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3 선행 계획표 점검 좀 해주세요."
"00고 vs 00고, 문과 성향 남자아이라면 어디로?"
"영유 고민, 조언 부탁드려요."
습관처럼 들른 동네 카페의 글들이 이제 더 이상 예전처럼 중대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지난주 경찰서에서 마주했던 명문대 과잠바를 걸치고 땅으로 꺼질듯 곱아 앉아있던 아들 하준의 모습이 생생했기에 더욱이. 입가에는 씁쓸한 비소가 떠올랐다.
동네 카페 창을 끄고 포털 창을 새로 켜 검색란에 커서를 두고 잠시간 망설이다 단어들을 쳐 내려갔다.
"동네 아르바이트"
0.1초 되지 않은 것 같은 시간에 여러 개의 사이트가 주르륵 떴다. 티브이 광고에서 봤던 눈에 익은 사이트들이었다. 아르바이트와는 전혀 상관없을 것처럼 화려한 아이돌과 배우들이 광고하던 그 사이트들. 알바몬, 알바천국, 쿠팡알바... 벼룩시장도 이제 인터넷으로 사람을 구하는구나.
경찰서에서는 하준이 직접 영상 제작에는 참여하지 않았다는 소명이 이루어졌다고 했다. 다만 단톡방에서 영상을 돌려보고 소지한 것은 분명했다. 하진의 사진은 하준이 제공한 것이 맞았는데, 하준의 말로는 사진이 그런 용도로 쓰일 줄 몰랐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쓰레기가 된 하준의 말은 믿을 것이 못되었다.
어쨌든 직접 영상제작에 참여한 다른 공범자들보다는 형량이 적게 나올 것이라는 게 경찰 측의 의견이었는데, 조금 더 조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머지 공범자들은 군대를 간다느니 유학을 간다느니 무언가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군대를 다녀오면 어른들이 칭찬해 마지않는 명문대를 다시 고개 쳐들고 다닐 것이고, 해외 유학파라는 빛 좋은 스펙을 쌓았을 것이었다. 사건의 흔적은 그들에게 없어져 있겠지. 그 흔적이 남는 곳은 범죄자들이 아닌 오롯이 피해를 입은 여학생들의 몸과 머릿속 뿐일테다.
꼴도 보기 싫은 하준은 제 아빠의 군대도, 유학도 절대 생각지 말라는 불호령과 함께 시골 할머니 댁으로 보내졌다. 죄짓고 도망가지 말라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하진과 한동안 공간 분리가 필요할 것 같다는 게 두 번째 이유였으며, 썩은 정신을 조금이라도 정화시키고 오라는 게 세 번째 이유였다. 이후 나라에서 어떤 벌을 내리더라도 온전히 너 스스로 감당하라는 말과 함께.
하진은 제 오빠가 무슨 죽을죄를 지었구나, 감만 잡을 뿐 저의 사진이 그렇게 돌아다녔다는 일은 모르고 있다. 감히 내 입으로 말해 줄 수도 없었고, 말하기도 싫었다. 하준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진을 위해서.
하진은 SNS 줄이고 조심히 하라는 내 늘어난 잔소리를 오롯이 감당하며 조금의 의문을 품는 정도에서 다행히 더는 사건을 궁금해하는 것 같지 않았다.
남편은 사건 이후 되려 힘이 난 것 같았다. 도저히 손쓸 수 없을 것 같던 사건들을 해결하는 남편의 듬직한 모습에 내가 이런저런 의지를 많이 했다. 실로 오랜만에 당신이 있어 다행이라는, 고맙다는 소리를 입 밖에 꺼내기도 했으니. 남편은 나와 하진을 보호했고, 지켰으며, 비로소 제 자리를 찾은 사람 마냥 하루가 다르게 얼굴이 좋아지는 중이었다.
문제는 나였다.
하준은 나였고, 나는 하준이었다. 하준이 이룬 것이 내 것이었고, 내가 이룬 것이 하준의 것이었다.
그런데 하준은 내가 아니었고, 나는 하준이 아니었다. 하준이 이룬 것은 하준의 것이었고 내가 이룬 것은, 없었다.
사실 하준에 대한 남편의 태도가 너무나 단호해 야속하기도 하고 혼자 하준의 군 입대를 준비해 볼까, 유학자리를 알아볼까 하던 정신 못 차린 시간들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하진의 얼굴이 내 정신을 깨워주었다. 하진이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더라면 나 역시 그 못난 아줌마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 되었겠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여태 뭘 하며 살았나. 분명 하준의 업적은 나의 것인 줄 알았는데, 내 타이틀로만 생각했는데, 하루아침에 손안에 있던 고운 모래알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듯 모든 것이 부지불식간 사라진 것 같았다. 아들놈 키워봐야 결혼하면 소용없다,라는 말들에도 그래도 잘 사는 아들이 내 업적이 될 거라는 생각에 콧방귀 뀌던 날들이었다. 아들이 범죄자가 될 거란 시나리오는 나에게 없었으니까.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허망해하는 나에게 옆에서 보던 하진이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제안했다.
"오빠 없으니 허전해서 그래? 엄마도 바깥 활동을 해보는 건 어때? 간단한 아르바이트라도. 나도 이제 다 컸으니까 따로 안 챙겨줘도 돼."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라는 말이 무심하게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그 정도로 '아르바이트'라는 것에 나는 부정적 입장을 가져왔다.
남편의 외벌이 수입이 넉넉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 크지 않는 회사에서도 임원이 되지 못하고 만년 차장자리만 간당하게 유지하는 남편은 벌이도, 앞날도 우중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르바이트에 학을 떼는 건, 어디 갖다 줘도 안 쓰일 고집과 개똥 자존심 따위 때문일테다.
