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半)픽션 <슈퍼맨은 없다_우리가 아이를 낳지 않는 진짜 이유>
1. B
- 직업 : 정규직 근로자 (IT회사 마케팅팀), 현재 육아휴직 중.
- 자녀(연령) : 남아1(8세), 여아1(5세)
- 주양육자 : 조부모
- 기타 : 지혜의 이전회사 상사
오랜만에 갖게 된 B부장과의 만남이 조금은 긴장되는 지혜였다. 입사 초기부터 B부장을 남몰래 존경해 오긴 했지만, 회사 상사라는 그마만큼 마음의 거리감도 있어 단 둘의 약속은 처음이었던 탓이다. 보고 싶은 마음에, 육아 선배의 조언이라도 조금 얻을까 싶은 기대에 갑작스레 연락을 하고 약속을 잡은 지혜였지만 막상 약속 당일이 되니 그제야 자신의 행동이 성급했던 건 아니었나 되돌아보는 것이었다.
B부장의 동네로 가겠다고 한 지혜였기에, 그는 처음 보는 낯선 동네에서 평소보다 느린 속도로 차를 몰았다. 내비게이션이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말하는 곳에 당도했으나 신도시 카페거리 특유의 주차공간 부족으로 곧장 주차를 하지 못하고 주변을 한 바퀴 더 돌아야 했다. 어쩔 수 없이 갓길에 차를 조심히 대어놓고서 많이 늦지는 않았는지 시계를 한 번 더 본 뒤 차에서 내리는 지혜였다. 차를 좀 더 인도 쪽으로 붙여야 했나 망설였지만, 이미 조금 늦어버린 약속시간에 살짝 비뚤게 주차된 차와 그에 따른 불편한 마음은 뒤로하고 서둘러 카페로 향했다. 요즘 유행하는 듯한 심플하고도 감각적인 인테리어의 브런치 가게였다. 가게의 간판도 일부러 상호명을 숨기려는듯 아주 작은 크기의 필기체로 써놓아 처음엔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칠 뻔 했다. 입구 앞에 자리한 영어로 빼곡히 적힌 메뉴 입간판을 슬쩍 읽고서, 지혜는 조금은 유난이라는 생각을 하며 문을 열었다. 내부를 찬찬히 둘러보다 창가쪽 좌석에 자리한 B부장을 곧장 발견할 수 있었다.
"어, 자기야. 여기야."
언제나 지혜를 비롯한 후배들을 "자기야"라고 불렀던 B부장의 활짝 웃는 얼굴을 보니 어색할까 걱정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는 지혜였다. B부장은 회사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편한 차림으로, 그에 꼭 맞는 편한 얼굴로 지혜를 맞이했다.
"자기네 집에서 멀지 않았어? 그러게 중간에서 보자니까. 나 먼저 시켰어. 자기도 메뉴 보고, 먹고 싶은 거 시켜."
"아니에요, 차 타고 오니까 20분도 안 걸리던데요. 그리구 여기 카페거리 유명하다고 해서 와보고 싶었어요. 오래 기다리셨어요? 부장님을 평일 오전에 밖에서 뵈니까 되게 새롭네요."
"나도 방금 왔어. 그러게, 자기랑 이 시간에 회의실이 아니라 브런치가게에서 볼 줄은 몰랐네. 요즘 어때? 잘 지내? 도망치듯 퇴사해서 인사도 못 했네. 조금 섭섭하긴 했는데, 자기 성격에 어지간했으면 그렇게 퇴사했나 싶긴 해서 걱정도 되더라고. 얼굴 보니까 괜찮은 것 같아서 마음은 놓이네."
두 사람이 주문한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지혜는 퇴사를 하기까지의 과정들과 요즘의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정신없이 B에게 건넸다. 지혜의 얘기를 듣던 B는 화를 내기도 하고, 안쓰러워하기도 하며, 웃음을 짓기도 했다.
