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침착한 내 목소리에 다희엄마 역시 조금은 놀란 기색이었다. 아까의 화가 난 목소리에서 반 톤이 낮아진 소리로 다희엄마는 얕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자기가 다 마음에 안 들었단 말은 아니야. 같이 있을 때는 그래도 재밌고, 유쾌하고, 가끔 우리가 대놓고 말 못 하는 것들을 대신 말해줘서 속이 뻥 뚫릴 때도 있었지만. 그 화살이 우리를 향하면, 그럴 땐 우리도 기분이 좋진 않았어."
"… 미안해, 그런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네."
다희엄마는 나의 짧고 묵직한 사과를 조용히 내삼켰다.
"… 미안하다는 말 듣자고 한 말은 아니고... 어디 자기도 우리가 다 마음에 들기야 했겠어."
또다시 잠시간의 정적. 다희엄마는 그것으로 됐다는 듯 대화의 머리를 틀었다.
"그나저나 이제 와서 어떻게 그 아르바이트를, 내가 무슨 수로 다시 구해줄 수 있겠어. 그때 우리 그나마 30대였으니까 그 정도 아르바이트라도 할 수 있었지, 우리 지금 50이 코앞이고 젊은애들이 줄을 섰는데 받아주겠어? 식당이나 마트는 어때?"
다희 엄마는 그 이후로 대화의 주제를 나의 재취업상담으로 잡고 이런저런 선택지를 제안했다. 우리 나잇대는 이제 카페아르바이트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 목이 좋은 곳이라면 편의점과 마트도 그리 힘들지는 않을 거라는 말, 그마저도 더 나이가 들어간다면 식당, 청소와 요양보호사로 빠지게 되는데 아직은 나이가 조금 아깝다는 얘기까지. 전혀 생각지도 못한 현실을 한 번에 와락 맞닥뜨리는 기분이었다.
이른 아침 시간 마주하는 아파트의 미화원을 뵐 때마다, 내가 집주인이고 나이 든 그녀는 마당 쓰는 노비인 것 같은 불편함에 괜스레 그녀의 반가운 인사도 어설프게 받아내던 과거가 떠올랐다. 그랬던 내가 입장 바뀌어 손에 빗자루를 쥐고 바닥을 쓸다 또각구두 신고 바쁘게 출근하는 젊은 새댁에게 인사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니 몸이 바르르 떨렸다. 식당에서는 어떨까. 무거운 반찬들을 한 대접 들고 가 식탁에 세팅해 놓는 동안, 자리에 앉은 여유로운 아줌마들의 눈길은 반찬으로만 향한 채 나는 투명인간 취급하겠지. 개중에 조금 친절한 성향이다 싶은 이 하나정도는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인심 쓰듯 슬쩍 던질 테다. 정말이지 상상만으로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나의 머릿속을 방금 왔다 간 사람처럼 다희엄마가 말했다.
"주변 시선 신경 쓰면 아무것도 못 해. 20년 전 생각하면서 공부했던 거, 일 했던 거, 돈 받았던 거 생각하면 아무것도 못 한다니까. 어쩔 수 없어. 세상이 참 그렇더라. 애 키우느라 일 못 하다가 이제 일 조금 할만하다 싶으면 원래 내가 있었던 자리는 없어. 어찌 보면 당연한 거기도 한데, 너무하다 싶기도 하지. 시간은 또 얼마나 빠른지.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어디 우리뿐이겠어? 다 그렇지. 그러니까 힘든 일, 궂은일도 자리가 없어. 그래도 자기야, 그게 어디야 생각하면 못할 것도 없어. 그리고 솔직한 말로, 아무도 내가 하는 일 신경도 안 써. 그냥 나만 날 신경 쓸 뿐이야. 요즘 애들 말로 자의식 과잉이라고. 어디 주변 시선이 밥 먹여줘? 돈 한 푼이 귀하지, 특히 요즘 같이 힘든 때는."
다희엄마와의 통화를 마친 뒤 어쩐지 기운이 쭉 빠져 소파에 쓰러지듯 기대앉았다. 빵집 아르바이트는 물 건너갔다는 생각에 허탈했다가, 편의점으로 눈을 돌려야 되나 싶다가, 차라리 누군가에게 얼굴 비추지 않는 식당의 주방일이 조금 더 낫겠다 계획 세우면서도 도무지 힘들겠다는 생각에 눈앞이 도로 깜깜해졌다.
그러다 다희 엄마가 전화를 끊는 말미에 남긴 말이 떠올랐다. 도통 용기를 내지 못하는 내 반응에 답답해하면서 내뱉은 말이었다.
"이해해. 오랫동안 집에만 있다가 갑자기 새로운 시작을 하려니 얼마나 힘들 거야. 근데 자기가 일을 다시 해보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있을 거 아냐? 그걸 생각해. 그리고 통장잔고도 봐 보고. 자기야, 경제적 독립이란 게 거창한 게 아냐. 내 돈으로 맘 놓고 커피 한잔 사 먹고, 기분 좋을 때 애들 몇 만 원 용돈 쥐어주고, 좋은 물건 보이면 친정에 슬쩍 선물해 주면서도 죄책감 안 드는 거. 그게 사람 기분을 얼마나 좋게 하게? 돈 안 벌어도 살 수야 있지, 남편이 벌어다 준 돈으로 살 수 있지, 아끼면 되지. 근데 그게 다가 아니니까. 그렇지? 자기도 그래서 이제서라도 다시 일하고 싶다는 거 아냐?"
