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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맹 Aug 01. 2024

위기에 몰린 상황. 당신의 마지막 카드는?

현자의 세계는 이론으로 표현되지 못한다.


9회 말 2 아웃. 누구를 내보낼 것인가?


전편 : 아니 뭐 회사에 이런 팀장이 다 있어?


그 누구라도 궁지에 몰리는 순간이 있다. 빠져나오려 해도 계속 빠지기만 하는 늪처럼, 아무리 힘을 주고 발버둥 쳐도 안 된다. 그러나 희망을 잃지만 않는다면, 절망의 데스티니는 오지 않는다. 때로는 운도 작용하지만, 평소 실력은 위기에서도 오토매틱으로 발산되는 법이다.


시야의 확장

매주 하는 루틴 한 주간회의. 어느 날부턴가 팀장님은 매주 한 명씩 돌아가며 팀장 역할로 회의를 진행하도록 했다. 자신은 옆에서 조용히 딴짓을 하며 참견하지 않았다.

"지금 저거 직무 유기 아냐?"

"주간회의는 지가 진행해야지. 이걸 떠민다고?"

"저게 무슨 리더야! 앞에서 나를 따르라 해야지!"


모두 처음에는 다소 의아하고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이내 익숙해졌다. 다들 자신의 순서나 자기 일만 쳐다보던 협소한 시야가 넓어졌다. 그제서야 동료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서로의 연결고리와 부서 간의 관계까지도 한눈에 들어왔다. (단, 배가 너무 산으로 간다 싶을 때는 한 번씩 네비를 다시 찍어 주었다.)


귀찮은 주간회의. 난 휴대폰 할래. 너네끼리 해.


그 후로 팀장님이 뭔가 하자고 하면, 다들 이유는 모르지만 생각은 비슷했다.

'분명 무슨 뜻이 있을 거야. 해보면 알게 되겠지.'

그랬다. 그는 우리를 가르치려 들지 않았다. 나서서 이끌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항상 조용히 그저 뭔가 상황을 만드는 느낌이랄까?


스킬의 완성

하루는 옆 부서에 다 된 밥을 빼앗겼다. 완전 실적 떡상각인데. 모두 억울해했다. 함 엎어버려야 되는 거 아니냐? 팀장님은 개의치 않았다.

"신경들 쓰지 마세요. 저기서는 어차피 저 건 매듭 못 지어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여러분들이 저기 없으니까요."


정확했다. 익어가기 시작할 때 빼앗긴 밥은 결국 죽이 되어 버렸다. 밥은 그릇에 담기지 못했다. 그 떡밥을 포기 못한 여러 부서들이 실적을 만들어 보려 덤볐다. 3~4개 부서가 실패를 겪은 후, 다시 고스란히 우리에게 돌아왔다. 그들은 무릎 꿇고 사정하는 듯했다. 결국 답안지를 미리 가지고 있던 우리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아주 손쉽게 해결했다.


'그 나물에 그 밥이란 게 이럴 때 쓰는 말일까?'

'대체 이 분은 어떤 마법을 부리고 다닌 것일까?'  


짜잔! 제품은 이렇게 만들어 줘야지! 이것도 못해?


사실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 돌고 도는 과정에서 별거 아닌 것도 한방으로 만들어 낸다. 윗선에서 우리가 아니면 안 된다는 인식이 심어진다. 팀원들의 평범한 능력치도 극대화되어 보인다. 쉬운 일 자체를 드라마틱하게 해결해 확고한 시청률을 찍어버린다. 그렇게 잘 익은 밥은 예쁜 그릇에 담겨 먹음직스럽게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그는 중요도가 있는 일들은 여러 방식으로 나눠 마치 조립식으로 만들었다. 팀원들 각자가 가진 고유의 스킬을 넣어야 제대로 작동하는 그런 형태였다.


파고드는 허점

원료 구매로 만난 일본 거래처. 이대리님이 영어 통역을 맡았다. 계속되는 지루한 가격 조건, 공급 일정 등 격차가 좁혀지지 않았다.

"이대리. 저분들 뭐라고 하는 건가요?"

"팀장님. 어쩌죠? 도저히 조건에 못 맞추겠대요."


거래처와의 미팅은 늘 어렵다. 만만치 않다.


식사 후에도 협상은 계속되었다. 말이 통하다 안 통하는 그런 느낌이랄까? 우리는 영어로 말하다가 우리끼리는 한국말로 계속 오뜨케를 외쳤고.. 그런 그들도 비슷했을까? 영어로 말하다가 자기들끼리 일어로 뭔가 어쩌지를 말하는 느낌?


