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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 있는 호주, 우리 집

by 근아

8일간의 멜버른 여행. 21일간의 한국 방문.


거의 한 달 만에 돌아온 호주의 집. 친숙한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어딘가 낯설면서도 친근한 공기가 나를 감쌌다. 떠나기 전과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한 달이라는 시간이 만들어낸 미묘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언제나 그렇듯, "역시 집이 최고야."라는 평소의 안도감을 느낄 줄 알았다. 낯선 곳에서 머물다 보면 불편한 점이 생기고, 결국 내 공간이 가장 편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법이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문득, 당연할 것만 같았던 그 감정이 선뜻 찾아오지 않았다.


여행의 여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한 달 동안 전혀 다른 환경에서 지내며 무언가 달라진 걸까. 집에 도착한 순간 느껴야 할 편안함과 안도감 대신, 알 수 없는 감정이 조용히 밀려왔다. 내 집에서조차 낯설음을 느끼는 이 기분은 무엇일까.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그 감정의 실체를 곱씹어 보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보낸 시간은 친숙하면서도 새로웠다. 강남역이라는 번화가, 최고의 교통편과 24시간 열려 있는 식당들. 원하는 것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편리함 속에서 나는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처음에는 그 편리함이 마냥 반갑고 신기했다. 늦은 밤에도 거리는 환했고, 사람들은 여전히 활기찼다. 시간의 흐름이 둔감해지는 듯한 도시의 리듬 속에서, 나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낯익은 한국의 속도를 따라가려 애썼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문득, 이 모든 것이 피로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눈부신 네온사인과 끊임없이 오가는 인파, 주기적으로 바뀌는 광고 화면과 지하철 안내방송으로 쏟아지는 소리들. 모든 것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지만, 그 속에서 나는 점점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편리함 속에서도 어딘가 불편했다. 오래 알던 환경이었지만, 나 자신은 그 속에서 어색한 존재가 된 듯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에서 나의 집이 없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혔다. 오랜만에 찾은 곳이지만, 머물 공간은 호텔뿐이었다. 가족과 친구들이 반겨주었고, 따뜻한 시간도 보냈지만, 하루의 끝에서 돌아갈 '나만의 공간'이 없다는 현실이 점점 크게 다가왔다. 호텔로 들어설 때마다, 그곳이 일시적인 장소라는 사실이 선명해졌다. 아무리 익숙한 도시라 해도, 그곳에 내 자리가 없다는 느낌이 나를 허전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호주의 집으로 돌아왔다. 비행기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길, 창밖으로 내가 기다렸던 풍경이 펼쳐졌다. 고층 빌딩 대신 낮고 단정한 집들이 이어졌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한층 더 넓어 보였다. 도심의 빠른 걸음과 대비되는 여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문득 숨이 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도로 위의 차들은 조용히 흐르고 있었고, 길가의 나무들은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거리엔 번쩍이는 간판도, 사람들의 빠른 발걸음도 보이지 않았다.


문을 열고 집 안에 들어선 순간, 한 달 동안 집이 품고 있던 오래된 나무집 냄새와 뒷마당의 햇살이 나를 맞아주었다. 짐을 내려놓고 창문을 열자 바깥에서 불어오는 공기가 집 안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도시의 공기와는 확연히 다른, 부드럽고 차분한 공기였다. 순간, 지난 한 달 동안 잊고 있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조금 더 느리게 흐르고, 공간이 주는 여백이 마음을 넓혀 주는 듯했다.


소파에 몸을 기대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적막 속에서 새소리가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강남의 호텔 방에서는 언제나 바깥 소음이 배경처럼 깔려 있었는데... 그 차이가 어색하면서도, 동시에 익숙했다. 나는 이 조용함을 다시 몸으로 받아들이며, 내가 진짜 '돌아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일상으로 돌아와 생활하는 요 며칠, 이전과는 다른 마음이 생겨났다. 집에서의 모든 활동 하나하나에 더 많은 의미가 부여되면서, 나의 집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고 있다. 호주로 온 지 6년. 언제나 나의 집은 한국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호주에 나의 집이 있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이민자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던 시간들 속에서, 드디어 그 무게를 내려놓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이번 여행은 내게 편리함과 여유, 빠름과 느림 사이의 균형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했다. 나는 무엇을 원하고, 어떤 공간에서 가장 나답게 존재할 수 있을까. 한국의 도시 한가운데서, 그리고 호주의 집에서—서로 다른 두 세계를 경험하며 나는 조금 더 나를 알게 된 것 같다. 결국, 집이라는 공간이,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들어주는 곳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그곳이 바로 지금, 내가 있는 이곳임을 확신하게 된다.






"누구나 자신에게 맞는 길을 따라 걷는다면 놀라울 정도로 넓은 자연의 공간을 걸을 수 있다. - 소로의 일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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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헨리 데이비드 소로, 소로의 일기 전성기 편, 갈라파고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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