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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근아 May 25. 2024

바라보는 the ME _ 생일날이었다.

프롤로그

생일날이었다. 


이번 생일날을 위해 난 여러 가지 이벤트를 혼자서 준비해 놓고 기대에 가득 차 있었다. 그동안 누려보지 못한 호주에서의 생일날을 즐기고 싶었다. 예를 들면 오페라하우스 앞 계단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미술관 전시를 보고, 대형서점에 들러 책을 사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등등등. 일상 같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들만 모아 하루종일 누구의 방해도 없이 나 홀로 즐기는 그런 날을 꿈꿨었다.   


하지만, 생일 3일 전부터 열이 나기 시작하면서 몸살감기로 이어졌다. 생일날까지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몸살감기에 걸려 아무 데도 갈 수 없음이 생일날 아침, 극도의 짜증으로 몰려왔다. 


“난 계획을 잡으면 안 돼. 네가 그럼 그렇지."

기대는 실망으로 심지어 자책으로 까지 이어졌다. 


이미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한건, 엄마였다. 아침 7시부터 전화하셔서 축하한다는 말로 시작했지만, 1시간을  넘게 잔소리만 하다 끊으셨다. 두 번째는 신랑이었다. 한국에 잠시 머무르고 있는 신랑은 내 생일도 까먹었는지, 느지막이 전화를 해서는 생일이야기는 쏙 빼놓고 딴 이야기를 한참을 하다 끊으려 한다. “그것 때문에 전화했어?” 그제야 아차 했는지, "알지~." 이런저런 핑계가 이어졌다. 내 짜증은 화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나마, 아이들이 나와 함께 하니 다행이었다. 9살 아들은 엄마랑 점심외식을 하고, 선물을 사러 가겠다고 누나와 약속을 했다. 어떠한 점심을 먹게 될까 기대했는데, 아들이 미리 정해놓은 메뉴는 서브웨이. 너무나도 황당스러웠지만 귀여우니 봐주기로 했다. 


고3인 딸은 점심을 후다닥 먹고, 도서관으로 사라졌다. 아쉬움에 딸을 잡고 놀고 싶어도, 내 몸이 집으로 가고 싶어 했으니, 내 생일은 그렇게 마무리 짓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와 집에 덩그러니 아들과 있다 보니, 또다시 올라오는 짜증. 아들방에서 한참을 비집고 ‘같이’라는 시간을 보내다가, 안 되겠다 싶었다. 


나에게는 생일을 누릴 자유가 있으니, 나만의 방법으로 생일을 자축하기로 했다. 


일단 짜증을 멈추고 ‘나’라는 사람에 대해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어떤 위대한 시인은 ‘한 사람의 탄생은 위대한 세계의 창조’라고 했는데 현실의 내가 오늘은 그 위대한 탄생을 축하해 주기로 했다. 48번째 생일날이었으니, 48이라는 숫자에 대한 자축이 더욱더 필요했다. 왜냐면, 내게 48이라는 숫자는 할머니가 되는 시작의 숫자였으니까. 나에게는 특별한 생일날이었다.





나는 나를 위해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나에게 '그림 그리는 시간'을 선물하고 싶었고, 완성된 그림으로 48번째 생일날의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 


미술용품 바구니를 뒤졌다. 예전에 사다 놓은 작은 캔버스가 눈에 들어왔다. 


작디작은 10cm 정사각형의 캔버스. 


하얀 캔버스는 나에겐 무한의 생각들을 무한으로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리고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내 눈으로 볼 수 없는 내 안의 것을 끄집어내어 내 눈으로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흔여덟 살의 나는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그려보고 싶었다. 


하지만 즉흥적인 결정이었기에, 


무엇을 그릴지.

어떤 재료를 사용할지.

어디서 그릴지,

언제 그릴지, 

무엇을 위한 그림일지.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일단 요즘 사용하지 않는 원형테이블을 창가로 가져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뷰가 보이는 곳에 앉았다. 책상 위에 캔버스 하나 던져 놓고, 미술용품 박스를 주섬주섬 찾으니, 처음 눈에 들어온 건 딸이 학교 숙제할 때 사용하던 아크릴물감이 가득했다. 아크릴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무엇을 그리지? 창가에 앉아 있으니, 호주의 자연이 내 눈에 들어온다. 나를 가장 편안하게 해 주고,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자연, 그리고 나의 오늘을 그려보자. 오늘이 48번째 생일이니, 48번의 물감층을 겹쳐서 그림을 그려보기로 했다. 


