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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사는 세상

by 융글

다희 엄마가 제안했던 그 베이커리 가게는 이제 우리 동네 대표 맛집이 되었다. 빵의 맛은 다 거기서 거기인 내 입에는 파리바게뜨나 뚜레쥬르나 그 집의 빵 맛이 별다를 게 없다는 입장이었지만, 입맛 까다로운 척하는 아줌마들 사이에서는 '뭔가 달라도 다른' 빵집으로 유명세를 탔다.

소금빵 하나 만드는데 단맛을 낸다며 금값보다 비싼 어디 유명 산지의 황금배추를 쪄서 넣는다던가 고소한 맛을 위해 그냥 먹기도 귀한 마카다미아 가루를 갈아 넣는다던 말도 안 되는 티브이 프로그램의 출연 모습도 그 유명세에 한몫했다. 그야말로 유명한 걸로 유명해진 빵집이었다.

어쨌든 그 길을 지날 때마다 다희엄마가 생각나고, 아르바이트 자리가 생각났다. 당시에는 이것저것 잴 것 없이 아르바이트라는 이름 자체에 학을 떼었던 지라 단칼에 다희엄마의 제안을 거절했다지만 꽤나 감각 있어 뵈는 인테리어에 파리바게뜨의 1.5배 되는 가격으로 빵을 파는 고급스러움을 보니 저 정도 공간에서는 일 할 맛이 조금은 나겠다, 싶던 것이다. 사실 알바천국이다 알바몬이다 찾아보았지만 막상 일을 하려니 괜찮은 자리가 영 없던 게 내 눈을 낮춘 것도 있었다. 빵집, 카페 알바는 고사하고 마트 계산원 자리마저 아쉬운 상황이었다. 세월이 나를 잡아먹고 있었다.

머리를 한 가닥으로 질끈 묶고 아래로 사뿐히 늘어뜨린 채 새하얀 셔츠에 베이지색 앞치마를 허리에 두르고서 진열장에 빵을 차곡히 채워 넣는 알바생의 모습에 자동 눈길이 갔다. 몇 살 정도 됐을까, 35? 40? 나보단 조금 젊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영 어려 보이는 얼굴도 아니었다. 그래, 내 자리는 저기다.


집으로 돌아와 곧장 다희엄마에게 전화 걸었다.

"어머, 하준엄마.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꽤나 놀라는 다희엄마의 목소리에 참 호들갑스럽다, 싶다 또 가만 생각해 보니 다희엄마에게 내가 먼저 전화를 건 적은 거의 처음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늘 먼저 전화를 걸고 안부를 묻던 건 다희엄마 쪽이었다. 내가 좀 무심했나.

돈을 벌 생각에 비집고 튀어나온 용기로 전화를 걸었지만 막상 다희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니 조금은 창피해졌다. 베이지색 앞치마를 허리에 둘러맨 나를 생각하며 턱까지 차오른 말을 뱉어냈다.

"어, 다희엄마. 잘 지내? 다른 게 아니라, 내가 방금 장을 봐오면서 요 앞에 베이커리를 지나왔거든. 근데 다희엄마 생각이 나는 거야. 기억나? 그때 왜, 자기 아는 분이 아르바이트 구한다고... 기억 안 나? 너무 오래됐나? 왜 저기 스벅 사거리 앞에... 글쎄 거기 이제 장사 되게 잘 된다? 자기도 알지? 처음엔 곧 망하겠다 싶더니, 글쎄 이제는 오픈 전부터 사람들이 줄을 선다니까? 하진이도 그 집 빵, 되게 좋아해. 왜 저번에 달인에 나왔잖아. 그게 진짜 레시피는 맞나? 다희엄마는 알아? 난 영 거짓말 같긴 하더라구. 다희 엄마는 거기 사장님이랑 친하니까 알겠다, 그치? "

호응이 없는 전화기 너머 상대의 목소리에 점점 더 말이 길어졌다. 구구절절 말을 꺼내는 중 다희엄마는 전화를 받고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를 정도로 조용했다. 전화가 끊긴 건가 싶은 의심이 들 때쯤, 그제야 다희엄마는 잃어버린 것을 눈앞에서 찾은 사람마냥 화들짝 놀라 하며 대답했다.

