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센터. 말 한마디에 천냥 빚 갚는 임팩트와 모먼트
진상들아! 다 들어주마! 고해 보거라!
"안녕하십니까?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아. 시끄럽다.
여기저기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 닭장 같은 비좁은 공간. 콜센터. 분위기는 그야말로 숨 막힌다.
보통 콜센터는 외주다. 콜센터 부서는 어느 회사의 상담 업무를 맡느냐에 따라 한 부서로 구성된다. 이곳은 하루에도 수많은 교육이 이루어진다. 상담원들이 수시로 못해먹겠다고 나가버리는 탓이다. 각 팀마다 상담 교육 강사가 있다. 상담업무에 대해서도 다 알고, 교육도 잘 하는 사람이다.
가끔 회사는 본사에서 고객 이해의 일환으로 콜센터 체험 교육을 필수 코스로 잡기도 한다.
교육장에서 설명을 듣는다. 우아.. 대충 전화받으면 되는지 알았는데, 시스템은 뭐가 이렇게 복잡한 것이더냐? 전화만 있는 게 아니다. 채팅도 한다. 게시판에 올라온 고객 문의를 정리해서 답변도 남긴다. 이거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구나..
강사님은 전화받는 법과 주의사항도 친절하게 잘 알려준다. 이곳에서 고객님들의 기분이 바뀐다. 고객님들의 기분 따라 전화를 받는 이들의 기분도 뒤바뀐다. 이런 잡생각을 하는 찰나, 아.. 본격적인 상담 투입이다. 자리에 앉아 헤드폰 깊게 끼우고, 심호흡 함 해 준다. 대기 버튼을 풀자 콜이 울린다.
"안녕하십니까?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고객님. 상담원 초맹입니다!"
체험에 배정된 상담원의 안내에 따라 어찌어찌 첫 전화를 받았다. 진땀이 난다. 핵심은 전화가 올 때 뜬 고객님의 사항을 빠르게 훑고 계속 화면을 쫓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난감한 순간은 바로 확인해 드리겠다고 하고는 어떤 걸 봐야 할지 몰라 헤매고 있을 때다. 눈과 손 그리고 머리와 입이 따로 논다.
상담원과 고객님 모두 진하게 버퍼링 23%에서 로딩 중이 뜨는 순간.. 머리가 하얘진다. '아.. 어쩌지? 망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상담원 분이 챗을 날린다. 오래 걸릴 것 같으면 죄송합니다 고객님 한번 해 주라며..
"죄송합니다. 고객님. 확인 중에 약간 지연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잠시만 더 양해 부탁 드려요. 헤헤."
고객님 얘기를 들으면서 추리도 해야 한다. 말하면서 손은 시스템 속을 찾아 나가는데 이게 참 어렵다. 간신히 단순 문의 2건 받았는데도 진이 빠진다.
점심시간이 되면 상담은 자동으로 중지된다. 지금은 점심시간이라는 안내멘트가 나간다. 콜센터의 점심은 무척이나 붐빈다. 닭장 같은 곳에 밀집된 수많은 사람들이 한 번에 나가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도 몇 번은 지나친다. 누군가는 포기하고 계단으로 10층을 내려가기도 한다. 10층에서 창밖으로 미끄럼틀이라도 만들어줬으면..
콜센터 상담원 대부분은 인근에 사는 워킹맘들이다. 살림살이에 보탬이라도 되어보기 위해 나온 것이다. 젊은 남자 상담원들도 간간이 보인다. 20살이 갓 넘은 듯 보이는 어린 여자 상담원들도 있다. 콜센터에는 도시락 족이 무척이나 많다. 이유는 돈을 아끼는 동시에 한번 나갔다 오는 게 너무 힘들어서다.