"그렇게 힘들었으면 나한테라도 말하지 그랬어. 너네 팀 팀장 그 자식은 진짜 내가 옛날부터 싫어했어. 아주 쓰레기 같은 놈."
제 일처럼 화를 내는 B부장을 보며 왠지 마음이 든든해진 지혜가 대답했다.
"그러니까요. 그때는 그냥 정신이 없었어요. 누군가에게 도와달라고 말할 힘도 없고, 의욕도 없고. 그냥 내가, 나 하나만 포기하면 되겠구나 싶고."
"그 쓰레기 같은 놈이 자기가 그렇게 생각하게 만든 거라고. 가스라이팅 알지? 그거 한 거야, 그 쓰레기가. 어쩜 예전이랑 변한 게 없니, 걔는."
"그런가요? 그래도 아직까지는 좀 더 버텼어야 했나,라는 후회는 안 하고 있어요. 아마 통장 잔고가 조금씩 비어갈 쯤엔 후회할 것 같긴 한데... 부장님은 어떠세요? 첫째 때문에 휴직하신 걸로 A한테 전해 들었어요."
"어, 맞아. 작년 이 맘 때부터 휴직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다가, 결국 뭔 일이 터지고야 이렇게 쉬고 있지. 그러고 보니 나도 나 살겠다고 자기를 못 챙겼네... 자기, 7세 고시라고 알아?"
"7세 고시요? 7살에 보는 고시라는 말이에요?"
"응, 그게 문제의 발단이었어. 아니, 그보다 더 전부터 조금씩 문제가 됐을지도."
B는 전형적인 커리어우먼이었다. 첫째가 태어났을 때는 출산휴가 3개월 후 회사에 복귀했으며, 계획하지 않던 둘째가 태어났을 때는 반년 정도 휴직을 한 뒤 복귀하여 일에 전념했다. 그가 집을 비운 동안 육아는 시부모님이 도맡아 하였다. 시부모님께 아이를 맡기는 게 불편하지는 않냐 물어보는 주변사람들에게 아이를 돌봐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시부모님이든 누구든 그냥 감사한 게 아니겠냐고 말하는 B였다. 일을 사랑하고, 좋아하고, 일을 하지 않는 본인은 상상할 수 없는 B였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첫째가 어린이집을 다닌 네 살까지는 큰 걱정이 없었다. 어린이집에 보육을 맡기고, 시부모님께 방과 후를 맡기는 단순한 루틴에 별다른 육아의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아이 역시 할머니 할아버지를 잘 따르고, 밝고 건강하게 자라는 듯 했다. 그러다 아이가 5세가 되고 부터 B에게 아이의 교육과 관련된 각종 정보들이 쏟아졌고, 그에 비례한 걱정들이 쌓여갔다. 유치원을 어디를 보내는지, 영어유치원을 보낼 건지부터 학원은 어떻게 할 건지, 방과 후 시간은 어떻게 꾸릴 건지 등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는 B에게 물어보는 척 하며 본인들의 걱정 열차에 함께 탑승시키는 주변 엄마들이었다. 혹여 일을 하느라 아이의 교육을 제때 뒷받침해주지 못한 건 아닌지 걱정이 되던 B는 아이와 함께 하지 못하는 시간들 대신 교육에 대해서는 전폭적으로 지원을 해야겠노라 다짐했었다. 그 때문에 아이가 태어나고 그를 위해 소위 '학군지'로 이사를 오기도 했다. 본인의 회사와 집이 좀 더 멀어지는 것 쯤은 감수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B는 주변에서 흔들어대는 장단에 맞춰 그대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네 살 때부터 영어유치원을 원래는 보내야 된대요. 다섯 살도 조금 늦은 거지. 우리 하민이도 작년부터 보낼걸 그랬나 봐. 범이도 영유 갈 거죠?"