끼적일 것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마땅한 걸 찾지 못해 딸 하진의 방에 들어갔다. 연필꽂이에서 볼펜 끄트머리에 강아지 얼굴이 대롱대롱 달린 삼색 펜을 찾아들고 책상에 놓여있던 무지 연습장의 맨 뒤 한 장을 북 찢었다. 그대로 돌아 나오려다, 제버릇 개 못준다고 어디 얘가 공부는 잘하고 있나 싶어 아까 손에 들었던 연습장의 앞면을 주르륵 훑자니, 개발세발의 글씨로 제법 공부를 한 흔적 반, 외면하고 싶을 만큼 수준급인 인물화가 나머지 반절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명치 쪽이 저릿했다.
종이를 놓고 글씨를 써댈 괜찮은 장소가 없어 식탁에 가 앉았다. 흰 연습장 가운데에 파란색 볼펜으로 세로선의 경계를 죽 긋고 왼쪽 편부터 글씨를 써 내려갔다. 오랜만에 글씨를 쓰려니 잘 써지지가 않았다.
"현재 잔고”
네 글자를 써두고 핸드폰을 켜 은행 모바일 어플로 들어갔다. 뭘 잘 믿지 못하는 나는 신문물의 기술 역시 마뜩잖아하는 편이라 은행업무도 꼭 내 발로 직접 지점에 들러 처리하곤 했었는데, 아들 하준의 계속되는 잔소리에 일이 년 전 어쩔 수 없이 은행어플을 설치했었다. 그러고서도 손에 완전히 익히는데 두어 달이 더 걸린 이력이 있기도. 사춘기가 지났음에도 도통 예전처럼 가까워지질 않던 하준이 웬일로 다정하게 이것저것 알려주는 게 좋아 잘할 수 있는 것도 부러 못하는 체하느라 일주일이면 그칠 것을 몇 달을 끌긴 했었다. 그러고 보니 신문물에 대한 배움과 가르침에 유독 관심이 많은 하준이었다. 그 재능을 그따위로 쓰다니, 갑자기 다시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꾹 눌렀다.
꾹 누른 울화였는데 통장 잔고를 보자마자 다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돈이 언제 이렇게 바닥나고 있었던가. 자세히 보고자 입출금내역을 훑었더니 몇 개월 전부터 입금액보다 출금액이 더 많은 상태가 유지되고 있었다.
가계부를 처음부터 안 썼던 건 아니었다. 소비를 줄이자, 아끼자, 할 때마다 가계부에 손을 댔었지만, 가계부를 쓸 때마다 밀려오는 불안감과 초조함에 도저히 답답해 살 수 없는 지경이 될 것 같아 쓰고 말고를 반복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남편 회사의 사정이 더 안 좋아질 때, 지출이 더 많을 때일수록 가계부와 멀리했다. 보기 싫은 건 더더욱 보기 싫었으니까. 남편은 그런 나를 보고 "회피성향"이라 일렀지만, 그런 말 할 거면 돈이나 잘 벌어오고 말하라는 대답으로 응수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회피성향이 맞긴 한 것 같아 혀끝이 씁쓸했다. 에잇.
입금액과 출금액의 균형을 종이에 써보자니 아직은 그 차이가 크지 않아 한동안은 곳간이 텅텅 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싶었다. 그래도 불안하긴 했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불안하게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경력단절이고 자아실현이고를 떠나서 생계가 위험했다. 이 생계의 문제가 오히려 나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종이를 반절로 나눈 오른편에는 구인 사이트에서 내가 실질적으로 도전해봄직한 일들과 시급을 써 내려갔다. 마음먹고 찾아보니 아르바이트 말고도 일반 회사의 나이제한이 없는 총무와 경리파트의 계약직 자리들이 꽤 있어 그것도 함께 적어두었다. 될 확률이야 적다지만, 요즘 젊은 친구들보다 적게 받으면서 똑같은 일을 해내리라 어필한다면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을 듯도 싶었다.
왼쪽의 잔액과 오른쪽의 내가 벌 돈들을 써놓자니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숨통이 트였다. 없는 돈이 쌓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8년 전, 다희엄마가 아르바이트 자리를 권했던 그때부터 진작에 일을 시작했더라면 더 많이 모았을 텐데, 생각하다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래, 과거는 생각하지 말자.
아침에 커피가 땡기는 날 고민 없이 좋아하는 동네 카페로 가 라테 한 잔을 결제하는 나, 하고 싶은 미술을 이제는 본격적으로 해보라고 하진의 미술학원을 흔쾌히 등록해 주는 나, 오랜 야근에 지친 남편에게 오늘 저녁 내가 살 테니 자기 좋아하는 장어집에 가자고 하는 나. 그리고 "우리 사위가 항상 고생이 많다"를 입에 달고 사는 친정엄마에게 "이건 내 돈으로 주는 거야" 당당하게 말하며 두둑한 용돈봉투를 쥐어주는 나를 생각하자니 어깨에 힘이 들어가며 세상 밖으로 나갈 준비가 되는 듯했다.
그래, 그것으로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