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시간이 다가왔다
새벽, 근아작가로서 글을 쓰고 책을 읽었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작가로서 나 자신을 마주하고, 삶의 의미를 다시금 정리하며, 새로운 관점을 찾는 과정에 몰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독서의 시간은 나만의 고요한 시간이었고, 사유의 깊이를 더해가며 오랜 시간 고민하던 한 가지 주제에 대한 여러 생각들을 모아가며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 이 고요한 순간은 일상의 소음과는 완전히 분리된 세계였다.
오전, 나는 북디자이너로서의 나로 돌아가야 했다. 줌 미팅이 예정되어 있었고, 이 회의는 디자인의 최종 마무리 단계에 관한 것이었다. 이번 작업은 단순한 미적 감각의 표현을 넘어, 내 예술성과 혼을 담는 동시에 현실적인 논리와 요구 사항을 충족해야 했다. 글작가로서의 몰입과는 달리, 디자인에서는 내가 만들어낸 무형의 아이디어를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형식으로 변환하는 것이 필요했다. 현실을 직접적으로 마주하는 사고가 필요했다. 이는 조금 다른 차원의 사고를 요구했다— 작가는 사유의 깊이를 추구하는 반면, 디자이너로서의 나는 그 깊이를 현실에서 표현하는 데 집중해야 했다.
오후, 엄마로서의 역할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의 친구가 집에 방문하였고, 엄마로서 아이들의 안전과 즐거움을 책임져야 했다. 긴장의 순간이었다. 아이들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격한 장난 속에서 잠시 나의 작가적 자아는 멀리 밀려났고, 일상적인 삶의 흐름에 그저 나의 몸을 맡겨야 했다. 엄마로서의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현실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저녁, 학생으로서 영어 연습에 몰두했다. 한국어로는 몇 시간째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채, 영어 일기를 쓰고 새로 배운 영어 표현을 입에 익숙하게 만들고, 2분 스피치의 녹음숙제에 집중했다. 한때 이 모든 과정이 나 스스로 힘겨워 영어튜터를 다시 힘들게 했지만, 이제는 영어를 말하는 이는 또 다른 나임을 인정하기로 했다. 새로운 언어로 나 자신을 표현하고, 나의 생각을 전하는 과정은 마치 나의 또 다른 자아를 구축해 가는 과정과도 같았다.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냥 이 시간만큼은 다른 이로 살자 마음먹기로 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난 뒤,
오늘 새벽,
나는 근아작가로 돌아가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일상 속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여러 가지 자극들 속에서, 다시 나 자신을 발견하고, 작가로서의 나로 돌아가기가 이렇게 힘겨운 것이구나 새삼 느끼고 있다.
어제 새벽에 오랜 시간 고민하며 찾아낸 나만의 논리는 아직도 브런치에 단 한 문단만 겨우 정리되어 옮겨져 있을 뿐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던 사유의 흐름이 일상 속에서 산산이 흩어져버린 듯했다. 내가 그려내려던 논리의 실마리는 어디론가 뿌옇게 숨어버린 듯했다. 그리고 내가 마주한 오늘 새벽의 모습은 지금의 내 마음을 그대로 반영하듯, 거실의 큰 창문을 통해 보이는 풍경은 짙은 안개에 덮여 있었다.
시간이 필요하다. 안개가 걷히고 다시 나의 생각들이 뚜렷해질 때까지. 어제오늘은 이런 날인가 보다. 다시 나를 침묵의 시간으로 돌려보내는 시간인가 보다.
"숲을 다스리는 것은 늘 묵직한 침묵이다. 숲의 의미는 즉각적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보라! 숲은 절대로 서두르지 않는다. 조용한 저녁 시간에 자연의 음유시인인 저 저녁참새는 무한한 여유와 시간의 영속성을 노래한다. – 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