오랜만의 이른 퇴근으로 아들 범의 하원을 B가 맡았던 날. 아들 범과 같은 어린이집에 다니는 하민의 엄마가 우연히 마주친 B와 이런저런 안부의 말을 주고받았던 때였다. 그러다 하민의 엄마는 은근히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가며 떠보듯이, 그리고 걱정된다는 듯이 B에게 유치원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다.
"네 살 때부터 영어유치원을 보낸다고요? 아직 한글도 모르는 애를?"
놀란 B가 하민의 엄마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하민의 엄마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대꾸했다.
"그렇다니까요. 난 또 범이가 어디 믿는 구석이 있어서 범이 엄마가 아무것도 안 시키는 줄 알았는데. 한글 먼저 안 떼면 어때. 그냥 같이 배우는 거지. 우리가 한글 배우듯이 모국어처럼 영어를 배우니까요. 애들 머리가 말랑말랑할 때 빨리 가르쳐야 된다잖아. 조금만 늦어도 시간이 더 걸린다니까? 그리고 보내고 싶다고 다 받아주지도 않아. 경쟁은 또 어찌나 치열한지. 다음 주에 우리 아파트 건너편에 있는 영유 설명회 한대요. 생각 있으면 같이 가봐요."
핸드폰을 켜 스케줄을 확인하고 일자를 저장해 놓는 B였다. 그렇게 B는 하민엄마를 따라, 윤서엄마를 따라, 또 누군가를 따라 집 근처 영어유치원의 입학설명회 두 세 곳을 더 돈 뒤 한 곳을 정해 입학 준비를 했다. 가고 싶은 영어유치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레벨테스트'라는 걸 치러야 한다며 유명한 영어과외 선생님도 추천받았다. 이제 고작 다섯 살이 되는 아이에게 첫 과외를 시키며 이게 맞나 싶은 B였지만 매번 영어 때문에 고과에서 좋지 못한 점수를 받았던 본인의 현재를 생각하니 내 아이는 영어스트레스를 주지 말아야지 싶기도 했다.
'지금은 조금 힘들더라도, 나중에 크면 엄마한테 고맙다고 하겠지.'
애써 자위하는 B였다.
B의 아들 범이는 유치원에 곧잘 적응하는 듯했다. 유치원에 입학 한 지 1년 채 되지 않았을 때, 집에 있는 짧은 영어 그림책을 스스로 한 두권 읽기 시작했고, 꽤나 현지인같은 유려한 발음으로 부모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방과 후 수업을 포함해 한 달에 200만 원 넘는 비용이 투자되었지만, 아이의 영어실력을 보니 이 정도쯤이야 투자할만하겠다 생각하는 B와 그의 남편이었다.
'그래, 내가 뭐 때문에 돈 버는데. 이 정도야.'
영어유치원에 투자된 시간과 비용을 더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하원 후 집에서의 시간에서도 많은 부분을 영어에 할애해야 했다. 놀이시간은 과감히 줄이고, 영어노출 시간을 늘렸다.
"어머님, 범이 집에서 영상 보고 싶다고 하면 영어 영상만 틀어주세요. 너무 오래 틀어주진 말구요, 30분 정도만 틀어주면 돼요. 제가 어떻게 트는지 알려드릴게요."
"아버님, 책은 영어책 위주로 읽어주세요. 어려운 부분 있으시면, 이 펜으로 읽게 해 주시면 돼요. 펜을 이렇게 책에 갖다 대면 펜이 책을 읽어주거든요? 옆에서 범이가 보고 있는지만 봐주시면 돼요."
"여보, 범이랑 차 타고 갈 때는 차에서 영어동요 틀어놔 줘. 플레이리스트 내가 공유 해 줄게."
