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한국에서 책을 주문해 해외배송으로 받았다. 한동안 책을 예전처럼 많이 읽지 못했고, 집에 있는 책들은 한정적이어서 때로는 반복된 내용에 지쳐있었다. Ebook을 읽어도 그 내용이 머릿속에 오래 남지 않는 기분이었고, 그로 인해 독서의 재미가 점점 사라지는 듯했다. 그래서 한두 달을 버티다가 결국 대량으로 책을 주문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총 18권. 장르는 다양했고, 그 중에는 내 삶의 여러 갈래를 보여줄 이야기가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책이 도착하자마자 설레는 마음으로 포장을 풀었다. 하나하나 책을 펼쳐서 빠르게 훑어본 뒤, 며칠에 걸쳐 각 책의 첫 번째 챕터를 읽으며 어떤 책부터 읽을지 고심했다. 마치 여행을 떠나기 전, 지도와 사진을 보며 가장 설레는 목적지를 고르는 순간처럼, 나는 각 책이 나에게 보여줄 새로운 풍경들을 상상했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기대감에 마음은 들떠 있었다. 그렇게 5~6권의 책을 번갈아 읽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한 감정이 밀려왔다. 설명하기는 어려웠지만, 그 감정은 어딘가 모르게 불편하고 답답했다.
그 불편한 감정을 곰곰이 되짚으며, 잠시 멈춰서 나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동안 내가 지나쳐 온 삶의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나는 비교적 고요한 세계 속에서 내 생각을 중심으로 살아왔다. 내 경험에 의지하며, 자신만의 속도로 길을 걸어온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외부의 이야기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니, 그것들이 날카로운 자극처럼 느껴졌다. 책 속에 담긴 심오한 이야기들은 때로는 낯설게 다가왔고, 심지어 나를 향한 일방적인 조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마치 내가 의지와 상관없이 주입식 교육을 받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소설을 읽을 때만큼은 그런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왜일까.
그 차이를 곰곰이 생각하며 나에게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깨달았다. 일부 책 속의 이야기들은 나의 경험보다 더 옳고, 더 명확하게 보였다. 그래서 내 생각은 상대적으로 작고 부족한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스스로의 주장을 펼칠 힘이 부족하다는 느낌에 위축되었고, 내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들이 점점 더 작아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소설을 읽을 때만큼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내가 읽은 소설은 나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소설 속의 이야기들은 나를 고요하게 초대했고, 그 속에서 나만의 해석을 찾도록 도와주었다. 그 안에서 나는 인물들의 감정을 깊이 느끼고, 그들의 선택을 곱씹으며, 내 삶과 연결 지어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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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도 소설 같았다. 각 장면이 마치 내가 주인공인 이야기처럼 펼쳐져 갔다. 그동안 내 삶 속에서 스스로 경험을 통해 얻은 깨달음들이 나의 길을 비추어 주었다. 내가 겪은 다양한 경험들은 나에게 수많은 길을 보여주었지만, 그 길을 어떻게 걸어갈지는 언제나 나에게 맡겨졌다. 나는 그동안 내가 직접 선택하고 살아온 ‘자기주도 학습’의 과정 속에서 나만의 이야기를 써온 것이다.
이 길 위에서 나는 점차 나만의 방식으로 깨닫고, 나만의 관점으로 그 의미를 찾았다. 다른 이들이 제시한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나는 내가 경험한 것들 속에서 나만의 답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깨달은 것은, 나다운 방식을 찾는 것이야말로 가장 진솔하고 가치 있는 일이란 사실이었다. 나만의 속도, 나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그 속에서 내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 나다운 삶이 되어 버렸다.
그러면서, 나는 또 하나의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내 삶의 의미는 누군가의 기준이나 외부의 기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각자의 여정을 따라가는 것처럼, 나 또한 내 삶의 여정을 따라가며 그 길을 만들어가고 있다. 내가 그 길을 어떻게 걸어가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 길의 끝이 아니라, 그 길 위에서 내가 어떻게 나 자신을 이해하고, 성장할지를 고민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책은 고정된 해석을 강요하지 않는다. 작가의 의도도 중요하지만, 독자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 만들어내는 의미또한 그만큼 중요하다. 문학의 매력은 여기에서 나올 것이다. 글을 읽고, 그 속에서 나만의 해석을 찾는 과정이 의미를 더한다. 내 삶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내가 주도하는 삶 속에서 고유한 빛깔을 발견하고, 그것을 소중히 간직할 수 있다. 내가 느끼고 깨달은 것이 내 삶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나만의 방식으로 읽고, 나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나다운 길이다.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