"다시 생각해 봐, 이주임. 출산휴가 3개월까지는 사장님이 승인해 주신대. 3개월 쉬다가 다시 복귀하면 되잖아. 지금 그만두면, 다시는 일 못할 생각 해야 되는 거야."
하준을 가지게 되면서 퇴사를 결정했을 때, 나를 유독 아꼈던 팀장님께서는 극구 나의 선택을 말렸었다. 애 낳기 직전 날까지 출근했다가, 애 낳고 3일 만에 복귀한 전적이 있는 애사심 가득한 팀장님이었다. 3개월이나 쉴 수 있는데 왜 일을 그만두냐며 몇 번을 뜯어말린 고맙다면 고마운 사람이기도 했다. 당시에는 지금과 다르게 3개월 출산휴가를 내주는 것만도 감지덕지였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어디서 생긴 고집인지 팀장님이 날 붙잡을수록 내 결정은 더욱 확고해졌다.
"저는 엄마가 집에 있어야 아이들이 잘 클 수 있다고 생각해서요. 아무래도 엄마 있는 집이랑 없는 집 아이들은 다르잖아요."
결국 일하는 엄마로 어느 정도 죄책감을 가지고 있던 팀장님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서야 홀가분하게 퇴사했다.
내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인지, 남편과 시어머니, 혹은 친정엄마가 주입시킨 건지, 그 시작을 이제는 도저히 알 길이 없는 "집에 엄마가 있어야 된다"라는 생각은 아이들을 키우며 점점 더 강하게 굳어졌다. 그리고 그 말이 내 족쇄가 되어 "집에 엄마가 있는 아이들은 다르긴 다르다"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내가 집에 있는 이상, 일하는 엄마의 아이들보다 내 아이들이 뒤처져서는 안 됐다. 다르긴 달라야 하니까.
시도 때도 없이 엄마를 찾는 아이들을 보면 귀찮다가도 내심 흐뭇했다. 역시, 엄마가 있어야 한다니까.
아픈 아이들을 돌보면 화가 나다가도 다행이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역시, 일 했었으면 어쩔 뻔했어.
한글도, 영어도 시키는 대로 척척 해내는 아이들을 보면 뿌듯했다. 역시, 엄마가 최고의 선생이지.
하지만 아이들은 자랐다. 키도 크고, 머리도 크고, 생각도 자랐다. 점점 나를 찾는 횟수가 뜸해지고, 내 말을 듣지 않는 날들이 늘어나고, 나의 손길이 닿는 시간들이 점차 줄어들면서 나에게는 자유의 시간들이 쌓여갔다. 처음에는 홀가분하고 달콤한 시간들이었으나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그 시간들이 조금씩 고역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독하게 회사를 계속 다니던 팀장님은 회사의 상무가 되었다는 소식, 내가 하준을 낳은 다음 해에 아이를 낳고서 3개월 만에 복직했다는 동기 윤주임이 대기업에 이직했다는 소식들은 나를 점점 더 벼랑 끝으로 몰았다. 엄마가 집에 있는 나는 아이들로서 내 가치를 증명해야 했다.
아르바이트 따위를 하려고 일을 그만둔 게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가치는 더 높은 곳에 있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들이 나를 점점 더 고집불통으로 만들었다.
"하준 엄마. 나 아는 분이 자기네 동네에서 베이커리집 오픈했는데 평일 알바 구한다더라고. 자기네 아파트 스벅 사거리 알지? 거기 옆옆 쪽에. 자기 혹시 생각 있어?"
아이들이 초등학생 고학년쯤 되던 때, 다희엄마는 오랜만의 브런치에서 불쑥 아르바이트 이야기를 나에게 꺼냈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나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알바는 웬 알바야?"
나의 무감한 반응에 조금은 민망했는지 다희엄마가 변명하듯 대답했다.
"아니, 요즘 우리 애들도 컸고, 집에서 노는 시간 많아졌잖아. 자기네 집 근처에서 오픈한다니까 단박에 자기 생각나더라고. 많이는 못 벌어도 애들 학원비 정도는 벌 수 있나 봐."
"됐어, 이 나이에 무슨 알바야. 그 정도 돈 버느니 그냥 집에서 애들 케어해 주는 게 낫지."
다희 엄마는 조금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아니 자기, 그래도 학원비 버는 게 어디야. 애들 크면 더 손이 안 간대. 지금이라도 조금씩 바깥일을 해놓는 게 좋지 않겠어? 저번에 얘기 들어보니까 동호 엄마는 이런저런 자격증 따서 애들 가르치는 기간제 일 잡았다고 하더라고. 그런 자리 하나도 아쉽지 뭐. 자기 싫다면 어쩔 수 없고. 그 시간대에 그 페이면 하겠다는 사람 줄 섰다는데 뭐."
빵집에서 계산 일 하려고, 기간제 선생이 되려고 버젓한 직장을 그만둔 게 아니었다. 내가 여태 회사를 다녔으면 나도 이름 있는 대기업의 관리직쯤 됐을 것이다. 난 빵집에서 빵을 사기만 하고 싶고, 기간제 선생에게 는 아이를 맡기고만 싶은 사람이다. 빵집 사장이나, 정규직 선생 일이면 모를까.
그런 쥐뿔도 없는 자존심과 내 선택이 옳았다는 걸 증명해야 된다는 밑도 끝도 없는 이유가 아르바이트에 대한 부정적 생각을 더욱 고고히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