팀장님은 이대리님에게 조용히 쪽지를 보냈다.

"원료 받는 건 부산항 말고 저들이 지정하는 항공편에 우리가 비용 대는 거로 하구요. 인스펙션 면제 조건 걸어줘요. 대신 납품 기일 1주만 당겨 달라고 하면 오케이 할 겁니다."


딜은 그 조건으로 순조롭게 성사되었다.

"팀장님 아까 어떻게 한 거에요?"

"아.. 아까 자기들끼리 얘기하는데, 선적이 느리고 이중 검사가 복잡해서 싫어하네요. 시간 늘어나면 생기는 원료 성분 품질 걱정에다 자존심도 상한 것 것 같더라구요. 자부심이 상당해서 저희 조건에 거래하기 싫었던 거에요. 돈이 문제가 아니었어요."


아아.. 그렇구나. 잠깐! 가만! 뭐야! 그럼..?

다 알아듣고 있었으면서 태연하게 모른 척 통역해 달라고 했던 거다. 섬나라 아이들은 우리 중 아무도 일어를 모른다 생각하고 자기들끼리는 우리처럼 모국어 대화를 하다 들켰던 것. 팀장님은 계속 그 광경들을 지켜보며 패를 만지작 거리고 있던 것이었다. 다 알아듣고 있었냐는 우리의 물음에 피식 웃을 뿐. 답을 피했다. 그렇다. 무기는 꺼낼 때가 아니라 숨길 때 기회가 오는 법이다.


위기에 꺼내는 마지막 카드

오피스 게임은 그 누구라도 위기를 피해 갈 수 없다. 다만 위기는 많은 자가 있고 적은 자가 있을 뿐이다. 그 위기가 엄습한다. 그 무렵 획기적인 신제품을 구상하라는 오더가 내려왔다. 관련 부서들은 모두 같은 오더를 받았고 D-Day가 다가오고 있었다.


사장님을 비롯한 임원진들 앞에서 PT를 해야 한다. 이거 판세를 보아하니 딱 5개 팀에게 경쟁을 붙여버린 각이다. 분명 위너는 나올 것이고 나머지는 죽을 쑤는 서바이벌 같은 그림이다.


획기적인 신제품. 아무리 찾아봐도 만족할 만한 게 없다. 이런 걸 만들자니 비용이 터무니없다. 저런 걸 만들자니 현실이 도저히 못 받쳐 준다. 만들면 뭐 해? 단가 높다고 할 텐데. 또 1년 하고 다른 신박한 거 내오라 하겠지. 저번에 잘 팔던 거 왜 단종을 시킨 거야 대체. 저것들이 아주 재미 들렸나?


다들 바보여서 못하는 것일까? 딴 부서는 어떻게들 준비하고 있을까? 딱히 이런 회의만 하며 관망했던 것 같다. 뭐 시키는 것도 없어서 내 지분은 별로 없었다. 지금 머리를 굴려봐야 이미 늦었다. 다들 지쳤다.


심각한 표정의 팀장님. 뭔가 결단했나 보다.

"팀장님 도저히 각이 안 나오네요. 뭐라도 하긴 해야 하는데. 이번 PT 어떻게 하실 거에요?"

"음? 이번 PT는 제가 안 해요. 초대리님이 합니다."

"......................................................................."

"네? 네? 저.. 저요? 보스전 PT를 제가 해요? 우리 팀 구상한 신제품도 없잖아요?"

"평소 논의하면서 했던 저번 그거로 시원하게 다 질러주세요. 제가 같이 있을 겁니다."

"저.. 혹시 장난이시죠? 그거 뒷감당 안 될 건데.."

"괜찮아요. 다음 카드도 있어요. 한번 해 보세요!"


장난이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암만 얄팍한 팀장도 보스 전에 쪼렙을 내보내지는 않는다. 자신의 명성이 떡락하는 동시에 전례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무슨 오피스 게임 파워업키트 캐릭터 성능 편집도 아니구.. 답 안 나오니 이 인간이 드디어 미쳤나 보다.. 날 사지로 죽어라 떠 밀고, 지는 살자고 빤스런 치나 보다. 딱 그 그림이다. 더럽다. 치사하다. 이런 인간이었다니. 그랬다. 이제 몰라 나두!


