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의 모든 것이 결정되는 밀실! 보드 미팅!

밀실 트릭 격파술 = 설정 전체공개!

by 초맹


맑고 투명하게 하자며?


탐정물을 보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있다.

바로 밀실 살인 사건!


침입 흔적이 없는데 누군가 죽었다. 분명 타살 같은데 감쪽같다. 찾기도 힘들다. 탐정들이 나서 온갖 말도 안 되는 발상으로 추리에 추격을 더하며 이를 밝혀내곤 한다. 근데 밝혀내고 나서 보면 가관이다. 틀리는 야매 탐정은 맨날 틀린다. 죽인 이유도 제각각이다. 시를 너무 잘 써서. 아침을 안 챙겨줘서. 햇빛이 너무 밝아서.


밀실 트릭을 밝혀낸 후, 알고 보면 뒤에 쪽문이 있었다던가.. 하는 경우도 있다. 밀실이 아니었던 거지.


탐정놀이 중. "내 간식 누가 먹었어? 지금부터 움직이면 다 범인이야!"


어때? 말 같지도 않지? 회사의 말 같지도 않은 의사결정. 이상한 사업. 군사작전 같은 대량 해고. 이 모든 것이 밀실에서 일어난다.


오피스 게임의 대표적인 밀실은 바로 보드 미팅이다. 온갖 역적모의가 다 여기서 이루어진다. 귀엽고 깜찍한 건 없다. 더럽고 추악한 것들만 존재한다.


매번 허허실실 웃고 다니던 임원들. 보드 미팅에서는 마스크가 벗겨지며 악마의 모습이 튀어나온다.

"직원들 불만이야 뭐 명절 떡값 좀 쥐어주면 잠잠하죠. 어차피 직원들은 다 개돼지 아닙니까? 하하하"

"이번 사업부 매각. 값 좀 더 받게 거기 직원들 같이 팔아버려. 우리도 인건비 줄이고 돈도 더 받고 좋잖아. 어차피 걔들 쓸모도 없는데. 안 그래?"

"암요 암요! 이걸 뭐라 그러더라? 원 플러스 원?"

"크하하하하하하!!!"


그럼 카더라는 어떻게 나오는 것이냐? 보드 미팅에 들어갔던 사람들에게서 찔끔찔끔 흘러나오는 구조다.

"조만간 소위 전자에 사업부 매각할 껀가봐. 계속 얘기 나오더라구. 소위 김하진 대표 왔다갔대."

"뭐? 그럼 우린 다 어떻게 되는 거야? 빨리 다른 사업부 자리 알아봐야 되나?"

소문이 확산되며 카더라가 난무한다. 모든 오피서들이 조그마한 단서를 붙잡고 탐정이 된다.


역적모의를 한 자들은 어떤 결정이 나면 "회사의 결정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지들은 뒤에 숨는다.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회사가 무슨 머리 달리고 입 달려서 결정을 하겠는가? 이상한 일들은 벌어지는데 결정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 말이 안 되잖아. 그치? 맞지?


직원들은 다 개돼지입니다! 크크크크


"밀실이라는 그들만의 성역을 깨 버리고 싶습니다."

사내 문화에 관심 많은 부사장 제니. 지금의 보드 미팅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마땅한 방법도 없다.


매월 열리는 보드 미팅. 오늘은 어떤 신박하고 기상천외한 일이 생길까? 이때가 되면 윗선들 모두 긴장이다. 본사 임원들은 분주해진다. 지사에 있는 임원들은 화상으로 접속한다. 애써 본사에 오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꼭 얼굴 비추려 일부러 출장 끊고 오는 자들도 있다.


다시 말해봐! 직원들이 개돼지야?


그날의 보드 미팅. 평소처럼 여러 중대사가 논의되었다. 2시간쯤 지났을까? 곧 직원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우리 사업부 매각하는 거야? 사업부장이 그래도 돼?"

"아니.. 박상무 말하는 거 봤지? 저번에 우리가 했으니까 다음에 너네가 하래잖아. 쟤 바보 아냐?"

"고전무 중간에 떡값 얘기하면서 개돼지 어쩌고 하던데.. 그거 우리 얘기한 거지? 이 새끼가 진짜!"

"이번 신사업 안건은 아예 말도 안 나오네?"

"날밤새서 PT 50장 만들어줬더니, 우리 그룹장은 가서 첫 장 읽다 까이고 끝나더라.."

"저딴 것들이 임원이야? 이러고 일하는 게 맞나 싶다."

"대기업 의사결정 수준 처음 알았어. 동네 유치원 애들도 아니구.. 그냥 안내면 진다 가위바위보가 낫겠다."

"난 제니 다시 봤다. 금수저 허수아비인 줄 알았더니.. 완전 철녀! 찐 오너!"

"야 봤어? 봤어? 고전무 개쌉소리하니까 제니 벌떡 일어나더니 바로 발라버리더라. 완전 꿀쨈!"