유독 바깥공기가 좋지 않던 날의 다음날, 범이 코감기에 걸려버린 날이 있었다. 범이는 콧물이 나와 숨쉬기가 불편하다며 아침부터 찡얼 대기 시작했고, 이마는 끓듯이 뜨끈하진 않지만 손바닥이 따뜻해지는 미열정도가 나고 있었다. B는 고민했다. 어린이집을 다녔을 당시에는 시부모님께 연락해 범이를 하루만 집에서 봐달라 부탁하곤 했지만, 영어유치원을 다닌 이후로는 결석이 예전만큼 쉽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한 달의 원비를 하루의 비용으로 환산하니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었던 것이다. 아이의 건강보다 중요한 게 있겠냐만은 오늘처럼 열이 확 끓지도, 티 나게 몸이 쳐지지도 않는 날엔 웬만하면 유치원에 보내게 되는 것이었다.
어떤 날은 갑자기 범이 영어가 싫어졌다고 선언한 날이 있었다. 유치원 하원을 하며 선생님이 걱정스레 범의 최근 문제를 알렸다.
"할머님, 범이가 요즘 집에서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 엊그제부터 갑자기 유치원에서 말을 하지 않고, 놀이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질 않네요. 말을 걸어도 대답도 잘 하지 않고요. 그러던 친구가 아닌데..."
"어머, 그런가요? 아닌데, 집에서는 아주 잘 노는데 왜 그럴까..."
시어머니에게 범의 상황을 전해 들은 B는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캐물었다. 처음엔 아무 일도 없다고 잡아떼던 범은, 계속되는 B의 채근에 소리치듯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싫어요, 영어로 얘기하는 것도 싫고, 듣는 것도 싫고 다 싫어요. 유치원에 가면 다 영어로 이야기하고, 영어로 말하고, 너무 지겨워요."
이게 말로만 듣던 '영어 거부기'인가 싶어 아차 하던 B였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B는 이번에도 범이의 이야기를 듣기보다 주변 엄마들의 말을 듣기로 했다.
"원래 그런 시기가 와. 모국어가 발달하는 시기에 다들 온대."
"맞아, 그럴 땐 그냥 잘 지나가겠거니 하면서 영어에 더 노출시키고 하면 되는 거야. 우리 말로는 잘 되는 게 영어로는 잘 안되니까 답답한 거지. 그럴수록 포기하지 말고 다른걸로 더 보여주고 들려주면 돼."
영어가 싫다는 아이에게 영어를 더 노출하면 되는 게 맞나 싶은 B였지만, 이 모든 게 다 겪어야 될 과정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범 역시 처음엔 완강히 영어를 거부했지만 끊임없는 엄마의 영어에 대한 구애에 포기를 한 건지 마음이 열린 건지, 다시 영어를 말하고 쓰기 시작했다. 역시 주변 엄마의 말을 듣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B였다.
범이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던 여름. '7세 고시'를 처음 접하게 된 B였다.
"범이엄마, 7세 고시 슬슬 준비하고 있어?"
또다시 B를 챙기듯, 하지만 실상은 본인의 걱정거리를 공유하며 B를 떠보는 하민 엄마였다.
"7세 고시요? 그게 뭐예요?"
B는 바쁜 회사생활에 본인이 또 무엇을 놓친게 있는지 싶었다.
"어머, 범이엄마. 지금쯤 시작해야 될 텐데? 범이 초등학교 들어가서도 영어학원 가야 되잖아요. 이때까지 한 영어 썩히면 안 되지. 우리 애들 힘들게 영어유치원 다녔는데 일반 유치원 다닌 애들이랑 같은 학원에서 영어 배워서 되겠어?"
"아, 영어학원 들어가기 전에 뭔가를 해야 되는 거예요?"
"범이엄마 정말 나 없으면 안 되겠네. 괜찮은 학원들은 이제 곧 10월부터 레벨테스트 받을거야. 우리 애들이 영유 나왔다고 해도 좋은 학원들은 테스트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래. 리딩, 라이팅, 스피킹 골고루 해놔야 될 거야. 우리 하민이도 지난주부터 과외받고 있는데, 범이도 소개해 줘? 수학이랑 예비초 과정은 내가 알려준대로 잘 하고 있지? 정말, 나 없음 어쩔 뻔 했어."
