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현엄마와의 통화를 마친 뒤 정수기 앞으로 가 차가운 냉수 한잔을 크게 들이켰다. 어디로 튈지 모를 그와의 통화가 알게 모르게 어느 정도 긴장된 모양이었다.
"아동학대 범죄에서 학대 행위자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부모래. 자기랑 나, 우리. 그러니까, 티브이 뉴스에 매번 나오는 어린이집 선생님도 아니고, 유치원이나 학교 선생님 아니고, 길 가다 마주치는 미친 사람도 아닌 부모. 엄마아빠. 그것도 85퍼센트가, 100건의 아동학대 사건 중에서 85건이 말야. 세상에, 어쩜 그럴 수 있지? 그 귀한 아이를 어떻게 학대를 할 수 있는 거야? 싶었지. 근데 말이야,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영현이를 학대한 게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내가 사랑이라 생각했던 게 영현이에게는 어쩌면 학대가 아니었을까? 정서적 학대도 학대잖아... 선택권이 없는 아이에게 내 선택을 강요했던 거, 그 어린애가 뭘 알고 따라왔을까, 난 엄마를 사랑하는 아이의 순수한 마음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용한 게 아니었을까... 요즘은 그런 생각이... 자꾸 들어."
통화의 말미에 혼잣말처럼 내뱉던 영현엄마의 말이 머릿속에 오래간 남았다. 후회가 가득 묻은 것 같은 그녀의 목소리에 내 모습이 비쳤다.
빈 컵을 싱크대에 넣어두고 다시 하준의 방을 찾아 바닥에 덩그러니 놓여있던 까만색 노트를 들고 거실로 나왔다. 크게 한숨을 쉰 뒤, 첫 장부터 다시 하나하나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마지막 장의 죽고 싶다는 글과 더 이상 나에게 일말의 기대도 없다는 듯한 회의적인 글을 마지막으로 끝까지 읽어내고 노트를 덮었다. 더 이상 하준에 대한 원망의 마음은 남아있지 않았다.
내가 하준에게 쏟아부었던 애정과 시간들에 배반당했다고 느끼던 날들이었다. 잃어버린 신의에 대한 상실감으로 이제라도 나 자신을 찾아야겠다 싶어 새로운 일상을 가져가던 날들. 비로소 그에 대해 만족하던 나날.
하준이 소위 잘 나갈 때는 모두 내 공덕이고, 그렇지 못할 때는 은혜를 모르는 원수 취급을 했다. 내가 시키던 모든 걸 척척 해내던 하준은 나였고, 나는 하준이었지만 입에 담지도 못할 범죄를 저질렀을 땐 너는 쓰레기고 나는 무고하게 배신당한 비련의 여인이었다.
하지만 나 역시 말도 안 되는 회귀물을 꿈꾸는 한낱 제 자식을 학대한 부모가 아니었을까.
핸드폰을 들어 연락처에서 하준의 이름을 검색하고서야 지금 하준은 군복무 중이라 전화를 받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당장에라도 전화를 걸어 사과하며 그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그 아이의 생각을 듣고 싶었다. 지금은 그럴 기회마저 놓쳐버릴 것만 같아 허망하게 텅 빈 핸드폰 화면만 바라보았다.
저녁이 되어도 기세가 꺾일 줄 모르는 햇살에 아이들은 배가 고픈 것도 잊고서 놀이터를 마구잡이로 뛰어다니고 있다. 되는대로 내달리다 멈추며 까르르 웃기를 반복하는 아이들을 본다. 손님이 꽤 많았던 날에 연장근무까지 더해져 유독 몸이 욱신거리는 퇴근길이지만 말간 아이들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내 얼굴에는 미소가 머금어진다.
"한창 놀기 좋은 나이네."
혼잣말하는 입가의 미소가 씁쓸해진다.
"피해자분들이 원치 않으신다고 해서요. 아무래도 더 이상 저희도 해 드릴 수 있는 건 없을 것 같습니다."
하준을 다시 품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준의 사건으로 피해를 입었을 피해자에게 무릎이라도 꿇고 사과를 해야겠다는 마음에 담당 수사관을 통해 피해자측에 사과의 의사가 전달될 수 있을지 조심스레 물어본 차였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역시나였다. 나였어도 제 마음 편하고자 전하는 '가해자'측의 사과의 말을 굳이 듣고 싶진 않을 것이다. 아픈 기억을 애써 지운 채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이다. 하지만 이 모자란 머리에 사과 이상의 속죄의 방법은 떠오르지 못해 계속해 연락을 드리겠다는 말을 수사관에게 전했다. 수사관은 탐탁지 않은 대답으로 전화를 끊었다.