보스전 PT는 극악의 난이도. 잘못하면 줘 터지고 게임 종료다.


PT 당일. 오피스 게임 모든 보스들의 총집합. 분위기는 좌중을 압도한다. 중요성이 그만큼 높았을까? PT 자료 만드는데 외주로 300만 원 썼다는 얘기도 들었다. 한 팀 두 팀 여러 팀들이 그럴싸하게 PT를 펼치며 오색찬란을 뽐냈다. 딱 봐도 준비들 무지 했네? 아 초라하다. 내 꺼 딱 4장인데.. 어쩐지 전날 자료 제출하니까 전략실에서 묻더라. 이게 다냐고. 뭐 빠진 거 같은데 다시 확인해 달라고. 그랬구나. 최소 10배는 더 했어야 했던 거구나.


한창 중인 보스전 PT 현장. 중간보스 팀장들이 나서 열띤 PT를 펼쳤지만 역시 보스전은 만만치 않았다. 실현가능성, 모방성, 경쟁력 부족, 높은 원가, 모호한 컨셉 등을 이유로 사방팔방 딜이 날아왔다. PT를 마친 팀장들은 세계관 보스 임원들의 총공세와 백태클에 쥐어 터지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마치 치즈 훔쳐먹다 걸린 쥐새끼 마냥 안절부절 못하며 "재고해 보겠습니다." "검토해 보겠습니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3단 화법을 순서대로 돌려 막기에 바빴다. 아.. 여기는 이런데구나. 하는 찰나..


아. 우리 팀 순서다! 아니. 내 순서다!

"저희 획기적인 신제품 이름은 초맹트루 울트라 하이퍼 사이언티픽 퍼스트 리미티드 에디션 더 헤리티지입니다. 작년 판매량 제일 많은 제품에서 재료 살짝 하나 바꾸고 이름을 엄청 획기적으로 지었어요."


불편한 표정의 보스들. 역시나 딜이 날아온다.

"저게 고객 진정성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름도 어렵고.. 저렇게 장난하면 팔리겠어요?"

"그전과 별로 바뀐 것도 없는데 가격만 높이나?"

"야! 전략실! 자료 사전 검토 제대로 안 했어?"

"저런 어설픈 기획 듣자고 여기 다 바쁜 중역들 한 자리에 모여있는 거 아닙니다."


보스전 PT가 장난이야? 야 똑바로 안 해?


진행하는 전략실은 당황한다. 사장님은 말을 아끼고 있다. 표정은 못 마땅해 보인다. 여기저기 노발대발 쫑알쫑알. 아 짜증 나. 정신이 희미하다. 잠시 눈을 감는다. 꼰대들 말소리가 흐리해진다. 고요하다. 눈을 뜬다. 저 쌍심지 켜고 있는 보스들. 피할 곳이 없을 때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다! 들어가자!


"이름 가지고 말장난하는 거 같죠? 별로 바뀐 거 없죠? 진정성 없어 보이죠? 맘에 안 드시죠? 지금 다들 인정하신 거네요? 근데 그동안 왜 그러셨어요?"

"..................................................................."

"제가 반대로 질문드리는 거에요. 왜 그랬냐구요?"

고요함만 남았다. 다들 말이 없다. 아니, 아무도 답을 하지 못했다.


"이 회사가 지금까지 해 온 방식, 잘 했다던 거 다 집대성한 게 이거에요. 제목도 좋은 단어 다 갖다 붙인 거고요. 매번 이런 식으로 상품화했잖아요. 안 팔린다 싶으면 혁신적인 제품 내라 하죠? 앞선 PT에서 획기적인 거 다 나왔잖아요. 근데 안 된다면서요? 저희 기획안은 회사가 해 온 방식이고 상도 여러 번 받았어요. 그런데도 지금 이거 원하시는 게 아니잖아요? 그럼!! 그게 안 되는 이유를 먼저 찾아야 되는 겁니다. 방금 말씀하신 그 진정성 있게! 뭐 좀 만들어 와 봐! 이게 먼저가 아니라요. 맞나요?"


임원들 눈치본다. 찐 보스가 나선다.

"계속해 보세요. 다들 더 들어봅시다."


"우리도 그간 잘 팔린 제품들이 많이 있어요. 다만 지속성이 낮았던 건 각 부서 처리 공정이 다 따로 놀고 라인업을 제대로 못 맞춘 이유가 가장 큽니다."

