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제며 항우울증 약이며 그 온갖 것들이 내 머리를 하루종을 멍하게 만들었다. 기분이 괜찮아지는 건지 아님 그냥 사람을 멍청하게 만들어서 우울할 틈을 안 주는 건지 알 도리가 없었지만, 우울한 기분은 조금 나아진 듯했다. 사실 이제 난 병원에서 인증받은 우울증 환자였기에 나의 집안일 파업에 대해 가족 그 누구도 불만을 표출할 수 없다는 점이 내 기분을 좀 더 좋게 만들기도 했다. 더러워진 집안꼴은 하루 이틀까지는 눈 뜨고 보기 힘들 지경이었지만, 어느 정도 마음을 놓아버리니 그게 뭐 어쩌라고 싶은 것이었다. 그래, 뭐 어쩌라고. 난 우울증 환자인데.
침대에 들러붙어 하루종일 누워있는 것도 좀이 쑤시긴 했다. 상태가 조금 나아지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괘씸한 아들과 남편은 내가 몸져누운 안방을 좀체 찾아오지 않았다. 매번 무언가 먹을 것을 가져오거나 말을 걸고자 찾아오는 건 딸 하진이었다. 이번에도 하진이 싱글싱글 웃으며 안방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엄마, 뭐 좀 먹을래? 마라탕 같이 먹을까?"
안 그래도 배가 고프던 차였는데, 마라탕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군침이 돌았다. 분명 인터넷에서는 우울증 약을 먹으면 식욕이 사라질 수 있다 했는데, 이놈의 몸뚱이는 아주 잠깐 동안만 입맛을 잃다 지 살려고 하는 건지 당최 먹을 것을 거부하질 않는다. 살이 빠진다고 좋아했더니 원래대로 돌아온 건 눈 깜짝할 새였다.
"마라탕? 넌 아픈 사람한테 마라탕이 뭐니?"
마음과는 다른 심통 궂은 말이 튀어나왔다. 이런, 우울증 약이 날 히스테리 배불뚝이 아줌마로 만들고 있었다.
"아니이, 엄마가 이제 죽도 질렸다고 하고, 어제는 입맛 도는 매콤한 거 먹고 싶다고 했잖아. 싫음 말구."
시무룩한 하진에게 미안했지만 왜인지 미안하다는 말은 입 밖으로 튀어나오질 않았다. 난 왜 이럴까. 내 머리맡에 선 채 핸드폰 창의 배달 어플을 다시 훑고 있는 머쓱한 표정의 하진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래도 그렇지, 마라탕이라니. 넌 정말 정도를 몰라. 매콤한게 땡긴다 그랬지 어디 매워서 쓰러지고 싶다고 했니? 애가 정신이 없어서는. 떡볶이 정도면 낫겠다. 오뎅 팍팍 넣어가지구, 씁. 오빠는 요즘 뭐 하고 지낸대? 걔는 어째 코빼기도 안 보인다니. 엄마가 이렇게 몸져누웠는데."
"오빠? 몰라? 나도 본지 꽤 됐네?"
눈은 계속 핸드폰을 향하고 있는 하진을 쳐다보자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학교 시간표를 그렇게 빡빡하게 짜지는 않았는데, 집에서 본 지 꽤 됐다니.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모르긴 왜 몰라, 하나뿐인 동생이 오빠가 어떻게 지내는지도 몰라?"
심통아줌마의 잔소리에도 묵묵히 배달어플을 훑던 하진은 나의 연이은 모진 말에 그제야 핸드폰에 눈을 떼고서 나와 눈을 지그시 맞추며 말했다. 살짝 눈망울이 젖어있는 것 같기도 했다.
"엄마는 그저 오빠만 보고 싶고 오빠만 걱정되지? 엄마 챙기는 건 오빠 아니라 나인 거 알면서도 그러지? 엄마 예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어, 외할머니가 외삼촌만 편애했다고 평생 고통받았다고, 엄마는 안 그럴 거라고 하지 않았어? 근데 엄마 지금 외할머니랑 똑같은 거 알아?"
십 년 넘게 키우면서 엄마한테 모진 말 한마디 하지 못했던 하진이 갑작스레 빠락빠락 대드는 모습을 보자니 위장부터 식도까지가 갑자기 꽉 막혀버린 기분이 들었다. 이 지지배가 내가 누워있다고 이때다 싶었던 걸까. 무슨 말이라도 하려 했지만 목에 무언가에 막힌 듯 해 말이 나오질 않았다. 와중에 말을 하던 하진의 촉촉한 눈에는 어느덧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내가? 내가 엄마랑 똑같다고? 속으로만 대꾸하는데, 하진은 대답 없는 내가 답답하다는 듯 제 말을 이었다.
"나야말로 절대 엄마처럼은 안 될 거야. 몰라, 굶어서 쓰러지든 우울증 걸려 입원하든 알아서 해. 지극히 사랑받는 오빠가 챙겨주겠지. 내가 이 말까지는 안 하려 했는데, 저번에 엄마 쓰러졌다고 오빠한테 전화했을 때 오빠가 뭐라고 한 줄 알아?"
하준이? 뭐랬는데? 다시 한번 속으로 대꾸하는데, 하진은 나의 가슴에 대못을 드릴로 박아버리고 떠났다.