"손은 좀 어때? 그러게 그림 그리는 애가 피구는 무슨 피구야. 왼손이었기에 망정이지, 오른손 다쳤어 봐. 그림도 제대로 못 그렸을 거 아냐."
늦은 저녁을 허겁지겁 먹고 있는 맞은편 하진의 손을 바라보며 묻는다. 하얗고 뽀얀 하진의 오동통한 왼손 검지 손가락은 작은 부목이 덧대어져 하얀 천에 둘둘 감겨있다. 하진의 나의 핀잔 섞인 말에도 실실 웃으며 대답한다.
"아 괜찮아, 엄마. 하나도 안 아파. 그리고 왠지 이런 거 손에 있으니까 간지 나지 않아? 히히. 엄마가 아끼는 이 오른손은 멀쩡하지롱."
혀를 날름거리며 내보인 하진의 오른손에는 짙은색 물감의 흔적들이 가득하다. 당치도 않는 말을 하는 하진이 귀여워 웃다가 뼈가 빨리 붙어야 될 텐데,라는 혼잣말을 하는데 하진이 밥그릇을 비우며 말한다.
"그 뭐냐, 사골국 같은 거. 그런 거 먹으면 빨리 낫는다던데?
"야, 넌 뭐 어린애가 할머니처럼 그런 걸 믿냐. 요즘은 사골국 같은 거 안 먹어."
"아이 엄마도 진짜. 눈치가 어디 가셨을까? 내가 먹고 싶어서 그렇지~. 엄마가 매번 카페에서 공구는 그 곰탕에 도가니 넣은 거 진짜 맛있는데. 내 뼈 빨리 붙게 도가니탕으로 부탁해요~."
물을 들이켜며 자리를 일어서는 하진에게 과일까지 다 먹고 가라 이르니 하진은 자신의 목에 둘러메인 앞치마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바로 수업 가야 돼. 아빠는 오늘 또 야근이래? 있다 수업 마치고 바로 연락할게."
여름방학을 맞이한 하진은 오후 내내 미술학원 특강에 매진 중이다.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리다 저녁시간이 되면 집으로 와 저녁을 먹고는 하는데 친구들과 학원 근처의 식당에서 저녁을 먹지 않고 굳이 다시 집으로 온다. 물론 그 이유를 나는 안다. 하준의 일로 이런저런 생각에 고민 중인 나의 마음을 우려하는 것이리라.
"아이 엄마, 그건 오버다. 그럼 이렇게 잘 큰 나는 뭐야? 그것도 엄마 덕인데. 아동학대까지는 오버고, 살짝 욕심이 과했다~ 정도? 아잇 표정 풀어 엄마. 김하준 그거는 어떤 사고를 쳤는지는 모르지만 걔는 지가 알아서 삐뚤어진 거고."
어렴풋 고민을 조심스레 털어놓은 나에게 하진은 장난 섞인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그의 따뜻한 마음만 받기로 했다.
"그 곰탕을 어디서 산거였지..."
핸드폰을 뒤지지만 원하는 연락처와 문자를 찾지 못해 컴퓨터를 켠다. 오랜만에 동네 카페의 아이콘을 클릭해 들어가니 조금씩 변하는 나와는 달리 그곳의 글들은 나의 예전과 그대로다.
'7살 00학원 레테 하려는데 과외선생님 소개 해 주세요."
'집 주변 S vs T vs P 영유 어디가 제일 괜찮은가요?"
'수학 선행 어디까지 하시나요? ㅜㅜ 빡센 학원 추천 부탁드려요.'
'20xx년 우리 동네 중학교 입결'
속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끼며 애써 많은 글들을 모른 체 한다. 검색어에 "곰탕"을 입력한 후 원하는 정보를 얻어 도망치듯 카페 페이지를 벗어나려는데 문득 과거의 내가 쓴 댓글이 눈에 들어온다.
"연대공대맘 : 공구 시즌 아니어도 올려주신 명함으로 문자 드려서 주문해도 되죠?"
카페의 메인페이지로 다시 이동해 내 프로필을 확인한다. 이것저것 눌러보며 원하는 것을 찾다 한참 후에야 톱니바퀴모양을 발견하고서 클릭하여 원하는 화면을 찾는다.
"별명 : 연대공대맘"
아주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재빨리 글자를 지우고 빈 공간의 반짝이는 커서 앞에서 잠깐 고민하다 천천히 한글자 한글자 음미하듯 타이핑한다.
"별명 : 레몬향기"
오늘 하루종일 맡은 레몬세제 냄새를 떠올리며 입가에 미소 머금고 만족하듯 자리에서 일어선다.
<연대공대맘>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싶은 말은 많았지만 서툰 글에 잘 전달이 되었을지 걱정이네요.
글을 읽어주시고, 좋아요를 누루며 관심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끝까지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더 좋은 글로 다시 뵙길 희망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