영어유치원을 다니면 영어를 모국어처럼 익혀 수월해질 거란 생각으로 보냈었는데, 이제는 그 영어실력을 유지하기 위한 학원 입학을 대비해 시험을 치러야 한댔다. 이게 맞나라는 생각이 또 한 번 B의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이미 시작한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딱히 다른 방안을 알고 있지도 않았다. 다행히 범이는 그런 엄마의 속을 알아주었는지, 엄마가 차려놓은 스케줄을 군말 없이 잘 수행해 주었다. 과외 선생님도 의젓한 범이를 칭찬했고, 원하던 학원의 레벨테스트도 어렵지만 잘 통과했다.
"우리 범이, 다 잘하네? 이제 우리가족 외국으로 여행가면 범이가 다 통역해 줄 수 있겠다."
아들 범이 기특하기만 한 B와 그의 남편이었다. 초등학교 입학도 수월하게 보낸 범이었다. 엄마 아빠가 곁에 있어주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짜놓은 학원 일정과 여러 활동들을 차곡차곡 잘 소화해 갔다. 손이 많이 가지 않고 말썽도 없는 범이 그저 대견하고 뿌듯하기만 한 B였다. 범의 학교 입학을 앞두고 육아휴직을 쓸까 말까 고민했었는데,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었다. 하루하루가 무난하게만 지나가던 날이었다.
세 가족이 오랜만에 식탁에 모여 저녁을 먹던 때였다. 식사를 하던 B의 남편이 고개 숙인 채 밥을 먹고 있던 범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범아, 눈을 왜 그렇게 깜빡거려? 뭐 들어갔어?"
남편의 말에 그제야 B도 아이의 눈을 바라봤다. 아닌 게 아니라, 범이는 눈이 불편한지 연신 눈을 깜빡이고 있었던 것이다.
"네? 저요? 아니요?"
범이는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의 눈은 의지와는 상관이 없다는 듯 불규칙적으로 깜빡거리고 있었다.
"어머, 얘가 왜 이래. 어디 보자. 뭐가 들어갔는지 봐줄게."
내심 놀랐지만, 아이에게 놀란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되겠다 싶었던 B는 애써 침착한 척 범의 눈을 살폈다. 이리저리 굴려보고 살펴보았지만 이물질로 보이는 건 없었다.
"너 언제부터 그랬어? 눈 왜 그런 거야?"
아빠의 질문을 들은 범은 무슨 소리냐는 듯 대꾸했다.
"뭐가요? 눈이 왜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범의 눈은 여전히 대중없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눈의 질환인가 싶어 안과를 찾았다. 하지만 안과에서는 범의 눈에 특이점이나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다. 아마도 틱장애일 수 있으니, 소아과나 정신과 쪽으로 가보는 게 어떻겠느냐라는 제안을 받았다. 틱이라니, 장애라니, 정신과라니...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낯선 단어들 앞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B였다. 범과 무거워진 마음으로 안과를 다녀오는 길, 아이의 하원을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하민엄마와 윤서엄마를 마주쳤다. 각자 팔짱을 끼고 미간을 한껏 찌푸린 채로 심각한 얘기를 나누는 듯한 모습이었다. 오늘같은 날만큼은 왠지 그들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기분에 못 본 체 하며 가던 길을 갈까 생각 중인 B에게, 눈치없이 하민엄마가 반갑게 알은 체를 했다.
"어머, 범이엄마가 이 시간에 웬일이야?"
오늘따라 유독 그의 반말이 친근함이 아닌 불편함으로 다가왔다. B는 그래도 예의를 차리며 그의 물음에 친절히 대답했다.
"아, 범이 눈 검사가 필요해서 반차 쓰고 같이 안과 다녀오는 길이예요."
