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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를 보았다

by 융글

오동통한 감자빵 같은 손으로 둥글 길쭉한 크레용을 그러쥐고 흰 도화지가 보일 틈 없이 야무지게도 색칠공부에 열중한 이 귀여운 여자아이는 어린시절의 내 딸, 하진이.

하진은 어렸을 적부터 그림에 관심이 많고 또 곧잘 하기도 했다. 첫아들 하준을 키우다 그 뒤로 딸 하진을 키우다보면 깜짝 놀라는 순간이 종종 있었는데 그중에서 제일 놀랐던 부분이 그림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직전까지도 색칠공부의 테두리를 한없이 튀어나가고 빈틈을 듬성듬성 남겨놓아 내 속을 터지게 했던 하준과는 달리, 하진은 손에 색연필이며 크레파스를 잡을 수 있었던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이것저것 야무지게 색칠하더니 다섯 살 정도가 되자 초등학생인 제 오빠보다 월등한 그림실력을 자랑했다.

"어머님, 하진이가 그림 그리기에 소질이 많더라구요. 하진이가 그림을 즐겨 그리니까, 반 아이들이 전부 하진이한테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기도 해요. 아이들이 정말 귀엽죠?"

유치원을 다닐 적 하진이 덕에 선생님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종종 듣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칭찬 한 번 받아본 적 없던 하준을 키웠을 때는 느낄 수 없었던 말 못 할 뿌듯함에 벅차오르고는 했었다. 역시, 하진이가 날 닮아 손재주가 있구나 싶기도. 선생님의 칭찬을 전해 들은 날은 유독 하진이 이뻐 보였는데, 나는 꼭 한 번 더 하진을 통해 사실확인을 했다. 선생님들은 엄마들 기분 좋으라고 과장을 할 때도 있으니까.

"하진아, 너 반에서 그림 제일 잘 그린다며? 친구들이 막 너한테 그려달라고 한다며?"

"어? 맞아. 친구들이 막 그려달라고 해. 그런데 내가 제일 잘 그리는 건 아닌데?"

역시, 선생님이 과장을 한 걸까. 갑자기 기분이 팍 상했다.

"제일 잘 그리는 거 아니야? 아닌데, 선생님은 너가 제일 잘 그린다고 했는데? 그럼 또 누가 잘 그리는데?"

하진은 나를 이상한 사람 보듯 올려다보더니 대답했다.

"몰라? 음.. 승원이?"

"승원이? 정승원? 무슨 소리야, 저번에 보니까 걔는 아직 동그라미도 제대로 못 그리고 사람도 졸라맨처럼 그리던데."

하진은 아까의 표정 그대로에서 조금 더 인상을 쓰고서는 대답했다.

"승원이 그림 멋진데. 그리고 선생님이 그랬어. 그림은 잘 그리고 못 그리고가 없는 거랬어."

말 같지도 않은 소릴. 잘하고 못 하고가 왜 없어.



하진의 그림사랑은 초등학생 때 까지도 이어졌다. 그림을 많이 그리고 싶다는 하진을 위해 흔쾌히 미술학원도 보내줬다. 수학학원 가기 싫다고 하자 미술학원을 주 1회 더 다니게 해 줄 테니 대신 수학학원도 다니자 그러면 울며 겨자 먹기로 알겠다고 하는 아이가 하진이었다.

그러다 그림 잘 그리는 하진이 자랑스럽기보다 걱정되기 시작한 건, 하진이 5학년이 되면서 학부모 모임을 나갔던 때였다.


"진아가 그러던데, 하진이는 아직 미술학원 다닌다고 하더라구요?"

세상 불편한 아이들의 반 모임. 안 가면 그만인 모임이지만 거기서 조금이라도 괜찮은 정보를 얻진 않을까 싶어 난 매년 빠지지 않고 아이들의 반 모임에 참석했다. 그날도 여지없이 참석해 별다른 도움이 될만한 정보는 없구나 싶던 차에 하진의 반 반장, 진아의 엄마가 차를 마시다 돌연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서 물었다. 갑작스러운 질문과 나에게 꽂힌 시선들에 당황했지만 티 내지 않고 대답했다.

"네? 아, 네... 하진이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서요."

