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너의 이름은

by 융글

사고가 일어난 건 그때였다.

밀려드는 주문에 화구 네 개를 동시에 이용하며 정신없이 오믈렛을 만들고 있던 그 여자는 본인의 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화구 위 프라이팬을 조리하기 위해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이며 팔을 있는 대로 뻗어 요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정쩡한 자세에서 오믈렛의 모양이 잘 잡히지 않는지 점점 더 앞으로 기울어졌는데, 그녀의 목에 느슨히 걸쳐져 있던 앞치마가 기울어진 무게중심을 따라 스르르 흐르더니 앞쪽 화구의 불과 맞닿아 순식간에 불이 붙어버린 것이었다.

배 쪽에서 불이 붙었는데도 오믈렛 만들겠다고 집중하는 그를 발견한 건 나뿐인 듯했다.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부... 불이예요! 불붙었어요!"

내 목소리에 그 여자와 샐러드를 만들고 있던 나머지 여자가 동시에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손가락으로 그 여자의 배 쪽을 가리켰다. 드디어 불을 발견한 두 사람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너무 놀랐던 건지 어찌할 줄 몰라하는 듯했고 그 틈에 나는 설거지하고 있던 수프그릇에 차가운 물을 한가득 담고 달려가 고민할 것도 없이 불이 붙은 그녀의 배 쪽에 냅다 뿌려버렸다. 타오르던 불길은 수프그릇 한 사발의 물로 조용히 진화되었다.

셋 모두 놀라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았다. 먼저 입을 연 건 제일 큰 언니였다.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하하, 별 일이 다 있네. 고마워요, 신입 없었으면 얘 배 다 탈 뻔했다. 불나면 장사 잘된다던데 우리 가게 더 잘되려고 그러나보다. 아니다, 불 꺼서 안되나, 하하하."

큰 언니의 실없는 이야기를 들은 그녀 역시 빙긋이 미소 지으며 나를 향해 말했다. 그녀의 웃음 띤 얼굴은 실로 낯설었다.

"고마워요, 덕분이에요."

그녀에게서 수줍은 감사인사를 받은 내 입에서는 예기치 못한 말이 두서없이 불쑥 튀어나왔다.

"미안해요."

어리둥절한 눈앞의 두 여자를 번갈아 쳐다보며 다시 말했다.

"정말 미안해요."





"그게 벌써 몇 년 전 일인데요, 전 진짜 몰랐어요."

숨 돌릴 틈 없는 가게의 영업시간이 끝날 때까지 성재엄마는 나의 의미 모를 사과를 혼자 곱씹었고, 나 역시 냅다 튀어나와 버린 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하루 업무가 마무리되었다. 우리는 서로 조금 어색해하며 어쩐지 함께 퇴근해 자연스럽게 근처의 카페에 자리 잡아 앉았고 10년 조금 덜 된 그때의 이야기를 내가 먼저 꺼냈다. 예상외로 성재엄마는 당시를 잘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내가 조금 더 상세한 그때의 배경과 묘사를 첨가하자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맑게 웃으며 다 괜찮다고 했다. 그 미소에 겸연쩍어 물었다.

"전 두 분이 저한테 곁을 안 주시길래, 내가 그때 성재엄마한테 잘못한 게 있어서 그러는 거구나 싶었거든요..."

성재엄마는 다시 웃더니 대답했다.

"그건 저희가 잘못했다 싶네요. 윤대표가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사실 그 자리에 사람을 뽑아놓으면 계속 나가더라고요. 정을 붙이면 나가고 붙이면 나가고 그러길래 지영언니랑 같이 우리 한동안 정을 주지 말자, 언제 또 나갈지 모르지 않니 이런 얘길 했었는데. 돌이켜보면 그게 텃세랑 다를 게 없죠 뭐. 미안해요, 괜히 우리 때문에 쓸데없는 마음고생을 했나 보네요."

사실 그 말 자체가 완전히 믿기지는 않아 의심을 모두 풀 수는 없었지만, 다시금 내 앞에 앉아 무해하게 마주치는 그 눈을 쳐다보자니 영 거짓말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조금은 미심쩍어하며 커피 한 모금 마시려는데 성재엄마가 다시 말했다.

"근데 그때 저 그 말 다 듣긴 했어요! 우리 성재가 문제가 있을 거라면서 막, 그쵸? 기분이 좋진 않았어요."

갑작스러운 그녀의 발언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성재엄마는 내 반응이 재밌다는 듯 웃더니 말을 이었다.

"궁금하지 않으세요, 성재 어떻게 컸는지?"

학교 안에서 만났을 때 보았던 죽상의 얼굴과는 달리 중년의 나이에도 장난기가 어린듯한 그 얼굴에 지금 이이가 나한테 농담을 하는 건가 면박을 주는 건가 도무지 헷갈려 어떻게 반응할 줄 몰랐다. 하지만, 성재가 어떻게 컸는지는 궁금했다. 어떤 대학에 갔을까, 엄마 손을 그렇게도 안 타던 애가 하준이보다 좋은 대학에 갔다면 배가 좀 아플 것 같았다. 아, 난 언제 정신을 차릴까.

"성재, 잘 컸어요. 지금 미국에 있어요."

미국? 배가 조금 아파왔다. 미국 대학에 갈 만큼 공부도 잘했던 걸까, 이 여자는 미국에 애를 보낼 만큼 재력이 괜찮았던 걸까.

"한국에 있는 대학에는 못 갔거든요."