"눈 검사? 눈이 왜? 우리 범이 공부 열심히 해서 눈이 나빠졌어?"
하이톤의 하민엄마의 목소리가 피곤하게 느껴진 B였지만, 항상 많은 도움을 받고 있었기에 조금은 내키지 않지만 방금 알게 된 문제들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어머, 범이 틱 온 거구나? 무슨 일이래. 아니 난 또 레벨테스트도 잘 통과하고 학원도 잘 다닌다 싶길래 대단하다 싶었는데, 마음에 뭔가가 있었나 보네. 근데 뭐, 요즘 애들 틱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다잖아. 시간 지나면 자연스럽게 괜찮아진대. 너무 걱정하지 마요."
"그런가요? 안 그래도 오는 길에 이런저런 인터넷 검색을 해보긴 했는데,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네요."
걱정이 될까 봐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말하는 하민엄마였겠지만, 범의 걱정에 머릿속에 복잡해진 B는 그마저도 불편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얼른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고, 그건 엄마의 손을 부서져라 꽉 잡고 있던 범이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런 그들의 속을 아는지, 혹은 알고서 일부러 더 그러는 건지 하민엄마는 고개 숙이고 있는 범이에게 억지로 눈을 맞추며 그의 안색을 살폈다.
"범아, 잘하고 있는데 왜 그래. 아줌마는 하민이가 통과 못 한 레벨테스트를 범이가 통과하는 거 보고 얼마나 부러웠는데. 하민이 테스트 떨어진 그날, 아줌마는 범이가 내 아들이었음 좋겠다고 했다?"
칭찬인지 뭔지 모를 하민엄마의 말에 B는 쓴웃음을 지으며 애써 자리를 떴다. 어쩌면 그들의 뒤에서 윤서엄마와 범의 틱에 대해 가볍게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겠구나 생각을 하니 괜히 범이에게 미안해지는 B였다.
집으로 돌아온 B는 남편과 상의하며 이런저런 정보들을 검색하고 집 근처의 정신과 센터를 예약했다. 내 아이의 정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지만, 센터를 간 첫 날 예상보다 많은 아이들이 대기실에서 앉아있는 모습을 보고서 꽤 놀라기도 했다. 안과는 망설임 없이 갔지만, 정신과는 어렵게 방문한 자신을 되돌아보며 반성하기도 했다.
면담은 다각도로 진행되었다. 의사는 아이와 면담을 하고, B와 면담을 했으며, 아이와 B가 놀이공간에서 함께 놀이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주로 어머님이 아이를 이끌어가는 양상을 보이시네요. 놀이를 할 때에도 범이가 하고 싶은 놀이보다는 어머님이 같이 하고 싶은 놀이에 맞춰서 따라가는 편이고요."
B는 자신의 속내가 투명하게 내비쳐진 것 같아 조금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엄마를 사랑하는 만큼 자신의 마음보다 엄마의 뜻을 따라주던 범이의 마음이 알게 모르게 조금씩 상처받고 있었던 것이다. B는 지난날을 되짚어보며, 범이의 생각보다 주변 엄마들의 말을 더 따랐던 지난날을 생각하며, 깊은 반성과 후회를 했다. '괜찮겠지', '이게 맞겠지' 싶어 넘겨짚었던 순간들이 장면 장면마다 세세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 후 B는 6개월 간의 육아휴직을 쓰게 되었다. 범이 태어나서는 출산휴가밖에 쓰질 않았으니, 남은 육아휴직의 기간은 넉넉했다. '학군지'를 벗어나 시부모님댁과 가까운 곳에 이사를 하기도 했다. B의 회사와도 더 가까워져 여러모로 이상적인 선택이었다. 범이의 영어학원은 학습보다 놀이위주인 학원으로 등록을 했고, 수학학원을 다니던 스케쥴을 평소 범이 다니고 싶어했던 피아노학원 일정으로 바꿨다. 범의 동생 역시 다섯 살이 되어 유치원을 갈 때가 되었는데, 영어유치원 대신 일반유치원에 입학시키기도 했다. 딱 하나만 포기하니 모든 게 수월했다. B의 욕심이었다.
