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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위한 시간

by 융글

"아잇, 엄마. 일루 와. 여기서 인원 수만 입력하고 먼저 계산하면 돼."

"계산을 먼저 한다고? 패스트푸드도 아니고, 식당인데? 그럼 안내는 누가 해줘? 계산하고 아무 데나 가서 앉으면 되는 거야?"

"아 정말. 그만 궁금해하고, 카드 줘 봐. 내가 할게. 뒤에 사람들 기다리잖아."

맥도널드도 서브웨이도 키오스크 잘만 뚫었는데, 뷔페 체인점 입구에서 만난 새로운 유형의 키오스크에는 적잖이 당황했다.

첫 월급날을 맞이해 하진에게 뭐 먹고 싶은 거 없느냐, 물었더니 싱겁게도 뷔페가 먹고 싶다고 해서 찾아온 곳이었다. 소고기나 중식당 요리나 하다못해 삼겹살이라도 사줄랬더니 얄궂은 뷔페가 먹고 싶다는 하진의 말을 무시하려다 예전 친구 생일에 초대받고 거기 간 뒤로 가족들이랑도 가고 싶었다 얘기하는 모습을 보자니 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예산보다 조금 덜 쓸 수 있겠다 싶었지만 결코 적은 돈은 아님에도 종업원 한 명 코빼기 뵈지 않고 기계로 알아서 해야 하는 상황에 이미 마음은 반쯤 상해 있었다. 아니, 대접 못 받은 건 둘째치고 기계 앞에서 바보가 된 것 마냥 뒷사람의 눈초리를 받아야 하는 상황 자체가 나를 주눅 들게 했다.


그래도 우리에겐 엠지니 젠지니 하는 하진이 있었기에 척척 계산도 하고 테이블도 무사히 찾아갔다. 기분 상했던 마음이 내가 집에서는 만들어내지 못할 다양하다 못해 기발한 음식들로 가득 찬 뷔페음식을 보고는 조금 괜찮아졌다. 역시, 남이 해 준 음식이 최고다.


"많이 먹어. 오늘은 내가 사는 거니까."

접시 가득 음식을 채워 올려 앞에 두고 드디어 식사를 시작할 때쯤 뱉어낸 내 말에 마주 앉은 하진과 남편이 서로 눈을 쳐다보며 웃었다. 왜 웃는지는 알고 있다. 이 말을 오늘만 10번 넘게 한 것 같으니까.


오늘 아침부터 설레는 감정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매월 10일은 월급날. 내 첫 월급날.

돈돈돈 하기에는 궁색해 보여 대표나 동료들에게 월급이 정확히 몇 시에 들어오는지도 묻지 못하고, 아침에 일어난 이후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은행어플을 켜 새로고침하고 들어가 월급의 입금여부를 확인했다. 100번은 휴대폰을 켰다 껐다. 오늘이 아닌가, 한 달을 꽉 못 채워서 이번 달은 안 주는 건가, 조금씩 늦어지는 시간에 온갖 심란한 마음으로 집 앞 개천을 걷다 오후 4시 정각 다시 은행어플을 들어갔을 때, 비로소 입금내역이 확인되었다.


라메르브런치 #월 급여 #,###,###원


산책하다 말고 우뚝 제자리에 서서 다시 내역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월 급여"

땅을 파봐라 10원짜리 한 장 나올 줄 아냐며 어린 딸에게 자신의 노고와 세상사 노동의 가치를 일깨우려 했던 그 예전 아빠의 말이 생각났다. 10원짜리 한 장 벌지 못하던 수십 년의 세월을 지나 받게 된 일곱 자리 숫자의 급여를 받자니 그때 그 아빠의 말이 세상의 어떠한 진리보다 더 크게 와닿았다.

나만의 감정에 흠뻑 심취할랑 말랑 할 때쯤, 뒤통수에서 짜르릉 하는 자전거의 차임벨 소리에 놀라 화들짝 길을 비켰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뱉어 호흡을 가다듬은 뒤, 은행어플 대신 메신저 어플을 켜 가족들이 있는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를 날렸다.