점심 먹는 내내 오가는 얘기는 평범한 일상이나 오전에 있던 진상 얘기들이다. 특히 월요일은 주말 효과로 상담이 미어터진다고 한다. 진상도 그때가 가장 많다. 상담원의 퇴사도 월요일을 겪은 후가 가장 많다고.. 대부분 상담원들이 뒤집어쓰는 스트레스는 고객님의 기분 상해죄를 받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점심 먹고 나서 화장실은 줄이 길다. 상딤 중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는 탓에 화장실은 필수 코스다. 전광판에는 누가 콜을 받고 있는지, 누가 대기 중인지, 몇 콜을 받았는지까지 실시간으로 중계된다. 최소 상담 시작 10분 전에는 자리를 지켜야 한다. 다시 시작된 오후. 대기모드를 해제한다. 한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받는다. 40대 남자분이다. 목소리가 상기되어 있다. 아. 직감했다. 문의가 아니다. 이건 분명 컴플레인이다!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고객님. 즐거운 오후. 상담원 초맹입니다!"
"정성을 다하는 거 맞아요? 거기 고객 신제품 체험행사 제가 신청했었는데! 주말에 행사장에서 명단 확인 안 된다고 빠꾸 당했잖아요!"
"아.. 네. 그런 일이 있으셨어요?"
"가족들 다 데리고 갔는데 말야! 그날 공치고 아무것도 못하고! 이게 지금 뭐 하자는 거냐구! 거기 책임자 나오라 그래요! 내가 이거 그냥 안 넘어가! 인터넷에도 다 올리고 신고도 할 꺼에요!"
아. 얼얼하다. 머리가 멍하다. 귀가 따갑다. 콧등이 매워진다. 눈물이 찔끔거린다. 옆에 코치해 주던 상담원 분은 때마침 안 보인다. 아 이걸 어쩐다. 그냥 기계적으로 기다려 달라 하면 또 난리치고 쌍욕 박겠지? 나두 몰라. 미쳤나 보다. 같이 화를 내 버렸다.
"고객님!! 그런 일이 있으셨어요? 이건 저라도 그냥 못 넘어가겠네요! 고객님! 절대 그냥 넘어가지 마세요! 얘기 들어보니 제가 더 화가 나네요!"
고객님은 순간 당황한다.
"네? 이거 그럼 해결 어떻게 해주시게요?"
"보상을 해 드리던, 뭘 해 드리던 잘못 했으면 당연히 해 드려야죠. 이거 제가 못 참겠어요. 제가 어떻게 된 건지 다시 확인하고 바로 연락드릴께요."
"그럼 믿고 기다려볼께요. 지금 전화받으신 상담원 성함이 뭔가요?"
"저는.. 저는.. 고객님의 상담원 초맹입니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아.. 신제품 체험 행사 뭔지 알 것 같다. 본사 마케팅팀에 확인을 요청하고 기다린다. 요것들이 킥킥거리며 콜센터 가서 뭐 하냔다. 뭐 하긴 상담하지..
어? 이상하다. 고객 체험 행사 신청 명단에 그 고객이름이 잘 들어가 있다. 그럼 어떻게 된 거지? 가만. 마케팅팀 계획에 행사장 준비는 이번 주고 행사는 다음 주말인데.. 아직 하지도 않은 행사에 어떻게 빠꾸를 먹은 거지? 지난주에 행사한 곳을 찾아본다. 옮거니! 무릎을 탁 친다! 알겠다! 옆 회사 신제품 출시에 잘못 간 거 같다. 여기까지 확인하는데 1시간이 훌쩍 가버린다.
옆 상담원 분의 채팅이 날라온다. 아까 그 고객이 날 바꾸라고 한댄다. 올 것이 왔구나. 행사 장소를 다시 확인해 봐야겠다. 심호흡하고 전화 땡겨 받는다.
"아.. 초맹씨? 저에요. 아 이거 어쩌죠? 아까 전화 끊고 다시 좀 보니까 제가 사과폰 행사장을 갔네요. 하하. 번지수를 잘못 찾았어요."
그럼 그렇지. 사과폰은 다른 회사잖아. 초맹폰 행사는 다음 주인데 말야. 아. 괜히 억울하네..
"네. 고객님. 착오가 있으셨군요. 안 그래도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 중이었답니다. 먼저 확인돼서 다행이에요. 헤헤."