"아 그렇구나. 하진이 그럼 예중이나 예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예중, 예고? 딱히 생각한 적은 없었다 싶어 갑자기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자니 맞은편에 앉은 작년 하진과 같은 반이었던 정우의 엄마가 말했다.

"집안에서 서포트 해 줄 능력 되면 밀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지."

내 편을 들어주려는 건지, 비꼬는 건지 알 턱이 없는 그 말에 가슴은 더 방망이질 쳤다. 내가 너무 안일하게 있었나. 하지만 이 아줌마들 앞에서 당황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최대한 여유롭게, 여유롭게.

"뭐 꼭 그렇다기보다는, 애가 하고 싶다니까 그냥 보내고 있어요."

차를 마시던 다른 엄마들이 나의 대답과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자니 마음이 조금 놓였다. 휴, 설득이 됐나 보네. 그러다 정우 엄마가 다시 말했다.

"하진이 엄마는 진짜 대단하다. 나는 작년에 정우 4학년 되자마자 예체능 학원은 싹 끊었잖아. 시간이 나야 말이지. 사실 예체능으로 성공하기가 진짜 어려운 건데. 특출 나게 잘하는 사람들만 성공하는 게 또 그쪽이니까, 오히려 공부로 성공하는 길이 더 쉽잖아. 안 되는 길인 줄 빤히 알면서 시간이며 돈 쓰는 게 내 눈 뜨고 못 볼 거 같아서. 진짜 작년에 정우 축구학원 끊을 때, 애랑 엄청 싸웠다. 손흥민, 박지성 정도 돼야 축구를 시키든 김연아 정도 돼야 피겨를 시키든 할 거 아냐."

정우엄마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곳에 앉아있던 열네댓 명의 아줌마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나니 기다렸다는 듯 너도나도 제 아이들의 예체능 학원을 끊었던 무용담들을 수도 없이 쏟아내는 것이었다. 아직 미술학원에 하진을 보내고 있는 내 앞에서.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있던 정우엄마는 뭔가 미안했는지, 아니면 속을 더 뒤집어놓고 싶었던 건지 말을 더했다.

"근데 하진이는 워낙 그림 잘 그리잖아. 자기가 하고 싶다는 의지도 있고. 그러면 보낼 만 하지."

정우엄마의 말에 다시 고개를 끄덕이는 아줌마들의 모습이 정말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분명 나를 속 없고 태평한 여자로 볼 게 뻔했다. 내가 다시는 이 모임에 오나 봐라.




"이 집 어떻게 찾은 거야? 새로운 집 아냐? 적당히 매콤한게 너무 맛있다, 야."

하진이 배달시켜 준 떡볶이를 보자마자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모르다 현관에 선 채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었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서 곧장 하진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가 미안하다, 너무 보고 싶다, 사랑한다, 고해성사에 고백까지 더해 쏟아붓고서 너 올 때까지 기다릴 테니 와서 떡볶이를 같이 먹자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착한 하진은 나의 제안을 거부하지 않고서 내 앞에 이렇게 앉아있는 것이다.

많이 울었는지 아직 얼굴이 조금 벌게진 하진과 떡볶이를 사이에 두고 식탁 앞에 앉아 있으니 자꾸만 못해줬던 예전 기억이 떠올라 나 역시 수시로 울컥해져 괜히 맴도는 말들만 내뱉던 중 그 예전 아줌마들의 모임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귀가 후 하진에게 미술학원 중단을 선언했던 날이 떠올랐던 것이다. 울긋불긋한 눈 주변의 얼굴을 보자니 지금과 꼭 같은 그때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초등학생이었던 당시의 하진은 나의 갑작스러운 선언에 울며불며 화를 내기도 하고, 싹싹 빌기도, 자지러지기도 했다. 하지만 아줌마들의 악귀에 단단히 씌인 나는 미술학원을 계속 다니면 하진의 인생이 당장에 망하기라도 하는 듯이 단호하게 그 자리에서 미술학원에 전화를 걸어 내일부터 학원을 나가지 않겠노라 알렸다.

