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그락달그락
레몬향이 첨가된 주방세제의 냄새가 코 속에 들어오다 못해 뇌 안의 깊은 곳까지 침범해 오는 느낌이다. 마트의 식자재 코너 저 멀리 노란 레몬의 기미조차 보인다면 등 돌려 다른 곳으로 향하고 싶은 요즘이다. 식당 취업 2주 차, 이 일을 계속해야 되나의 기로에 나는 서 있다.
처음 취업을 위해 지원한 곳은 일반기업의 총무직, 경리직이었다. 대부분은 서류에서 족족 떨어졌고, 운 좋게 두어 개의 면접을 보기도 했는데, 대부분 나보다 어려 보이거나 비슷한 또래의 면접관들이 존재 자체만으로도 나를 주눅 들게 했건만 인터뷰는 그보다 더 고역이었다.
"경력 단절 기간이 꽤 되시네요. 공백기간 동안 아르바이트나 다른 일은 아예 안 하신 건가요?"
"경력이 거의 없다시피 하셔서, 들어오시게 돼도 연봉은 신입 수준보다 더 드릴 순 없을 것 같아요."
"바로 정규직으로 입사하긴 어려우실 것 같네요. 저희가 공고는 정규직으로 내긴 했지만, 지원자님 경력이 워낙 없으셔서..."
차라리 대놓고 말하는 편은 양반이었다. 제일 힘들었던 건, 손에 땀이 흥건한 채로 꼴사납게 경직되어 앉아 있던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던 사람들.
"씁, 우리가 뭘 믿고 뽑아야 되나. 김팀장보다 나이가... 어우 몇 살이 많은 거야. 김팀장, 아무래도 힘들지 않겠어?"
빌어먹을 놈들. 이럴 거면 면접에는 왜 불렀나, 내 나이 많은 거 서류에 버젓이 써놨는데. 아니면 사람 앞에 놓고 괴롭히고 그런 거 좋아하는 소시오패스들인가.
모두 보기 좋게 낙방했다. 사람이 얼마만큼 쭈그러들수 있나 싶게끔 한없이 쭈그러든 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 쪼들리고 우울한 날들에 어떻게든 밖으로 나가야겠단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다 집 근처 핫한 브런치 가게의 주방 아르바이트 공고를 보게 된 것이다.
식당의 브레이크타임에 맞춰 오라는 사장의 말에 찾아간 오후 4시의 브런치 가게. 후하게 쳐줘도 30대 초반으로 보이던 대표는 나를 보더니 이전의 면접관들과 다른 환한 웃음을 건넸다. 그녀는 햇살이 따스하게도 내리쬐는 창가석을 안내하고는 커피 괜찮냐고 물은 뒤 직접 커피머신으로 가 커피 두 잔을 뽑아 들고 내 앞에 자리해 앉았다.
어디에 사는지, 건강은 괜찮은지 등을 조곤조곤 물어보던 그녀는 커피를 편하게 들라고 말한 뒤 콧구멍으로 넣는지 입구멍으로 넣는지 정신없이 커피 맛을 보고 있던 내 눈을 지그시 살펴보았다. 그 눈빛에 압도당해 젊은 여자가 기운이 세네, 그래서 이렇게 사업을 벌일 수 있는 건가, 생각하다 오랜만에 맛보는 정말 좋은 커피 맛에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어머 소리가 절로 나왔다.
"커피 맛있죠? 저희 언니가 부산에서 로스팅공장을 하는데, 직접 받아와서 쓰는 거예요. 업계에서는 꽤 유명한 원두가게예요."
촌스럽게 화들짝 놀라버렸던 게 민망한 나머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는 다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다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갖다 대고 본격적으로 몸을 내 쪽으로 조금 더 기울이며 말했다.
