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동안을 쉬지 않고 꼬박 일해 받아낸 첫 연차였다. 예전엔 하루 온종일 어떻게 집에서 시간을 보냈나 싶게 오랜만에 손에 쥐어진 온전한 나의 시간에 처음엔 갈 곳 잃은 아이마냥 어쩔 줄을 몰라했다.
남편과 하진의 아침을 배웅하고 멍하니 소파에 앉았다. 밀린 청소와 빨래나 할까 싶다가도 그런 집안일들은 평소 일을 끝내고 온 오후에 제때제때 해놓아 크게 마음먹고 시작해야 할 게 없었다. 거실이며 부엌이며 윤이 나게 반짝거리는 집이라고 볼 순 없었지만 그래도 사람 손은 타는구나 싶은 나름 깔끔한 집이었다. 이어 현관과 화장실, 그 앞에 마주한 하진의 방, 그리고 안방까지 눈을 돌리다 마침내 제일 구석에 자리한 하준의 방에 t시선이이 머물렀다.
저기를 정리해야겠다.
아들 하준은 군대에 입대했다.
하준의 "그 사건"은 유야무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종결되었다. 증거확보가 어렵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고, 범죄의 실체가 명확하지 않다고 했으며, 결정적으로 피해자들이 진술을 꺼려했다. 가해자의 부모이면서 피해자의 부모자이기도 한 나는 그 사이에서 무엇이 옳은 행동일지 몰랐다. 부끄럽지만 나 역시 피해자인 하진의 엄마로서 딸이 "성범죄"의 피해자라는 낙인이 찍힐까 두려워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 모든 것이 결단코 개자식 하준을 위한 일이 아닌 내 딸 하진을 위한 일이었지만, 자랑스러운 행동이라고 할 순 없었다. 그리고 평생 하준을 용서할 수 있을지 역시 모를 일이었다.
결국은 여타 다른 가해자무리들처럼 하준 역시 군대를 도피처로 선택한 꼴이었다. 하준은 군제대 후 2년 뒤 학교에 복학한다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잘 나가는 명문대생이 되어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겐 더 이상 이전과는 같은 아들이 아니리라. 저 방을 정리해야겠다.
하준의 책과 옷가지들을 정리해 모두 창고에 넣는 것만으로도 하루 반나절이 훌쩍 지났다. 점심도 먹지 않고 꼬박 네 시간을 정리했지만 배고픈 줄은 몰랐다. 큰 짐들을 다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책상 서랍의 자잘한 물건들을 정리하기로 했다. 네 칸의 서랍을 위에서부터 하나씩 차례대로 정리하면서 특별하다고 할 물건은 없었다. 마지막 네 번째 서랍을 열기 전까지는.
콘돔 한 상자와 담배 한 갑을 발견한 것은 그리 놀랍지 않았다. 되려 코웃음이 났다.
"가지가지한다 진짜..."
혀를 차며 콘돔과 담배를 쓰레기통에 쑤셔 넣는데 그 아래에 아무런 무늬도 글씨도 없는 그저 까만색인 노트가 한 권 보였다. 그대로 재활용으로 분류하려다 개인정보라도 들었을까 펼친 그 노트가 문제였다.
"마귀할멈. 지가 공부해바라, 얼마나 힘든지도 모루고. 두고 봐라. 복수할꺼다."
"저번엔 미술학원 그만두라고 해노코 이번엔 태권도학원을 그만두라고 해따. 재미업는 영어학원이나 그만다니고 시픈데. 내가 하고시픈건 아무거도 못하게 한다."
미숙한 맞춤법에 어린 초등학생의 글씨체로 보이는 글은 그 어설픔과 대비되는 무서운 저주를 담고 있었다. 그 필체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준의 공부를 유아시절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봐주었으니, 글씨체만 보아도 언제 적 글인지 쉽사리 추측이 가능했다. 초등학생 2~3학년 무렵 하준의 글이리라. 3학년이 되어도 받아쓰기를 반타작으로 받아오던 하준과 한참을 씨름하던 때가 선명히 떠올랐다.
까만 노트는 모두 한 사람을 향한 저주를 담고 있는 듯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맞춤법과 서체는 날로 발전했으나 저주 역시 점점 독해졌다.
"씨x, x같은 인생. 평생 공부만 하다 죽음. 내가 죽든, 엄마가 죽든 누가 죽어야 끝나겠지. x같다."
저주의 대상은 분명했다. 나였다. 노트를 넘길수록 욕은 점점 심해지고 글씨는 분노에 찼다. 어떤 페이지에서는 까만색 연필로 새까맣게 칠만 해놓기도 했고, 악마의 형상을 괴기스럽게 그려놓기도 했다.
괘씸하고 화가 나는 마음이 피어오르면서도 노트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참에 아예 마음에 조금이라도 남아있던 정을 떼내어 아주 평생을 보지 않고 살아버리자 싶었다. 그런데 노트는 점점 저주의 성격에서 다른 성격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놀고 싶다. 아니 자고 싶다. 잠만이라도 자고 싶다. 아니, 죽고 싶다. 죽으면 자는 거니까."
"난 쓰레기다. 공부를 그렇게 하면서도 성적이 그따위인 나는 쓰레기다. 그러니까 죽어야지."
"다른 애들은 잘만 하는데. 난 못 하겠다. 너무 힘들다. 그런데 힘들다고 하면 안 된다. 조금만 버티자. 버틸 수 있을까."
"나한테 부은 돈이 얼만데, 나한테 투자한 게 얼만데. 엄마가 해준 게 얼만데. 수능까지만 버티자. 그 뒤에 안되면 죽어버리면 되지 뭐."
"죽고 싶다."
하루하루를 죽고 싶어 한 아이의 마음을 나는 한치도 모르고 있었다.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있다고 여겼던 그 시절의 나는 사실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하준이 괴물 같은 놈이 아니라, 괴물을 만들어 낸 건 나였다. 죄책감이 가슴을 뚫고 들어왔다. 그저 좋은 대학에 보내는 것만이 아이의 행복을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지난날의 내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게 정답이라고 철석같이 믿던 나.
하준의 노트 제일 마지막 장은 불과 얼마 되지 않은 최근의 일이었다.
"드디어 합격증을 받았다. 19년 동안 이걸 따려고 그 고생을 한 건가. 하지만 그 순간에도 엄마는 내가 아닌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에게 감사를 전했다. 그놈의 기도, 그놈의 하나님 아버지. 이젠 웃기지도 않는다. 여태 내가 한건 뭐였을까."
노트를 덮고서도 한참을 그것을 손에 쥔 채 그대로 앉아있었다.
영현의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온 건 그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