"오늘 저녁은 내가 살 테니까 외식하자."



꽤 자주 온 솜씨로 음식을 다양하게 퍼 온 하진의 접시에 자꾸만 손이 갔다. 내가 퍼온 건 죄다 고기종류였는데 계속 먹자니 너무 느끼해 금방 물려버렸다. 음식의 원가를 따져 소위 뽕을 뽑아야겠다는 안일한 생각의 접시였다. 하진은 그런 내 모습을 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까는 나한테 쫄면 왜 가져왔냐고 하지 않았나? 내 쫄면 누가 다 먹나?"

괜히 머쓱해져 대답했다.

"야, 이거 그냥 쫄면 아니네. 뭘로 무친 거지. 그냥 식초랑 고추장 맛이 아닌데. 내가 먹고 싶어서 먹는 게 아니라, 너 이거 집에서 해줄까 해서 먹어보는 거야."

내 대답을 듣고 피식 웃던 하진은 제 접시를 슬그머니 내 쪽으로 밀었다. 그런 하진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배도 조금 불렀겠다 슬슬 며칠간 고민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김하진, 너 00역에 있는 입시 미술학원 알지? ㅁㅁ동에도 있는 거."

하진은 내 접시의 고기를 먹다 무심히 대답했다.

"알지. 예지도 거기 다녀."

"아 그래? 엄마도 알아봤더니 ㅇㅇ고 앞에 있는 데 보다 거기가 더 괜찮다고 하더라? 너 학교랑도 가깝고, 걸어서 왔다 갔다 할 만한 거리고. 영어나 수학학원이랑 독서실도 바로 붙어있어서 이동하기도 괜찮을 거 같애."

고기를 먹던 하진은 조금씩 미간을 찌푸리더니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이 아줌마가 무슨 얘기를 하나, 싶은 표정. 그 모습이 귀여워 좀 더 빙빙 돌려 말했다.

"지금 시작하면 확실히 늦긴 한데, 기본기 있고 감각 있는 애들은 또 금방 쫓아갈 수 있대."

하진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 되더니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나 진짜 열심히 할게. 진짜."

그 말을 뱉은 하진은 이내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제 눈을 비비며 훑었다. 하얀 얼굴이 금방 붉은빛이 되어 눈을 비비적대는데 마음 한 켠이 아려왔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을까, 미안한 마음에 차마 하진의 얼굴을 보지 못해 고개 돌리려는 차, 하진의 옆에 앉아 있던 남편의 한껏 구겨진 얼굴을 보고 웃음이 튀어나왔다.

"뭐야, 당신은 왜 그래."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건지 못생김을 최대한 표현하려는 건지 모를 잔뜩 찡그려진 남편의 얼굴은 내 눈물을 쏙 들어가게 했다. 감정에 취해있는 둘에게 말했다.

"대신, 너 적어도 홍대까지는 가야 돼."

하진과 남편은 동시에 나를 올려다봤다.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당연한 거 아냐? 미대 가려면 적어도 홍대는 가야 밥벌이를 하지. 그 이하는 대학 등록금 못 대준다. 재수도 없어, 현역이야 무조건. 엄마 돈 벌긴 하는데 재수 밀어줄 만큼은 아냐. 딱 현역까지. 오케이?"

눈물이 쏙 들어간 하진이 뭔가 대꾸할 말을 내뱉으려 할 때, 남편이 하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다 들리는데.

'그냥 일단 알겠다고 해. 그 뒤는 아빠가 알아서 할게.'

하진은 그 얘길 듣더니 이내 알겠다고 아주 작게 말하고는 고맙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때다 싶어 한 가지 조건을 더 붙였다.

"그리고, 교직이수도 꼭 하는 걸로."

이번엔 하진이 참지 않고 와락 내뱉었다.

"아, 엄마!"

"왜? 그것도 당연한 거 아냐? 너, 밥 벌어먹고 살 걱정은 해야 될 거 아냐. 엄마가 애 낳고 살아보니까 교사만 한 게 여자한테 좋은 직업이 없더라. 보험은 들어 놔야지. 예술은 아무래도 위험하니까."