"제가 괜히 엄한 데다 화냈네요. 하하. 그래서 전화드렸구요. 빨리 사과 회사에다가 전화해야겠어요. 이것들 아주 박살 내 버려야지!"
엥? 그거 아냐! 너 행사 신청은 이 회사에 하고, 행사장만 그 회사로 간 거라고! 거기다 전화하면 안대!
"고객님. 죄송하지만 저희 쪽 행사는 다음 주에요. 명단은 정상적으로 신청되셨어요. 다음 주에 가족들과 같이 오시면 더욱 신나게 보낼 수 있어요."
고갱님. 당황한다. 버퍼링 걸린다. 지가 어디 신청했는지도 까먹은 모양이다.
"아.. 아.. 그렇게 된 거군요. 또 다른데 전화해서 진상 부릴 뻔했네요. 알려줘서 고맙습니다. 그럼 다음 주에 이쪽 행사장 가면 되는 건가요?"
"그럼요! 가족분들에게 만회도 하시고, 더욱 알찬 시간이 될 거에여!"
"감사합니다. 지난주에 허탕 쳐서 집사람에게 한소리 들었거든요. 이것도 이제 보니 제가 착각한 거라 난감했는데, 이렇게 또 잘 풀리겠네요. 안 알려주셨으면 또 저 회사에 난리 칠 뻔했어요. 감사합니다."
"아니에여. 이렇게라도 착오가 풀리고 기분 나아지셨으면 되죠. 가족분들과 잘 얘기하시고 다음 주에는 좋은 시간 되세여! 상담원 초맹이었습니당!"
진땀 빼는 진상의 순간이었다. 그래도 그 고객 양심은 있었다. 근데 거기서 다짜고짜 초맹씨는 뭔데? 내가 지 친구도 아니고. 어쨌든 그가 일개 상담원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렀던 최초의 시점. 그렇게 진상 고객과 친구를 먹게 된 것 포인트는 무엇이었을까?
처음 고객이 진상을 부릴 때, 같이 화를 내주었기 때문이다. 고객의 호소에 지극히 공감해 주었다는 게 포인트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도 자신의 헛발질을 알게 되자, 민망했고 미안했을 것이다. 그래서 직접 쪽팔림을 무릅쓰고 먼저 전화했을 것이다.
거기서 그의 향후 헛발질이 예견되자, 이를 짚어 주었고 고객은 매우 흡족해졌다. 결국 그 고객님 예정대로 다음 주 행사에 참석했고 우리 신상을 많이 사 갔다. 진상 고객으로 시작해서 찐 고객이 되어버린 것이다.
진상을 만나 때로 상식이 안 통할 때는 과감히 어긋나야 한다. 물론 선은 넘지 않으면서, 넘을랑 말랑한 경계를 찾는 게 핵심이다.
진상들도 아무 데나 화내지 말자. 콜센터에 전화할 때는 분이 삭으면 하자. 감정적으로 얘기해서 해결될 건 없다. 사람 간의 소통은 먼저 잘해주면 똑같이 대접받는다. 해결해줘야 하는 일을 정확히 제대로 얘기해 주는 게 중요하다. 혼자 킹받아서 따다다다 해봐야 못 알아듣는다.
원래 고객 감정 쓰레기통 해 주고 월급 받는거 아니냐고? 맞다. 근데 상담원이 잘못했냐? 아니잖아. 진상 고객이 급격히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별 거 아진 일에도 처음부터 금전 보상을 노리고 협박을 일삼는 고객도 많아지고 있다.
갑질하지 마라. 고객은 왕이 아니다. 쓰레기 뱉지 마라. 너의 감정이 소중하면 남의 감정도 소중한 법이다. 더럽고 차가운 자본주의. 직업에는 귀천 있어도 사람에는 귀천 없는 법이다.
상담원들은 고객의 말 한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저들도 누군가의 소중한 아내이고 딸이다.
P.S. 그 고객님. 미안한 마음이었을까? 감동한 마음이었을까? 결국 초맹 상담원에 대한 칭찬 글을 회사에 접수했다고 한다. 주변에서 이러다 콜센터 가는 거 아니냐고 한다. 아. 이게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