버스 정류장 2개 정도의 거리에 놓여 있다.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 마트에 가 시장을 봐 오는 것으로 바깥출입을 대신하고 있다. 아파트 단지 내의 헬스장에도 부지런히 다니면서. 그만큼 집순이로 살고 있다. 자가용이 없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데 그마저 이용하지 않은 지 한 달이 다 돼 간다.
그런데 오늘 오랜만에 버스를 타고 딸과 외출을 나갔다. 나는 은행 업무를 봐야 했고 딸아이는 화방으로 화구를 사러 가야 했다.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데 멀리서 ‘현금 없는 버스’라는 현수막을 단 버스가 달려왔다. 전부터 나는 그 문구가 눈에 거슬렸다. 현금보다 카드가 대세이기는 하지만 카드나 현금이 어디에서나 통용되고 있다. 그런데 왜 버스를 탈 때는 카드만 되고 현금은 안 된단 말인가. ‘현금 없는 버스’라는 말에는 카드만 받고 현금은 거절하겠다는 것인데 그것은 카드 사용은 대단히 선진적이고 현금 사용은 그렇지 않다는 의미로 읽힌다. 현금은 대단히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럽다는 의미까지도.
버스나 전철을 탈 때 주로 카드나 모바일 교통카드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하는 사람이라 ‘현금 없는 버스’가 운행돼도 딱히 불편을 느낀 적은 없다. 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지 않은가. 현금만 있고 카드가 없는 상황이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까운 교통카드 구매처에서 교통카드를 구매하여 충전시킨 후에 승차해야한다. 요금함에 현금을 집어넣으면 될 일이 그렇게 복잡해진다. 현금 이용률이 낮고 요금함 부딪힘의 안전사고 발생이나 요금함 유지⸳ 관리 비용 때문에 현금을 받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것으로 인한 불편은 오롯이 승객이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어쨌든 현금 없는 버스라도 카드가 있었으니 무난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제는 올 때 생겼다. 버스 정류장 모니터에 타고 갈 버스가 곧 도착한다는 정보가 떴는데 갑자기 10분 후로 바뀌었다. 순간 내가 보지 못한 사이에 버스가 휙 지나갔나 싶어 딸에게 물었다. 딸도 보지 못했다고 하니 무슨 착오가 있었나 보았다. 버스는 10분이 훨씬 지난 다음에야 도착하여 손님을 다 태우고 시동이 멈춰버렸다. 그러자 내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드러내놓고 불평을 시작했다. 아까부터 몇 번씩 시동이 꺼져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왔는데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고 계속 시동만 만지작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나와 딸아이는 불길함을 직감하고 내리려고 하차문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교통카드가 찍히지 않았다. 환승하려면 하차 태그를 찍어야 하는데 야단이었다. 버스는 여러 번 시도 끝에 시동이 걸렸다. 카드 단말기가 작동되자 그 틈을 이용하여 나와 딸은 재빨리 하차했다.
오랜만에 번화가를 찾은 날이었는데 버스로 머리가 아팠다. 현금을 안 받는 것이 대단한 자랑이나 되듯 버스마다 '현금 없는 버스’라는 문구의 현수막을 뻔뻔하게 펄럭거리고 다니고, 차체 점검도 하지 않고 몰고 다니면서 승객을 길바닥에 세워놓고 하니 말이다. 날도 추운데 시민의 발이라는 버스로 생각이 많은 날이었다.(1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