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인사가 만사다.
인사에 사람이 없어지는 그 순간
사람이 좋았다. 사람과 관계된 일을 하고 싶었다. 인사 그것을 천직이라 여겼다. 직원들을 위한 일이 곧 회사의 성과로 연결되는 일. 그 바로미터는 인사다.
알맞은 인재를 발굴하고 채용한다. 직원들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고민이나 고충을 들어주고 공감한다. 필요한 점은 인사 제도, 사내 복지에 반영하며 좋은 일터를 만들어 나간다. 직무 교육 프로그램도 개발한다. 성과 급여 체계도 합리적으로 만든다. 목표와 과정 관리로 직원들의 동기부여를 자극한다.
밝은 미소. 환한 얼굴. HR은 지치면 안 된다. 내가 곧 회사의 얼굴이다. 회사에 오는 이들이 처음 보는 얼굴은 바로 나다. 팀장님은 사명감이 투철하신 분이었다. 배울게 많았다. 그만큼 일도 매우 많았다.
"인사는 만사야. 하루에 인사 몇 명한테 하는지 세 봐. 만약 횟수가 줄어든다 싶으면 우린 잘못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늘 말씀하셨다.
많은 이들이 보였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찾아와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이들. 퇴사 면담을 하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들. 팀장님은 흔들리지 않으셨다. 퇴사하는 이들의 애로사항도 모두 들어주었다. 그들에게 몸 낮춰 회사를 대신해 사과하곤 했다.
"보다 나은 여건 만들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 분야가 이직이 쉽지 않아 시간이 필요하실 겁니다. 많지는 않지만 3개월 치 위로금을 준비했고, 공식 퇴사 처리는 다음 달 말로 하려고 합니다. 필요하시면 더 연장해 드릴 테니 편하게 이직 준비하세요."
타 부서에서 빌런 퇴치 문의를 받아도, 항상 양쪽 말 다 들어보고 내재된 문제점을 잘 파악했다. 부서 재배치를 통해 폐급 취급받던 꾸러기들이 에이스가 되기도 했다. 년차가 높아지면 자연스럽게 성장하겠지. 저분처럼 될 거라 생각했다. 닮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의 HR은 책에서 보던 것과 달랐다. 일은 끊임없었다. 쉴틈이 없었다. 모든 서류가 다 중요했다. 정신줄 살짝 놓는 날에는 늘 사고로 이어졌다. 인사는 사실 감정 쓰레기통이었다. 무엇을 발표해도 욕먹고 들어가는 건 디폴트 기본 번들 패키지.
현업에 채용이 늦는다고 욕먹었다. 뽑아주면 이상한 애 줬다고 욕먹었다. 교육하면 바빠 죽겠는데 하라는 거 많다며 욕먹었다. 공지해도 불친절하다고 욕먹었다. 고과 시즌에는 수도 없이 찢겨져 난도질당했다. 이런 정서 노동자가 따로 없었다. 진흙탕이 따로 없었다. 사내 공지 한번 하는 게 어느 순간부터 무척 겁이 났다. 공지문을 쓰고 두려워 게시를 못했다.
그때마다 팀장님은 잘 다독여 주셨다.
"실은 그게 가장 중요한 우리 일이야. HR에 얘기할 정도면 스트레스가 정말 심했다는 거지. 그걸 조금만 줄여줘도 사람들은 더 잘할 거야! 우리가 하는 일은 다양하고 광범위하지만 말야. HR에서 사람이 빠지는 순간 우리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거야."
그랬다. 모든 일이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다. 근데 HR은 모든 오피서가 그 대상이었다. 사건사고는 끊이지 않았다. 면접 펑크, 합격연락 착오, 매일 꼬이는 스케줄, 급여계산 실수.. 사람들은 봐주지 않았다. 무척 예민했다. 그렇게 한없이 두렵던 이 일도 시간이 지나며 서서히 익숙해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팀장님이 퇴사하셨다. 자세한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다. 건강 상 쉬고 싶다고 했다. 바보도 아니고. 매번 가짜 퇴사 이유를 신물 나게 듣는 게 HR이다. 하물며 HR끼리 그런 퇴사 이유가 진실이 아님을 어찌 모를까?