서서히 한 둘씩 고개를 끄덕인다. 정확히는 찐보스가 끄덕이자 그 눈치를 본 다른 임원들도 끄덕이는

것. 앞에서는 다 보인다. 누가 컨닝하는지..


"여기까지 이해하셨으면 다음 페이지 넘겨주세요! 이제부터가 찐입니다! 자! 보시면 결국 이래서 문제만 생깁니다. 어떤 기획이 나오더라도 이 상태로는 안 될 겁니다. 그럼 요기 앞뒤 절차 서로 바꾸고, 중간중간 쓸데없는 컨펌, 결정회의 이런 거 다 치우고 플로우를 한 번에 쭉 내려주면? 한 방에 연타 제조가 가능하죠. 직원들 일은 반으로 줄어들어요. 매번 외치는 원가도 훅 줄어듭니다. 그리고 판매기간은 두 달이 더 늘어요. 기존 제품으로도 충분합니다. 여분의 새로운 인큐베이팅 라인도 가동할 수 있습니다! 어때요? 그전에 안 팔리는 걸 만들었던 게 아니라, 제대로 못 만드는 여건을 놔둔 거라는 얘깁니다! 땅이 척박한데 계속 새로운 품종 심어대면 모해요? 수박 계속 심으면 모하냐구요? 자꾸 호박 되는데..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게 우선이죠."


보스들이 이것도 모르냐? 닭이 먼저야? 달걀이 먼저야?


설명은 계속되었다. "… 자아 공정을 요렇게 바꾸면 6개월 컷 나오구요. 제품 이름도 자꾸 장난질하지 말고, 걍 심플하게 초맹이, 돌멩이, 알맹이 이러면 됩니다. 어때요? 이제 하실 마음들이 생기시나영?"


팀장님이 사인을 보내고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저희가 분석했을 때 획기적인 신제품에 초점을 두기보다, 획기적인 기반 환경 조성에 중점을 두는 것이 우선이라는 판단입니다. 신제품을 만들자가 아닌, 신제품의 터전을 만들자는 발상입니다. 혁신의 결과는 제품이지만, 혁신의 대상은 과정입니다."


임원들 모두 사장님 눈치만 살폈다. 사장님은 잠시 생각하다 한 마디 했다.

"저런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한 것은 모두 임원들 책임입니다. 이게 이 정도로 엉망이었는지 나도 오늘 처음 알았네요. 우리가 획기적인 제품에 눈이 멀어 정작 등잔 밑이 어두웠습니다."

"누구 아이디어인가?"

"네. 이 건은 오늘 PT 진행자의 아이디어입니다."

PT는 끝이 났다. 임원들만 남고 다 퇴장했다. 결론은 판을 처음부터 재정비하는 것으로 났다. 팀장님은 공이 될 각이 보였음에도 가로채지 않았다. 프로젝트의 주관은 우리 팀에 할당되었고 여러 부서가 합류했다. 임원들은 기꺼이 협조했다.


돌아오며 팀장님께 물어봤다.

"이거 너무 장난치는 거 같아서 안 될 거라고 봤는데, 만약 저 털리면 다음 카드는 뭐였어요?"

"실은 다음 카드가 없었어요. 하하."

"네? 다음 카드도 다 있다면서요?"

"제가 쓸 수 있는 마지막 카드가 초맹이거든요."

뭐야? 그럼 또 안심시킬라고 있는 척한 거야? 이 인간이 진짜! 흐음.. 9회에 쓰는 카드 초맹이라..


그렇다. 관리자의 위치에서는 분명 저런 얘기를 하지 못한다. 하는 순간 책임론이 불거진다. 무능론이 펼쳐진다. 반면 쪼렙은 할 수 있다. 보스전에 필요한 건 회심의 한방을 지를 수 있는 캐릭터다.


아무리 따져봐도 답 안 나오는 위기 상황. 그때는 틀에 갇히지 않아야 한다. 프레임 자체를 뒤집어 버려야 한다. 물속에 빠지면 허우적 댄다. 곧 침몰한다. 이유는 힘을 주기 때문이다. 물을 땅이라 생각하고 힘을 빼면 몸이 뜬다. 그때는 틀 자체를 뒤집을 수 있게 된다. 틀 안에 갇히는 순간 침몰하게 되어 있다.


오피스 게임에서 쪼렙, 관리자, 보스는 서로 상성 관계다. 절대 쫄지 말자. 상성을 이용해 정신만 차리만 보스를 잡을 수 있다.


P.S. 너두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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