내 가슴에도 크게 남아있는 그때의 기억과 응어리진 죄책감인데, 어린 하진에게는 오죽했겠나 싶었다. 동시에 지금이 아니라면 그때의 이야기를 꺼낼 수 없을 것 같아 용기 내 하진에게 물었다.

"하진아, 혹시 예전에... 엄마가 너 미술학원 그만두게 했던 거... 기억나?"

떡볶이를 쿡쿡 찔러 먹던 하진이 내 물음에 눈이 동그래져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았다. 이 엄마가 왜 이럴까?라는 표정. 머쓱해져서 어깨만 으쓱 들어 올리자니, 하진이 대답했다.

"그 기억을 어떻게 잊어."

그러더니 다시 입을 꾹. 눈물을 참는 것만 같았다. 가슴이 쿡쿡 아려왔다.

"미안해, 엄마가 그때 좀 제정신이 아니었나 봐."

눈가가 한층 더 벌게진 상태로 나를 다시 놀란 듯 쳐다보는 하진. 평생을 하진에게 미안하단 말을 제대로 한 적이 없으니 오죽 놀랐겠나 싶긴 했다. 이것도 우울증 약 덕분인가.

울듯 말듯한 하진을 보자니 나 역시 눈물이 날 것만 같아 고개 숙이고 어묵 세 개를 동시에 집어 입에 넣었다. 그러다 앞자리에 앉아있던 하진이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제 방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이었다.

아, 그때의 고통이 너무 심했던 걸까, 괜한 말을 꺼냈구나, 아직 나를 용서할 준비가 안 된 거겠지, 그때 난 악마였나, 별의별 생각이 들던 와중 하진이 다시 손에 무언가를 들고 나타나 내 앞에 앉았다.


8절 스케치북이었다.

말없이 하진이 건넨 스케치북을 어안이 벙벙한 채 받아 들자니 하진은 다시 고개 숙이고 떡볶이 먹기에 들어갔다. 하진이 손에 들려준 스케치북 첫 장을 넘기니 익숙한 얼굴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자글자글한 이마 주름에 푹 패인 눈,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은 회색과 흰색이 적절하게 섞여 차분하면서도 개성 있게 뻗어있었다. 입가 역시 주름이 가득했는데, 환하게 웃고 있어 이마의 주름보다 한층 더 깊어 보였다.

그림 속의 이 여자는 내 엄마, 그러니까 하진의 외할머니였다. 사진보다 더 사진 같은 그 그림에 놀라 마주 앉은 하진을 다시 쳐다보자니 이제 하진은 더 이상 떡볶이를 먹고 있지 않았다.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턱짓으로 뒷장을 계속 보라 신호하는 듯했다.

그 신호에 따라 한 장 더 넘기니 더욱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길주름한 얼굴에 옅은 눈썹, 높지도 낮지도 않은 코 옆에 자리한 팔자주름. 양 미간 사이에 자리한 내 천(川) 자의 옅은 주름이 화가 난 인상을 주었지만, 아까 할머니 그림과 똑같은 입매의 시원하게 뻗은 입이 인상을 조금 좋아 보이게 만들었다. 그건 내가 매일 보는 얼굴, 다름 아닌 내 얼굴이었다.

"네가 그린 거야?"

놀란 마음에 하진에게 물었더니 하진은 흐뭇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그냥, 시간 날 때."

뒷장을 계속 넘기자니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실력의 놀랄만한 그림들이 연이어 펼쳐졌다.

마음이 복잡했다. 고맙기도 하고, 대단하기도 하다는 생각과 동시에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하는 건가, 이제 벌써 고1인데, 그림을 다시 시작하긴 너무 늦은 거 아닌가,라는 못난 마음이 다시 불쑥 튀어나와 버렸다. 어떻게 해야 되나, 말 잘해야겠다, 어쩌지, 싶던 차에 갑자기 식탁 위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다. 평소 모르는 번호의 전화를 잘 받지 않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잠깐이라도 시간을 벌어 다행이다 싶어 하며 얼른 전화를 받았다.

"김하준씨 보호자분 되시죠?"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 딱딱한 말투가 호의적이지는 않은 듯 해 조금 긴장하며 대답했다.

"네, 그런데요?"

"여기 00구 경찰서입니다. 지금 여기로 와주셔야겠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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