남편은 이번엔 포기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반응에 굴할쏘냐. 정확히 하기 위해 쐐기를 박았다.

"왜, 뭐? 내가 갑자기 천사표로 짜란 변할 줄 알았어?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그것도 안 좋아. 저 세상 갈 때나 돼야 그렇게 변하지. 둘은 너무 이상주의야. 현실도 볼 줄 아는 사람이 우리 중에 하나 정도는 있어야지."



결국 입결은 홍대 이상, 교직이수를 조건으로 하진과의 타협은 마무리되었다. 고맙다면서도 툴툴대며 디저트를 가지러 가는 하진의 뒤통수가 짠하면서도 뭉클했다. 사실 홍대며 교직이수며 한 소리가 완전한 진심은 아니었다. 홍대를 가지 못해도, 교직이수를 하지 않아도 하진을 지원해 줄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마디 더 붙인 건 아직 버리지 못한 일종의 관습이었으리라. 하진이 자리를 뜨자 남편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인심 쓰는 김에 더 쓰지, 왜 조건을 또 달아. 당신도 참."

그걸 다 믿냐 나를 아직 뭘로 보는 거냐 반박하려다 나는 쳐다보지도 않고 접시에 코 박고서 말하는 남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고개 숙인 정수리는 이제 두피가 훤히 보이고, 관자놀이 쪽에는 언제 생겼는지 모를 검버섯들이 자리해 있었다. 그 옆에 듬성듬성 자라난 새치들까지 노화의 상징이라는 상징은 모두 지니고 있는 남편의 모습에 젊은 시절 그의 모습이 어땠는지 떠올려지지조차 않았다.

"혼자 돈 버느라 고생했어."

내 말에 남편은 그제야 접시에서 고개를 들어 내 눈을 제대로 쳐다보았다. 그 역시 물끄러미 내 얼굴을 쳐다보는 듯했다. 그의 눈에 비친 나도 많이 늙어있을까. 괜히 머쓱해져 말했다.

"나 많이 늙었지? 내일 새치염색이라도 하러 갈까 봐. 돈 아끼느라 한 달을 미뤘더니 반백이 됐어 정말. 나 이제 월급날에 매달 새치염색 해야겠다. 괜찮지? 저기 앞에 염색만 전용으로 하는 가게가 생겼는데, 미용실 값의 반값이더라고. 거기 가면 매달 가도 부담 없을 것 같아."

남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마워. 내가 괜히 발 묶은 것 같아. 하진이 저렇게 잘 큰 거 전부 당신 덕인거 알아. 당신 갈아서 아이들한테 시간 바치는거 알면서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도 미안하고... 당신이 계속 일 했으면 지금보다 훨씬 잘 나가고..."

평소와 달리 진지한 남편의 말이 민망하기도 하고 이제와 뒤 돌아보고 후회한들 무슨 소용인가 싶어 싹둑 자르며 말했다.

"고맙긴 뭘 고맙대. 됐어... 그 때야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는데 뭐. 어쩌겠어, 이런 세상에 태어난 걸 원망해야지 돈 열심히 번 당신 원망하진 않아. 나야말로 돈 많이 못 번다고 잔소리해서 미안했어. 돈 버는 게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네. 자기가 버는 돈이 갑자기 엄청 크게 느껴지는 거 있지? 고생했어, 정말."

마주 앉은 남편은 환하게 웃었다. 그 모습이 괜히 어색하고 민망해 말했다.

"그러니까 회사에 절대 먼저 그만둔다고 말하면 안 돼. 내가 버는 돈으로는 우리 생활 택도 없는 거 알지? 요즘은 그 정도 주는 거에도 감사하고 잘 다녀야 된다고. 괜히 눈치 줘도 모르는 척하고, 버틸 만큼 버텨보는 거야. 오히려 임원 안 된 게 다행인 거 같아. 임원이 더 잘리기가 쉽다더라고? 자기는 가느다랗고 길게, 오케이?"

버릇이라는 건 참 고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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