"그렇게 휴직하고 지금 애들이랑 잘 놀고 있어. 아직 복직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으니까, 옆에 있어 주는 동안은 그냥 애들이랑 재밌게 많이 놀려고. 범이가 요즘 자기는 태어난 이후로 제일 행복하다고 하더라니까? 못하는 얘기가 없어. 안쓰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부장님도 힘드셨겠어요. 그래도 그렇게 결심하기까지도 쉽지 않으셨을 것 같은데."
B부장의 얘기를 집중해서 듣던 지혜는 곧 닥칠 자신의 일들을 미리 들은 것만 같아 조금 두렵기도 했다.
"그렇지, 쉽지 않았지. 육아에 답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부모들이 더 흔들리기 쉬운 것 같아. 내가 못 했던 걸 아이가 잘했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나만 불안하기 싫은 마음과, 크게 봤을 땐 사교육이라는 시장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의 부추김이 섞여서 만들어낸 혼돈의 대 극치랄까. 그 과정에서 고통받는 건 애들일 뿐인데 말이야. 나도 많이 놓았다고는 생각하는데, 이게 맞는지 가끔 생각이 들 때도 있어. 나중에 범이가 "나 끝까지 그냥 영어 계속 시켜줬어야지"라고 하던가 둘째가 "엄마 나는 왜 영어유치원 안 보내줬어"라고 할지도 모르잖아. 그래서 힘들어. 답이 없으니까. 뭐가 정답인지 모르니까."
"맞아요. 저도 애를 낳고 나서는 당연히 영어유치원에 보내야지 생각했었어요. 안 보낼 이유가 없어 보였거든요. 어릴 때부터 한글 배우듯이 영어 배우면, 커서 나처럼 영어 스트레스는 안 받겠다 생각이 들고. 근데 키우다 보니까 그게 끝이 아니더라고요. 단순히 언어만이 아닌 아이들이 어릴 때 배워야 할 인성교육이나 공동체생활, 놀이등이 있는 건데. 단순하지 않더라구요. 거기다 아이한테 대고 인풋이니 아웃풋이니 하는 용어를 쓰는 것도 영 미덥지 않고..."
"맞아. 그래서 어렵지. 아이들도 100명이면 100명 특징이 다 다르고, 잘하는 게 다른데 말이야. 어른들 눈에는 이게 성공이 보장된 길처럼 보여서 밀어 넣는데, 참 안타깝지. 그런데 지금의 우리나라 교육 울타리에서는 어쩔 수가 없어. 아이를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 하는 부모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가. 다 같이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 분명 있을 것 같은데, 그러지 못하는 현실이 슬플 뿐이야. 애 한명 키우는데 몇 억이 들어간다, 그런 이야기가 순 허풍은 아니라니까. 근데 다 같이 안 쓰면 안 쓸 수 있는 비용인데 말야. 참 안타까워. 탁상공론이 아닌 현실적인 대안들이 마련되어야 할 것 같은데, 일부러 생각을 깊게 안 하는건지 뭔지. 그러니까 자기도 정신 똑바로 차려. 어떻게 키울 건지 남편이랑 얘기도 많이 하고 말이야. 그래야 여기저기서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아. 물론 아이랑도 잘 얘기하면서."
지혜는 어린이집에 있을 주형을 생각하며 앞으로의 육아를 떠올려 보았다. '역시, 육아는 쉽지 않구나. 아이가 어느정도 자라나야 육아에서 해방이 될까, 이 땅에서 아이를 키우는게 과연 합리적인 선택인걸까, 아이를 낳지 않는 요즘 친구들은 어쩌면 우리보다 현명한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이 깊어지는 지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