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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오른발 왼발

오른발 왼발

by 인상파

오른발, 왼발, 토미 드 파올라 글· 그림, 정해왕 옮김, 비룡소


오른발, 왼발


오: 오늘도 할아버지는 나와 놀아주셔요

른: 은발 머리카락이 땀에 흠뻑

발: 발가숭이로 둘 다 욕조에서 물장구도 치고

왼: 왼발 구르고 으싸 달려드는 할아버지

발: 발차기에서는 절대 나를 이기지 못한다고요


오른발 왼발의 기적


자식보다 손자 손녀가 더 예쁘다는 말이 있는데, 이 그림책이야말로 그 말에 꼭 들어맞는 듯합니다. 저에게 할아버지는 흑백 영정사진 속에만 계신 분입니다. 태어나기 전 돌아가셨으니 불러본 기억이 없지요. 하지만 제가 결혼해 아이를 낳고 보니, 아버님이 손주를 대하는 모습을 보며 처음으로 ‘할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이 실감날 만큼 아버님의 손주 사랑은 무조건적이셨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그 사랑마저 조금씩 희미하게 만들었습니다. 치매로 아버님은 기억을 잃어갔고, 손주들은 사춘기를 지나며 제 갈 길로 바빠졌습니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처럼 조손간의 사랑도 그렇게 흐려지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책의 할아버지와 손자는 좀 다르네요. 보비는 아직 세상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은 나이라 그런 걸까요, 아픈 할아버지를 낯설어하면서도 마음 깊이 걱정합니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할아버지가 자신을 더는 기억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고, 먹지도 자지도 못할 만큼 속이 상하지요. 하지만 보비는 할아버지가 여전히 자신을 기억한다는 걸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예전처럼 블록을 쌓고, 함께 걷는 놀이를 다시 시작하지요. ‘오른발, 왼발’, 이건 원래 할아버지가 보비에게 걸음마를 가르치며 내던 소리였는데, 이제는 보비가 할아버지를 위해 그 소리를 외치며 걸음 연습을 도와줍니다.


세월은 흘렀지만 사랑은 자리를 바꿔 이어지네요. 예전에는 할아버지가 보비의 손을 잡아 일으켰고, 이제는 보비가 할아버지를 일으켜 세웁니다.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할아버지의 기억을 되살리고 마음을 회복시키는 사랑. 그거야말로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일까요. ‘오른발, 왼발’이라는 구호에는 세대를 건너 이어지는 애틋함과 따뜻함이 그리고 말보다 먼저 가닿는 진심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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