훗날 알게 되었다. 막무가내 인사와 형평성에 심하게 어긋나는 고과. 경영진을 찾아가 이 부당함을 강하게 어필하다 밀려난 것이었다.
"앞으로도 하나만 명심하면 돼. HR은 사람이 안 보이는 순간 끝난 거야." 마지막 말씀을 남기고 떠났다.
새로운 팀장님이 오셨다. 컨설팅과 비서실을 거친 엘리트다. 인건비 현황 자료부터 요구했다. 뒤이어 지출 목록을 요구했다. 매주 팀 주간회의는 각 담당들마다 돌아가며 자아비판의 장이 되었다.
"대체 전 팀장은 일을 왜 이 따위로 해 논 거야? 인사가 만사인데 돈이 줄줄 새네. 채용 건들이 이렇게 많은데 왜 지연되는 거에요?"
"처우 협상이 잘 안 되는 건이 좀 있고, 현업 부서에서 재요청하는 건도 많아서요."
"그게 지금 말이야? 스펙, 경력 대충 맞고 값싸면 먼저 들이밀고 빨리 뽑으라 그럼 되잖아!"
6개월 간 몇몇 선임 분들은 견디지 못하고 퇴사했다. 급여와 성과 담당자였다. 그들은 계속 요구되는 급여 삭감안, 인상 억제안 실행에 주저하다 쓰러졌다. 결국 그들은 살기 위한 이직을 택했다. 덕분에 빠르게 선임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럴싸하게 잘 포장된 급여 억제안을 성과 보상제 개선안으로 발표했다. 그리고 이듬해 우수한 고과로 진급했다. 이력서를 들고 다니는 날보다 계산기를 들고 다니는 날이 더 많아졌다. 윗선의 포커스는 얼마 들었냐였다. 철저히 거기 맞췄다.
이제는 이력서 속 환하게 웃는 지원자의 얼굴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적당히 스펙, 연봉, 경력 대충 빠르게 훑고 몇 명 찾아 현업에 던진다. 뽑겠으면 뽑고 말겠으면 마라. 여기서 안 뽑으면 언제 뽑힐지 모른다. 현업 부서는 다들 그마저도 감지덕지했다.
일이 편해졌다. 수시채용 그런 건 없다. 몰아서 한 번에 한다. 인건비는 더 낮아졌다. 퇴사할 사람에게 자비와 배려란 없다. 어차피 안 볼 사람 아닌가?
뭐가 그렇게 억울해? 그럼 나가면 되잖아. 싫으면 나가라구! 너는 짖어라. 나는 흘린다. 내가 니들 감정 쓰레기통도 아니고, 나도 편하게 살란다. 배려해 줘도 권리인 줄 아는데 그럴 필요도 없다.
팀장님도 이제 더 이상 태클 걸지 않았다. 일은 효율적이 되었다. 야근하는 날도 별로 없다. 해봐야 알아주지도 않는 교육. 교육도 다 비용이다. 웬만한 교육 다 폐지시켜 버린다. 그리고 아래 넘겨 버렸다.
감정을 철저히 차단하고 냉정한 이성만을 유지했다.
"20년 넘게 충성했는데 갑자기 지방 공장에 가라니요? 거기서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맞벌이라 가족들 케어도 해야 됩니다. 애들도 한참 크고 있고.."
"그런 것까지 제가 고려할 사항은 아니구요. 그럼 희망퇴직 싸인 하시던가요. 둘 중 하납니다."
정해진 룰대로만 하면 어려울 것 없었다. 내보내는 것도 인사다. 그냥 일이니까. 감정 가질 필요 없다.
'오피스 게임 이렇게 하는 거였구나. HR은 결국 고정비 줄이기다.' 깨닫는 순간 인정받았다. 일은 익숙해졌다. 몸은 편해졌다. 노하우는 쌓여갔다. 필살기도 갖췄다. 그렇게 1년, 2년 시간은 점점 지나가고 있었다. 그간 회사에도 많은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은 여러 목소리들을 담아 내 귓등을 스친다.
'미친 월급깎이 칼잡이 년!'
그렇다. 어느 순간 난 오피스 게임 최강의 미친 칼잡이 년이 되어 있었다. 상대가 그 누구라도 짜를 수 있다. 지옥까지 찾아가서라도 데려온다는 칼잡이. 그게 바로 나였다. 인사는 만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