초록색에 물을 많이 섞어 잔디와 나무의 바탕색을 옅게 칠했다. 물감이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 20분 남짓되는 시간, 나의 1살 때를 생각해 봤다. 기억도 안나는 그때. 그저 사진 속의 나를 기억하고, 엄마에게서 들은 나의 탄생이야기를 기억해 봤다. 


다시, 옅은 초록색을 한번 더 색칠하고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 이번엔 나의 어렸을 적을 생각해 봤다. 오빠와 똑같은 스키복을 입고 하루종일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하고, 집에서는 엄마가 들어오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그때가 생각났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기억이다. 


그러다가 그렇게 이런저런 색으로 내 맘 가는 대로 칠하다 보니, 

이 그림이 참 내 인생 같네. 

계획도 없이 시작된 내 인생. 신나게 놀기만 하다가,

언젠가부터는 계획을 가지고 시작하지만, 

한 번의 노력으로는, 내가 무엇을 했는지, 알 길이 없고, 

여러 번 노력하지만, 성과는 여전히 눈에 뚜렷하게 보이지 않고,

열심히 무슨 일을 하고는 있는데, 뭐를 위해 하는지는 모르겠고,


진행하던 일은 모두 뒤엎고, 다시 다른 시도를 해보기도 하고, 

꼬리에 물고 생각나는 많은 것들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또 다른 시도를 해보고, 

점점 색이 섞이며 알 수 없는 색이 보이기 시작하듯, 내 인생은 계속 칙칙해지는 듯했다.


그러다 오늘이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내 인생의 최고점. 48세의 나이.


딸이 생일선물로 사 온 꽃다발을 보며 위안으로 삼기로 했다. 


그래! 이번엔 완전히 리셋이다!! 






하지만, 아무리 백지화를 시키고 싶어도 나의 과거는 그대로 존재하고, 희미하게 나의 오늘에 영향을 준다. 

그래도 이렇게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마음을 다잡았다.




어둠이 오기 전, 항상 나를 달래주는 노을이 찾아왔다. 

생일날을 진짜 마무리할 시간이 왔다. 

리셋만 했을 뿐인데, 완성된 그림은 없다. 

그게 나의 48년의 인생이었나 보다. 그런 깨달음만 있었다.





다음날 아침, 딸아이가 사다준 노랑꽃에서 새 아침을 보았다.

나의 그림에도 새로운 그림을 넣어주기로 했다. 





내가 좋아하는 노란색 꽃으로 나의 새로운 48년을 기대해 본다. 


이제 새 캠버스를 사러 가야겠다. 

좀 더 큰 사이즈의 캔버스.

정말 새로운, 완전 차원이 다른 48년을 준비해보자 싶었다. 

이제 진짜 시작인 것이다. 


'새로운 그림도 한 번에 완성은 되지 않겠지.' 하지만, 한 번의 연습그림이 있었으니, 이번엔 좀 더 계획이 있을 터이고, 지난 그림을 그리며 많은 생각도 했으니, 이번엔 좀 더 깊은 사유를 통한 생각들이 그림으로 나오지 않을까 싶다. 


생일날, 밀려오는 짜증으로 망쳐버릴 수도 있었던 날이었다. 하지만 나의 탄생에 좀 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나는 나만의 축하이벤트를 마련했고, 나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되면서 오히려 집에 하루종일 있어야 했던 그 모든 상황들이 감사했다.


48년을 기점으로 나의 인생은 내리막일 줄 알았는데, 더 기대가 되는 미래의 48년이 되었으니, 나는 48년을 선물로 받은 기분이었다. 


어떤 선물보다 값진 '시간'을 선물로 받았다.





새로 연재를 시작하는 브런치 북 [ 바라보는 theMe ]에서는 저의 일상을 담은 그림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매주 토요일 발행입니다. 


나를 바라보는 the Me. 

내가 바라보는 the Me.


THE ME + KUNAH

더미그나는 나 자신(the Me)을 삶의 주제 (theme)로 삼고, ‘나'를 제대로 지켜내고자 탄생한 브랜드입니다. from. 근아 / 그나(the ME)


THE ME KUNAH 디자인 의뢰

 : hello@themekuna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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