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맹 Mar 28. 2024

뭐? 회사에 숨겨진 비선실세가 있다고?

비서를 하수인으로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날 거치지 않고는 아무도 그분께 갈 수 없다!


깔끔한 외모와 옷차림. 흐트러짐이 없다. 철저할 것만 같지만 센스가 넘친다. 유머 또한 보통 이상이다.

비서. 중역을 보좌한다고 알려진 이들. 회사의 다른 부서나 실무와는 그닥 엮여있지 않다. 그래서 보통 사장님 스케줄 관리하고, 손님 접객의 역할 정도로 여긴다. 맞긴 한데 몰라서 하는 소리다.


이러고 있으니까 우스워 보이지?


비서에도 레벨이 나뉜다. 저렙 비서는 말 그대로 손님 응대나 비서실 살림만 한다. 진정한 실력자는 수행비서다. 비서학과 출신이 아무도 없다. 이들은 똑똑하고 언변이 좋다. 무엇보다 주인의 기분을 잘 살핀다.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주인인지 대번에 알아차린다. 의전에 있어서는 오피스 세계관 최강자다.


무엇보다 다른 캐릭터들보다 충성도가 우월하게 높다. 충성도가 높아야 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비서(Secretary)란, 주인의 비밀(Secret)을 공유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오너 가족들과도 친하게 지내는 건 기본이다. 오너의 법인카드를 모두 가지고 있다. 심지어 신분증, 인감, 각종 ID까지 관리한다. 등본 발급부터  주인 명의로 대신 처리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너는 믿음직스러운 비서에게 일임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어느 동네던 품격에 어울리는 맛집들을 많이 안다. 운전도 잘한다. 대리운전부터 병원 등 만약에 대비한 모든 연락처를 다 넣고 다닌다.


길잡이 역할을 할 때는 적당히 앞장 서서 걷는 것


해외 출장 중 오너가 비즈니스 파트너와 대화하며 거리를 걸을 때, 이들은 4~5m 정도 앞서 걷는다. 한발 떨어져 오너 얘기를 엿듣고 있지 않다는 무언의 신호다. 동시에 오너의 시야를 벗어나지 않음으로써 초행길 안내를 같이 하는 것이다.


공원이나 골프장 같이 확 트인 곳이라면, 이들은 4~5m 뒤에서 걷는다. 뷰를 해치지 않게 공간을 터준다. 주인의 그림자가 밟히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한다.


다음 스케줄 30분 전이면 다시 모든 동선과 예약지의 컨디션을 세세하게 확인한다. 스케줄에 변수라도 생기면 비상이다. 이들은 전광석화 같은 속도와 무자비한 밀어붙이기를 강행하여 일정이나 장소가 엇나가지 않게 한다. 어떻게 해서든 목적을 달성해 내고야 마는 강인한 의지가 돋보인다.


오너의 취향이나 기호까지 다 알고 있는 그들. 오너의 기분에 매우 신경 쓴다. 그 결과 비서는 주인의 목소리 톤만 들어도 기분을 아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보통 비서가 받는 대부분의 문의는 오너의 스케줄 확인, 보고, 미팅 일정을 잡을 수 있는지에 관해서다.

"사장님 내일부터 출장이라고 하시던데, 오늘 언제 오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사장님께서 이번 주까지 보고하라는 게 있는데요. 비는 시간대가 언제일까요?"


사장님은 기분 안 좋으면 비서에게 한 마디 한다.

"오늘 아무도 들여보내지 마!"

그러나 비서가 스케줄 문의를 받고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는 법. "오늘 사장님 스케줄이 다 차 있어요. 내일도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적당히 응대한다.


저 사장님 스케쥴 좀 알 수 있을까요?


여기서 비서실세의 본능이 나오기도 한다. 떡밥을 하나 던져준다. "실은 사장님이 아침에 거래처 만나고 오셨는데, 기분이 별로 안 좋으세요."


'사장님이 아침에 만난 거래처라면 초맹백화점! 거기서 입점 안 시켜줬군. 이걸 내가 풀어내면.. 흐흐..'


비서의 한 마디에 영감을 받은 임원들. 지금이 눈도장 타이밍이다! 영전 한번 더 해보려 사력을 다 한다. 밑에 팀장들을 부른다. "하던 거 다 멈추고, 초맹백화점 영업만 해. 조건 따지지 마! 무조건 입점시켜!"


다시 지시는 밑으로 내려간다. 우당탕탕! 와르르르!아.. 젠장! 또 시작이다. 온갖 대책회의가 잡힌다.

"초맹백화점 MD팀장 자리 좀 만들어 봐!"

"입점시켜 주면 단독 행사물량 팍팍 쏴 준다 그래!"

방향 잃은 직원들은 갈길 잃은 똥개들 마냥 안절부절못하고 이리저리 기웃거린다. 비서의 한 마디에 야욕이 불타오르고, 회사는 그렇게 불바다가 된다.


누군가의 야욕에 아래서는 늘 우당탕탕 아수라장이다.


비서는 레벨이 높아질수록 자연스럽게 오너 가족들 일에도 동원된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그럴 수밖에 없다. 비서들이 김밥 심부름부터 가족들 쇼핑에 필요한 것까지 다 구해다 주는 작금의 현실이 이를 증명한다. 이는 절대 티 나면 안 된다. 그래서 비서가 구입하고 알 수 없는 업무 추진비로 돌려받는다.


비서의 단점이자 애로사항은 임무를 단독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업 부서 팀장들은 팀원들에게 시키기라도 한다. 반면 비서들은 혼자 해내야만 한다. 우선 시킬 사람이 없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시킬 수 없다. 모든 건 오너의 프라이버시이자 비밀이기 때문이다. 새나가는 순간 이들의 오피스 게임은 끝난다.


