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으로 가는 티켓을 구매한 뒤, 관장님께 미리 토요일까지 운동하고 다음날 떠난다고 이야기를 해두었다. 토요일 당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느지막이 일어나 수업시간에 맞추어 운동을 하러 갔다.
손가락과 발목 부상으로 인해 최근에는 드릴과 기술만 연습하고, 스파링은 참여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만은 테이핑을 꾹꾹 눌러 감고 같이 운동하고 싶었다. 평소와 같은 동작은 불가능했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스파링까지 마쳤다.
*드릴 : 기술이나 일정 동작을 반복하는 훈련
수업과 스파링 모두 잘 마무리하고, 관장님의 한 마디와 관원들끼리의 끝인사가 남아있었다. 관장님이 앞으로 나오시며 도복 안에 숨겨놓은 블루벨트를 꺼냈고, 곧 내 이름을 호명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만감이 교차했다. '승급하기엔 아직 이르다'와 이제 막 시합에 흥미가 생겨 열심히 운동하고 있는데 블루벨트를 받으면 더 이상 '화이트 벨트 시합이 불가하여 아쉬운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그동안 꿈꿔온 일이었지만 막상 받고 보니, '안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블루벨트의 자격'은 기본기가 탄탄하고, 어느 정도의 전문성이 있는 사람이 받는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에 스스로 적합하지 않다고 느껴졌다. 기쁜 마음보다는 걱정이 더 많이 되었다. 마치 무거운 왕관이라도 씌워준 것처럼 말이다.
Made in Colombia
블루벨트를 관장님이 직접 매어 주시고는 관원들 앞에서 잠시 소감을 말하는 시간을 주셨다. 오늘이 승급날일 것이라는 생각을 단 1초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허접한 스페인어로 떠들어 볼까, 영어로 해도 될까' 고민을 하고 있는데 약 20명이 되는 인원들의 40개의 눈을 마주치니, 더더욱 고장 난 듯 멍청해졌다.
"어,, 음,,,"
긴장한 마음을 조금 진정한 뒤, 큰 한숨을 내쉬곤 이렇게 말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인데 그동안 고마웠고, 나는 꼭 다시 올 테니 그때 또 보자."는 말을 버벅거리며 주절주절 떠들었다.너무 떨리고, 멍청해 보이기까지 했을 그 순간을 떠올리면 아직도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다.
Checkmat Colombia
승급을 한 이후에도 한동안은 스스로 '블루벨트의 자격'을 인정하질 못했다. 그러던 중 Hazel이라는 블루벨트 친구가 내게 "블루벨트도 아직 배울게 많고, 아직은 아마추어"라는 말을 지나가듯 해주었다. 사실이다. 시합에서도 블루벨트까지는 아마추어로 분류되고, 퍼플벨트부터 프로페셔널로 구분되기 때문이다.
*주짓수의 벨트 순서 : 화이트> 블루> 퍼플> 브라운> 블랙
그 말을 듣고, 꽤나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 모두는 그저 '블랙 벨트로 가는 길'(Road to Black)에 있는 것이고, 블루벨트는 그중 첫 번째 단계에 불과했다. 또한 나쁘게 보면, 블루 벨트를 주신 관장님의 판단을 부정하는 모양새가 되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마음을 다잡았다.
관장님이 벨트를 허리에 감아주시며 말씀해 주신 이야기가 있다.
"JI, 너는 거의 매일같이 아침, 저녁으로 운동을 빠짐없이 나왔고 (손과 발목에 감겨있는 테이프를 가리키며)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시합에 나가 이기고 왔지 않느냐"며 "받을 자격이 있다"라고 해주신 말씀을 기억하고 있다.
관장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더 열심히 벨트 값하는 '주짓떼로'로 성장하겠다고 다짐했다. 이 글을 쓰며 멀리서나마 다시 한번 관장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