"처음엔 젊은 친구들을 고용했었는데, 금방 다들 그만두더라고요. 일이 힘들어서 그렇구나 싶어서 급여를 올려줘도, 급여 보고 왔다가 일 시작하면 금방 나가기 일쑤였어요. 그래서 한 명 두 명, 언니들로 뽑아서 운영해 봤는데 웬걸. 너무 책임감 있고 일도 잘하시는 거예요. 아, 제가 저보다 나이 있는 직원들은 다 언니로 부르거든요. 언니라고 부르는 거, 괜찮죠?"
이미 언니라고 부르고 있으면서 괜찮냐고 물어보는 그 패기에 조금 반감이 들기도 했지만, 그 기세가 마냥 기분 나쁘지만은 않아 수줍은 색시마냥 고개만 끄덕였다.
"어쨌든, 언니들 고용하고 나서는 직원 운영에 스트레스받은 적 없어요. 지금 언니 뽑으려고 하는 것도 사람이 나가서 뽑는 게 아니구, 장사 잘 되니까 손이 더 필요해서 추가로 뽑는 거거든요. 지금 주방 언니가 두 분 계시는데, 언니랑 나이가 비슷하거나 아마 조금 더 있을 거예요. 그래도 다 좋은 분들이니까 일하는 게 어렵진 않으실 거고, 급여도 다른 데보다는 잘 쳐준다고 약속할 수 있어요."
점점 빠져들어가는 그녀의 말에 나는 이미 그 가게의 직원이 되어있었다. 얼마 전까지 이제 사회에서는 더 이상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상처받았던 터라, 내가 필요하다는 그녀의 말은 한줄기 빛과도 같았다. 드디어 나의 쓸모를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윤대표의 말대로 급여는 다른 식당의 아르바이트보다 1.3배 정도 많았다. (대표는 자신을 "대표님"이라 부르지 말고 "윤대표"라고 부르라 넌지시 일렀다.) 대신 4대 보험을 철저하게 납부할 거라 실수령액은 기대보다 조금 못 미칠 테지만 그게 서로를 위해 좋은 거라 말했는데, 나는 4대 보험이 뭔지 실수령이 뭔지 도무지 월급을 받은 게 먼 옛날 같아 그냥 대표님 좋을 대로 하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씨익 웃으며 "언니, 대표님 말고, 윤대표."라 말했다.
집으로 돌아온 그날 저녁, 남편에게 식당일을 하게 되었다 일렀더니 꽤 놀라는 눈치였다.
"뭐? 일을 나간다고? 아잇, 그거 돈 얼마나 번다고 그래."
라고 반색하는 남편의 얼굴은 그가 뱉은 부정적 문장과는 다르게 코평수가 넓어지며 새어 나오는 웃음을 어거지로 참아내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본 딸 하진이 이를 놓치지 않고 대꾸했다.
"아빠, 엄마가 돈 번다니까 좋아하는 거 같은데? 콧구멍 커지는 것 봐."
"아잇, 무슨 소리야. 괜히 밖에서 고생하지 말어. 어디 남의 돈 벌어 먹기가 쉬운가."
남편은 계속해서 속없는 대답 하다 끝내 웃음을 참지 못하더니 괜스레 허 참, 한숨 쉬는 척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잔잔해진 웃음에도 한참을 그릇 속 밥에 젓가락을 꽂고 쑤시더니 푹 숙인 고개를 들지 못하며 말했다.
"고마워......."
답지 않은 식탁 분위기에 하진은 우리 둘을 번갈아 보고서 짐짓 호쾌하게 말했다.
"우리, 엄마 취업했으니까 짠 할까? 자, 다들 물 잔 들어봐. 아니다 이럴게 아니라, 우리 외식이라도 해야지!"
출근이라니. 내 인생에서 출근이라는 단어를 나에게 쓸 날이 다시 찾아오리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었다. 그런데 난, 출근을 하고 있었다.