한국 대학에 못 갔다는 소식에는 안심이 되었다. 공부로 미국을 간 건 아닌가 보다, 무슨 수로 미국을 왜 간 걸까? 온갖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배가 아팠다가 안심이 되었다가 그 모습이 스스로도 우습게 느껴질 때쯤, 성재엄마가 말했다.

"어릴 때부터 비행기를 엄청 좋아했어요. 비행기 장난감만 모으고, 비행기 영화랑 책만 보고. 초등학생 때부터 조종사가 될 거라고 하길래 그러려니 했죠. 그러다가 그 꿈을 지도 잊고 지내는 듯했는데, 고2 때쯤 자기는 아무래도 조종사가 되어야겠대요. 학위를 공부하는 시간에 미국으로 건너가 바로 비행학교라는 데에서 빨리 실습하고 경력 쌓아 조종사가 되고 싶다더라고요. 비용은 어떻게 할래 했더니 그러니까 자기는 지금부터 공부 안 하고 학비를 벌어야겠대요."

상식 선의 이해 가능한 수준을 뛰어넘는 이야기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 내 벙찐 표정을 본 성재엄마가 한 템포 쉬고 웃더니 말했다.

"고2 때부터 돈 잘 모아서 떠났어요, 올해. 미국으로. 그래도 고등학교는 잘 졸업하고 가서 다행이죠, 뭐."

이번엔 배가 아프지도 않고 다행스럽지도 않았다. 부러웠다. 배 아프게 부러운 게 아니라 순수하게, 말 그대로, 그 삶이, 부러웠다. 조종사가 되고 싶어서 떠났다는 그 아이와 홀가분하게 그렇게 하라 떠나보낼 수 있는 그 엄마의 마음이. 도저히 어떤 말을 꺼내야 할까 감도 안 잡히던 차에 그 여자는 다시 웃으며 말했다.

"저라고 애 키우면서 가책이 없었던 건 아니에요. 고작 아르바이트나 전전한다고 애 교육도 신경 못 써주고 집에서 밥 한 끼 더 못 챙겨주는 건 아무리 "쿨"한 엄마인 척하려 해도 미안한 구석이 많았어요. 그래도 후회하지는 않아요. 성재가 어렸을 때, 제가 우울증이 정말 심하게 왔거든요. 그때 일 하면서 우울증이 많이 회복됐고, 그 이후로 더 일에 집중을 했던 것 같아요. 이기적이죠, 저 살겠다고 저를 먼저 택했으니까. 막연하게 성재는 지금처럼 혼자서도 잘 지낼 거라 생각하며 스스로 위안 삼고는 했는데 사실 아직도 마음속엔 미안함이 남아있죠."

너무 옛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그녀의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눈 앞에 앉은 그녀의 사정을 들을수록 내 입에서 나왔던 그때의 그 말들이 너무나 미안해졌다. 그렇잖아도 가책을 느끼고 있었을 그녀의 심정에 나는 무슨 자격으로 비수를 꽂았을까. 그저 내 고통에만, 내 사정에만 심취했던 자신이 한없이 못나게 느껴졌다. 예전 같았으면 그녀의 그 감정을 '그럼 그렇지. 다 좋을 수가 없지.' 하며 내 위안용으로 여겼을 테지만 지금은 왜인지 그렇지 않았다. 진심으로, 정말로, 미안했다.

한편으로는 이 여자가 하준에 대해서는 묻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렇게 유난떨고 생색내면서 키워낸 아들의 결과가 결국 이모양 이꼴이라는 것을 내 입으로 밝히고 싶지 않았다. 나의 지난 20년의 세월이, 정답이라고 믿었던 시간들이 틀렸다는 것을 아직은 다른사람을 상대로 고백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이 나와 반대된 삶을 살았던 사람에게 말해야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수만 가지의 감정이 피어오르는 걸 말로 표현할 능력이 내겐 없었다. 따뜻한 캐모마일 차를 명랑하게 호록 호록 들이켜는 성재엄마를 앞에 두고 모든 감정을 축약하며 말했다.

"미안해요, 성재엄마."

시기가 지나도 한참이 지난 내 사과를 받은 성재엄마는 다시 얼굴이 터지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찻잔을 다시 탁자에 두고서 그녀가 오른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됐어요, 오늘 저 위기에서 구해주셨잖아요. 그걸로 퉁치죠 뭐. 그리고 오늘 몇 번째 사과하시는거예요. 충분하니까 그만하셔도 돼요."

호탕한 그녀의 대답에 이것은 진심이다, 싶어 안도하는데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희 엄연히 직장동료니까 성재엄마 말구 제 이름 불러주세요. 제 이름은 미정이에요. 편하게 '미정아'라고 불러주셔도 되고, '미정 씨'라고 하셔도 돼요. 나이가 비슷하겠죠, 저희? 그러고 보니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윤대표는 매번 우리를 언니, 자기, 라고 불러서 어디 본명을 들을 일이 있어야죠."

'직장동료'라는 단어 때문이었는지, 실로 오랜만에 내 실명을 궁금해하는 질문 때문이었는지 그녀의 말에 심장이 기분 좋게 두근거렸다. 마치 초등학교 새 학기날, 옆에 앉게 된 짝꿍이 나에 대한 관심의 표현으로"너 이름이 뭐야?"라고 물어본 듯한 느낌. 새로운 관계가 시작될 것만 같은 기분 좋은 설렘. '하준엄마'가 아닌 온전한 나를 소개하는 게 정말 얼마만인 건가. 잃어버렸던 내 이름을 힘겹게 상기시키는 듯 어색하면서도 들뜬 마음으로 대답했다.

"아, 제 이름은..."




keyword
이전 19화인생의 회전목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