"아! 어! 알지, 기억하지!"

기억난다는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대꾸했다.

"기억나지? 아직 사장님이랑 연락하고 지내? 왜 친하다고 하지 않았나?"

"기억나지. 그게 벌써 몇 년 전이야. 우리 애들 5학년 때였나.. 아니 6학년 때 인가? 벌써 7년? 8년? 어머머, 벌써 그게 10년 다 돼 간다, 자기야. 자기가 그때 얼마나 매몰차게 거절했는지, 내가 그때 말은 안 했지만 엄청 섭섭했다고. 10년 지나도 생생하네. 사장님이랑은... 요즘은 조금 뜸하긴 하네? 자기가 말해줘서 생각났다, 야. 거기 아직도 장사 잘 돼? 나도 언제 날 잡아서 놀러 한 번 가야겠다."

사장님과 뜸하다는 다희 엄마의 말에 뜨겁게 달아올랐던 김이 팍 식는 듯했다. 그게 벌써 7년 전이었나. 마치 어제의 일 같았는데 숫자로 헤아려보니 꽤 많은 시간이 지난 걸 깨닫고 조금 민망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알바몬 사이트의 텅 빈 검색결과와 빵집 알바의 밀가루 한 톨 묻지 않은 하얀 셔츠를 떠올리며 본론을 꺼냈다.

"내가 그때는 조금 그랬지? 그때는 왜 그랬나 몰라. 근데 생각해 보니까 자기 말이 맞는 것 같더라고. 애들도 크고 엄마를 안 찾으니까 굳이 옆에 있어줘야 하나 싶기도 하고. 오전에만 알바 하면 그렇게까지 엄마 없는 티도 안 날 것 같고. 그래서 말인데, 다희엄마. 혹시 그 자리... 아직... 가능할까?"

그때, 수화기 통해 귀를 때리는 소리가 울렸다.

"아하하하하하하!! 아하하하!! 어머, 하하하하하하하 아 정말, 하준엄마, 하하하하하하"

저 여자가 뭘 잘 못 먹었나, 혼자 티브이를 보다가 빵 터진 건가, 싶게 깔깔대던 다희엄마는 그러고도 한참을 혼자 웃다 급기야는 사레가 들려 콜록대기까지 했다. 이 여자가 미친 건가.

"하.. 하... 아니 하준엄마, 잠깐, 미안. 나 물 한 모... 흠! 흠! 금만.. "

그녀의 웃음소리가 그리 유쾌하게 느껴지진 않아 전화를 끊어버릴까 싶었지만, 그래도 섣불리 판단하지 말자는 마음이 쓸데없이 피어올랐다. 아쉬운 입장이란 게 이런 거구나, 싶게 평소라면 대차게 외면해 버렸을 그 반응마저도 사정이 있겠지, 싶은 마음이 들던 것이다.


정수기 버튼음과 물을 쪼로록 따르는 소리, 컵 부딪히는 소리까지 적나라하게 귀를 때렸다. 핸드폰을 여전히 귀에 대면서 물을 마시는 건지 꼴깍꼴깍 식도를 타고 물이 넘어가는 소리마저 내 귀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미간이 자동 찌푸려졌다.

물을 다 마셔 진정이 된 듯한 다희엄마가 드디어 말을 꺼냈다.

"어, 하준엄마. 미안미안. 갑자기 사레가 걸려가지구. 아니 근데, 하준엄마.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하준엄마 너무한다."