"지금 동기들이랑 술 마시고 있으니까 나중에 전화하래. 나랑 아빠 보고 알아서 하라고."
썩을 놈. 뭐가 어쩌고 어째? 쓰러진 엄마 소식을 듣고 뭐?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것 같아 큰일 나겠다 싶어 침대 옆에 놔두었던 봉지를 입에다 대고 크게 호흡했다. 과호흡으로 쓰러졌었기에 혹시나 다시 재발할 경우를 대비해 임시방편으로 놓아둔 것이었다. 이놈의 집구석에서 나를 구해줄 사람은 이제 없다. 내가 알아서 살아야 했다.
봉지 속에서 수십 번 숨쉬기를 반복하고 나니 호흡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안정된 호흡과는 별개로 배신감과 허탈함, 억울함, 온갖 복잡한 감정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쓰러졌을 때의 순간과 고통이 하준의 술자리 모습과 겹쳐 머릿속을 떠돌아다녔다. 쓰러진 내 옆에서 내 손을 잡고 울며불며 제 오빠에게 전화하는 하진과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는 하준의 모습이 겹쳤다.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었다.
이대로 누워만 있다간 계속 그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라 나를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 일어나서 몸이라도 조금 움직여 머릿속 장면들을 털어버려야 했다.
화장실 갈 때만 움직이던 몸을 실로 오랜만에 일으켜 세워 거실로 나갔다. 거실은 생각보다 깨끗한 모습이었다. 퇴원 후 처음 집에 왔을 때의 모습보다 훨씬 정돈되어 있었다. 여태 누가 정리 한 걸까, 남편? 하진이? 하준은 절대 아닐 것이다. 썩을 놈이니까.
그래도 자세히 보니 섬세한 정돈은 되어있지 않았다. 어설픈 솜씨로 대충 깨끗해 보이게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바닥의 끈적임과 티비장과 소파 등에 소복이 내려앉은 먼지들은 보이는 사람의 눈에만 보이리라. 그래, 잘 되었다 싶어 다용도실에 두었던 걸레를 집어 들고 화장실로 가 촉촉이 물을 젖힌 뒤 청소를 시작했다.
바닥청소용 전동 물걸레가 있었지만 오늘만은 그 옛날의 엄마처럼 무릎 꿇고 내 손의 힘으로 바닥을 벅벅 닦고 싶어 그리했다. 먼지 쌓인 바닥을 힘주어 닦아내면 내 머리도 그와 같이 박박 닦일 것만 같았다.
먼지가 꽤나 쌓여 걸레는 금세 검어져 화장실을 몇 번이고 들락거려야 했다. 이놈의 좁은 집구석에 먼지가 왜 이리 빨리 쌓이는 거야. 아니, 좁아서 빨리 쌓이는 건가. 검어지는 걸레를 보자니 한숨이 나오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상한 쾌감이 들었다. 이런 먼지들은 내가 관리하지 않으면 아주 보지들을 못 하지.
바닥을 끝내고, 소파를 닦고, 장식장을 닦다가 문득 한 탁상용 액자에 눈이 머물렀다. 아들 하준이 8살 때 같이 찍었던 사진이었다. 나와 하준은 서로를 꼭 껴안은 채로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양 볼을 딱 붙이고 카메라를 쳐다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이 때는 엄마밖에 모르던 아가였는데. 아니, 3학년, 4학년 때까지만 해도 엄마랑 꼭 붙어 잘 거라던 아이였는데. 무슨 세월이 이 작은 아이를 저런 썩을 놈으로 만든 걸까. 아들놈 키워봐야 하나 소용없다던 어른들의 말도 내 아들은 다를 거라며 귓등으로 들었었는데. 오빠를 보면서도 난 저렇게 아들 키우지 말아야지 했는데. 아니다, 어쩌면 하진이 거짓말을 한 건 아닐까? 하준은 나를 너무 걱정해서 오히려 엄마가 어떻게 되면 어쩌나 무서운 마음에 나를 찾아오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그럼 그렇지, 내 아들이 그럴리 없지, 하진이 요 지지배는 늘 제 오빠를 질투했었지, 지지배 집에 오기만 해봐. 벼르고 벼르던 때 별안간 배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시계를 보니 청소를 시작한 지도 한 시간이 훌쩍 넘어 있었다. 아련한 액자에서 눈을 거두고 침대 위에 처박혀있던 핸드폰을 뒤져 찾아 배달 어플을 켰다. 그때, 벨소리가 들렸다. 현관패드를 보자니 사람의 형체는 보이지 않았다. 누구지, 이 시간에. 남편의 퇴근시간도 한참이 남은 시간이었다.
버선발로 나가 조심스레 문을 열었더니, 역시 사람은 없었다. 잘못 누른 건가, 싶어 고개 숙이고 현관문을 닫는데 발치에 하얀 봉지에 하얀 메모지가 붙어져 있었다. 배달이 잘못 왔구만.
배달원에게 다시 전화해야겠다는 생각에 한껏 귀찮아진 채 현관문 끄트머리에 쭈구리고 앉아 메모지의 내용을 확인했다.
00떡볶이
주소 : xx동 **아파트 104동 1307호
주문자 : 김하진
-매콤 떡볶이 1인분 xxx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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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요청사항 : 어묵 많이 넣어주세요.
실로 처음 느껴보는 말 못 할 죄책감이 가슴속에 무겁게도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