몇 년 지나 비서로서 단독 업무 스킬이 더욱 노련해지고 레벨이 올라가면, 간이 점점 배 밖으로 나온다. 일반 직원들 뿐 아니라 팀장들에게도 갑질이 가능해진다. 뒷배인 오너를 핑계 삼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들은 안다. 오너를 팔아먹을 때 그 누구도 오너에게 가서 확인하지 못한다는 것을.. 비서와 친하면 팁을 던져주기도 한다. 비서에게 찍히면 오너에게 가는 문을 차단해 버린다.


그렇다. 차단 스킬이 가능해진다. 비서의 눈 밖에 난 상태로 대표 보고 일정 좀 잡으려고 하면 수법은 다양하다. 대표 스케줄에 장난질을 해서 일부러 업무 보고 기한이 늦게 만든다. 나중에 보고 늦었다고 찍히는 건 당연한 수순. 무능해 보이는 건 보너스.


"사장님이 어디 간다고 말씀을 안 해 주셔서요. 오늘 오실 거는 같은데 언제 오실지 모르겠네요?"

이에 하염없이 기다려 본다. 순번은 오지 않는다. 하늘이 캄캄해지고서야 무거운 발걸음을 돌린다. 비서는 알고 있다. 사장님은 이미 퇴근했다는 것을..


비서가 분노하면 누구 하나 맥이는 것쯤은 아주 쉽다. 이쯤 되면 지가 비서인지, 경호원인지 착각하는 수준에 이른다. 임원들도 꿀팁 좀 구하고자 비서에게는 잘해준다. 1 on 1 만큼은 최강자의 경지다.


계속 한번 기다려 보시죠. 오실 때도 된 것 같은데..후후..


비서가 신임을 받게 되면 비선실세가 된다.

보통 오너의 법인카드에는 한도가 없다. 어디서 얼마를 결제했는지 오너는 모른다. 다 비서가 하기 때문이다. 오너는 비서에게 일하면서 필요한 거 있으면 법인카드로 같이 사라고 얘기한다. 비서는 물건 살 때 자기 사고 싶은 것을 같이 끼워사기도 한다. 평소 가고 싶은 맛집에서 산해진미를 먹기도 한다.


돈에 혈안이 되어 있는 회사의 일진 경영지원도 오너의 법카 전표 앞에서는 침묵을 지킨다.

"너무 많이 썼다. 이건 무슨 내역이냐?" 절대 묻지 못한다. 그저 알아서 세탁할 뿐이다.


비서의 덕목은 의전이다. 최상의 의전을 위해 비서가 명심해야 할 것은 주인에게 왜라고 묻지 않는 것이다. 이유는 그저 눈치로 알아채는 것이다.


주인이 시키면 일단 한다. 그게 무엇일지라도..

이렇게 다년간 실전 수련을 거친 비서들의 눈치와 의전 내공은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비키세요!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그러나 비서.. 오너의 비밀을 보호하지 못했을 때 이들은 버림받는다. 죄목은 기분상해죄다.


중급 레벨의 비서가 현업으로 발령 날 때는, 오너가 그를 못 미더워하는 것이다. 뭔가 발설한 것 같은 의심이 있거나, 너무 많이 알아서 이제 바꿔야겠다거나.. 이들에게는 그간 모신 대가로 가고 싶은 곳에 발령 내주는 정도의 호의는 베푼다. 레벨 낮은 비서가 현업으로 발령이 나는 것은, 오너의 기분이나 필요를 잘 파악 못하는 경우다. 소위 눈치나 센스가 기대 이하인 것이다.


현업으로 간 비서들은 할 줄 아는 게 없다. 신입에게도 무시받는다. 사람들은 거리를 둔다. 놀던 물도 다르다. 대부분 노비들과의 하층민 생활에 적응을 못한다. 이들의 오피스 게임은 대개 여기서 끝난다.


반대로 고렙 비서가 부서장으로 현업에 오면 여기저기 곡소리가 난다. 갑질은 기본이다. 기초 업무 상식도 없다. 말도 통하지 않는다. 바른말을 싫어한다. 의전을 중시 여긴다. 인사 못 한다고 태클 건다. 아는 게 없어 기본이라는 단어만 외친다.


소장파의 누군가 논리 정연한 건의를 하는 날에는 그대로 극딜이 박힌다. 이들의 뒤끝은 매우 창렬하다. 다들 뒤에 모여 이 시간이 끝나고 백마 탄 초인이 오기를 염원해 본다. 그러나 미안하다. 그럴 일이 없다. 고렙 비서가 현업으로 발령 날 때는, 사업실적을 만들어 주고 임원에 앉히기 위해 부서장으로 보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곧 오너에게 가신의 작위를 하사 받았다는 의미이다. 이 가신의 작위는 무엇이든 썰어버릴 수 있다.


조심히 살펴가세요!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주세요!


비서는 밤낮없이 주중주말 없는 항시 대기상태에서 일상을 보낸다. 철저히 나를 버린다. 오너와 그 가족들을 극진히 모시고 섬기면 최종 보상으로 임원 레벨이 주어진다.


비서로 10년 이상을 버텨낸다는 것은 생각보다 매우 대단한 일이다. 자신의 삶 자체를 포기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비서.. 오너의 비밀을 공유하는 대가로 비선실세가 된다. 오피스 세계관에서 아무도 이들이 하는 일에 태클을 걸 수 없다.


단, 자아와 인생을 버려야 하는 것이 그 조건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