오피스가 술렁이고 있다. 그 여파는 엄청났다. 임원들이 저마다 구설수에 휘말린다. 그들도 당혹스러워 어찌할 줄 모른다. 직원들이 어떻게 아는 거지?


어찌 된 일일까?

그랬다. 그날의 보드 미팅. 화상회의를 연결했던 스태프 초대리가 실수로 회의방을 전체 공개해 버린 것.


우연히 이 방을 발견한 직원들이 하나둘씩 몰려들었다. 그렇다. 그날 수많은 직원들이 우연찮게 보드 미팅을 보게 된 것이다. 베일에 쌓여 있던 밀실이 실시간 라이브로 생중계되었다. 추악한 민낯과 실체가 드러난 순간이었다. 직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고전무 저 대머리 새끼. 나쁜 새끼. 우리 개돼지라 그랬지?


심기 상한 임원진은 초대리를 징계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근데 뭐로 징계하게? 천기누설? 방송사고?


이 상황을 놓치지 않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제니였다.

그래! 바로 이거다! 누군가 지켜보면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못하는 법이다.


"앞으로 투명하고 맑은 의사결정과 신뢰향상을 위해 보드 미팅은 생중계를 원칙으로 합니다. 관심 있는 직원들은 자율 시청해 주시고 댓글도 남겨주세요."


성역과 같은 룰이 하나둘씩 변해간다. 효과는 상당했다. 임원들은 팀장을 대동하던 관행을 줄이고 스스로 현황을 파악해야 했다. 직원들이 보고 있다. 바보로 보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언행을 조심하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논리로 편의상 일을 떠밀지도 못하게 됐다. 직원들이 보고 있다.


노비들은 주요 안건이 어떻게 논의되는지 관전한다. 결정이 어렵거나 직원들의 뜻이 필요하면 즉석 찬반 투표도 쉽게 실시되었다. 이것은 직원들의 뜻입니다와 같이 난무하던 개구라와 사기극도 통하지 않게 되었다.


밀실에서 일어나지만 밀실효과를 철저히 없애버린다.

볼 수 있으니까. 알 수 있으니까. 느낄 수 있으니까..


"보드 미팅시간이다! 오늘 누가 이길래나?" 몰려드는 관전충들


"이제 중역들은 회사라는 무책임한 이름 뒤에 숨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개돼지인 직원 노비들의 권위가 알아서 상승하고 있다. 오피스 수뇌부가 눈치를 보기 때문이다. 제니를 포함해 중역들에게는 많은 부담이 가중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오피서들이 또 어떠한가?


보드 미팅에 논의되는 안건들에 대해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진 직원들은 실시간 댓글로 의견을 밝히고 바로 채택되기도 했다. 익명 댓글도 가능했다.


예쁨 본부장님! 파이팅! 광고 예산 좀요 제발. 언니! 우리 좀 살려주세요! - 찬란

귀복이형! 안돼! 회사 돈 없어요. 예산만큼은 내주면 안 됩니다. 절! 대! 사! 수! - 마음의 온도


중간에 이런 댓글이 뜨면 보드미팅 전체를 한동안 웃음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그렇다. 눈치 보며 관전하던 노비들이 서서히 참전한다. 관전하다 몰입하면 참전하게 되는 법이다.


자신의 안건을 관철시킨 임원들은 카메라를 향해 수줍게 브이를 날리기도 했다. 직원들은 좋아요로 화답을 보냈다. 가끔 싫어요도 있었지만..


[특별출연 예쁨] 예쁘면 전체 공개 설정에서 무조건 유리하다.


물론, 초기에는 여러 부작용들도 있었다. 괜히 직원들 신경 써 주는 무영혼 발언들도 튀어나온다. 다 보고 있어서 그런 거다. 마냥 공정해 지지도 않는다. 카메라가 꺼지면 다른 밀실이 생기기 때문이다. 밀실이 완전히 영원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늘 경각심을 갖게 된다. 공정해 보이려는 노력, 투명하려는 마음가짐이 커진다. 신뢰가 올라간다. 이는 밀실이 줄어드는 효과를 지닌다. 신뢰의 크기와 밀실의 크기는 서로 반비례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하나의 문화가 된다. 문화는 조금씩 알게 모르게 서서히 바뀌어 간다.


고전무님. 오늘 보드미팅 졌잘싸! 고생하셨어요!


이제 어떻게 하는지 알겠지?

밀실 만들어 탐정놀이 기자놀이 그만하고, 그냥 밀실을 없애면 그만이다. 오피스 게임을 제대로 하는 자는 전체공개 설장을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렇지 않은 어둠의 무리는 항상 쫄리게 되어 있다.


오피스 게임은 밀실에서 하는 체스 게임이 아니다.

함께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게임이지.


혁신이란 거창한 게 아니다.

때로는 우연히 날린 전체공개 설정 하나가 문화를 바꾸고 혁신이 되기도 한다.


P.S. 그날 초대리의 화상회의 전체공개 설정은 정녕 실수였을까? 의도된 미친 짓이었을까?


keyword
화요일 연재
이전 06화숫자만 내세우면 다들 그런 줄 알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