20여 년 전 처음 회사에 출근하던 날이 생각났다. 드디어 무언가를 하게 된다는 뿌듯함,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된다는 설렘. 잘 차려입은 정장에 발이 아픈 줄 모르고 신었던 하이힐. 그날도 지금과 같은 여름이 곧장 찾아올 듯 말듯한 뜨거운 어느 늦은 봄날이었다. 그로부터 20년간 나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앞 모를 희망찬 마음에 꽉 차 있던 그 시절의 어린 나와 그때에는 예상할 수 없었던 세월을 구불구불 지나버린 지금의 내가 사뭇 서러워 눈에 눈물이 맺히는 듯했다. 출근 첫날부터 울 수는 없기에 재빨리 눈물이 안 날 생각으로 머리를 틀어야 했다. 눈물 들어가게 하기에는 하준이 놈이 제격이지. 하준이 놈, 내 인생 꼬이게 한 놈. 이 놈은 뭐 하고 지내는 거야. 썩을 놈. 눈물이 쏙 들어갔다.
식당의 직원 수는 생각보다 많았다. 홀은 윤대표를 포함해 3명, 주방도 나를 포함해 3명. 윤대표의 말대로 주방의 "언니들"은 나보다 조금"언니들"인 것 같았다. 윤대표의 소개로 언니들에게 떠맡겨진 나는 곧장 설거지대로 향했다. 워낙 핫한 브런치가게에, 나 역시 동네 친구들과 특별나게 기분 내고 싶은 날 가끔 왔던 가게였기에 주방 밖으로 나갈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돈은 벌어야겠지만, 아직 나에게는 지키고 싶은 나만의 그것이 남아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설거지대 앞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 공간에서 일한다는 것을 의미한 건 아니었다.
이 언니들이 나를 골로 보내려는 건가, 싶었다. 역시 여자의 적은 여자인가, 아님 내가 제일 어려서 얕보는 건가. 첫날부터 윤대표의 소개인사에도 바쁜 손은 도마와 프라이팬 위에 둔 채 눈길만 스윽 훑던 그들은 나를 설거지대에 보낸 이후에 이렇다 할 대화도 걸지 않았고, 호감도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저 내가 궁금해 묻는 말에만 하나 둘 대답할 뿐, 사적인 대화도 따뜻한 말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사실 나를 괴롭게 한건 역한 레몬세제의 냄새보다 이 낯선 곳에 외따로 떨어져 있다는 그 기분이었다.
"엄마가 뭐 잘못한 거 있는 건 아니구?"
4시간 내내 한 발도 움직이지 않고 같은 공간에서 설거지를 하느라 뭉쳐버린 내 어깨에 상쾌한 멘솔향을 풍기는 파스를 착 하고 붙이며 하진이 물었다.
"잘못하긴. 가자마자 인사하고, 잘 부탁한다고 하고. 내가 얼마나 살갑게 했는데."
"은연중에 말 잘못한 거 있는 건 아냐?"
"말 잘 못한 게 있긴. 무슨 말을 나눠야 잘못하기라도 하지. 없어, 그런 거. 둘 중에 한 명은 나랑 나이도 거의 비슷해 보였는데, 그 여자가 유독 나를 흘겨보는 느낌이라고 해야 되나. 저 둘은 엄청 친해. 지들끼리 아주 깔깔거린다구. 어휴 내가 이 나이 먹어까지 텃세라는 걸 당할 줄이야."
하진은 떨어질 기미 없이 짝 달라붙은 파스에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손으로 계속해 꾹꾹 누르며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물었다.
"아니면, 혹시 알던 사이는 아니고? 엄마가 지금은 개과천선 하고 있지만, 예전 성격이 솔직히 호감은 아니었잖아."
갑작스런 하진의 공격성 짙은 물음에 발끈하며 대답했다.
"뭐래? 내가 무슨 비호감이야. 그리고, 알던 사이면 내가 한눈에 알아보지. 아무리 내가 요즘 기억력이 흐릿해졌다고 해도..."
라는 말을 하자마자 둘 중 나와 나이가 비슷한 여자의 얼굴이 과거의 어떤 장소와 곧장 겹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