아까 까지만 해도 까르륵 웃어대던 다희엄마의 웃음기 뺀 목소리에 난 어찌 대응해야 될지 감도 잡지 못했다. 우물쭈물하는 사이, 다희엄마가 말을 이었다.

"그때가 벌써 몇 년 전이야. 그때도 내가 하준엄마 생각해서 힘들게 한 얘기였는데, 하준엄마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 자기를 뭐로 봐서 그런 자리를 제안하는 거냐고 하지 않았어? 내가 그때 얼마나 민망했는 줄 알아? 심지어 그때, 나도 알바하고 있었을 때였는데 눈앞에 있는 나 들으란 듯이 몇 푼 안 되는 돈 벌면서 알바니 뭐니 하는 시간 동안 그냥 집에서 애들 옆에 있는 게 도와주는 거다, 하지 않았어? 이제 와서 얘기하지만 나 학원에서 데스크 알바 시작한다고 했을 때도, 나보고 그러려고 4년제 나온 거 아니지 않냐고 했었잖아, 하준엄마. 4년제 교육학과 나와서 학교 선생은 못할 망정 학원 선생도 아니고, 애들 출석 결석 체크해 주는 일을 왜 하냐고 했었잖아. 기억 안 나? 맞아, 원래 상처 준 사람은 기억 안 나."

전혀 예상치 못한 다희 엄마의 과거 회상에 난 그대로 굳어버렸다. 내가? 내가 그랬나? 지금의 내 상태라면 일절 하지 않았을 말들이었겠지만, 7년 전의 나였다면...이라고 돌이켜보니 과연 내 입에서 나올법한 말이었다. 면목이 없었다. 얼굴 보지 않고 통화 중인 상태임에도 얼굴을 볼 낯짝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사과를 해야 하나 전화를 당장에 끊어야 하나 싶던 중, 다희엄마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때 내가 얼마나 상처받았던지. 근데 자기야, 나 거기서 5년 넘게 일하면서 학원 운영하는 것도 배우고 자금도 꽤 모아서 작은 학원 하나 차리려고 오늘 상가 둘러보고 오는 길이야. 그런데 마침 바로 오늘, 자기가 거의 처음으로 나한테 전화를 해서 7년 전에 매몰차게 거절했던 빵집 아르바이트 자리가 아직 있냐고 물어보네?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돼, 자기야?"

진작에 전화를 끊었어야 했다. 이게 꿈속인가 싶게 매번 다정하기만 했던 다희엄마는 완전 딴사람이 되어 나를 철천지 웬수 대하듯 따박따박 따져 들고 있었다. 거기다, 학원을 차린다고? 다희엄마는 말로 나를 죽일 기세였다.


서로 전화를 끊지도 못하고 대답을 하지도 못하는 애매하게 붕 뜬 시간이 1분여간 흘렀을까. 다희엄마는 다시금 큼큼 목을 가다듬더니 말했다.

"하준엄마, 자기야. 자기가 어떤 마음으로 나한테 그렇게 말했을지 어느 정도는 알아. 그래도 그러는 거 아니야. 자기 필요할 때만 사람 찾고, 어디 오늘뿐이야? 우리 모임도 자기는 항상 애들 학원 옮겨야 될 때나, 진로 고민이나 무슨 문제가 있을 때만 나왔잖아. 아, 또 있다. 자랑하고 싶은 거 있을 때. 우리가 모를 것 같았어? 그래도 우리 같이 애들 키우는 입장이고 애들 어릴 때부터 봐왔으니까, 그 세월에, 그 정에 차마 싫은 소리 하기 힘들고 하니까 내치지 못 한 거지, 다들 하준엄마한테 상처받은 기억이 많아. 내 말 듣고는 있는 거야?"

평소였다면 단칼에 끊어버렸을 전화를, 왜인지 그날따라 끝까지 들어보고 싶었다. 손에 땀이 흥건한 채로 대답했다. 내 입밖에 나온 목소리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차분한 상태였다.

"응, 듣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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