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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듯했지만, 여전히 나

by 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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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한국을 떠나는 날,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할 때,

딸아이가 만든 조그마한 눈사람이었다.


눈송이가 조용히 쌓이며 세상을 하얗게 덮어가던 그 순간, 아이의 손끝에서 탄생한 작은 존재. 작은 두 손으로 눈을 뭉쳐 조심스레 쌓아 올렸을 그 모습을 상상하니, 따뜻한 미소가 절로 떠올랐다.


딸아이가 건네준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이 눈사람이 마치 딸아이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반짝이는 눈망울과 환한 미소처럼, 그 눈사람은 긍정의 기운을 온전히 품고 있었다.


하지만, 호주로 돌아온 후, 딸아이를 대학교 기숙사에 보내놓고, 묘한 감정이 서서히 밀려왔다. 낯선 기분이었다. 단순한 그리움이나 이별의 허전함과는 다른, 그 무엇도 분명히 규정할 수 없는 감정. 그리고 며칠이 지나면서, 나는 문득 그 눈사람이 불쌍해 보이기 시작했다. 그저 귀엽고 사랑스러웠던 존재가 어느새 애잔하게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 눈이 녹으면 사라질 아이.


존재하지만 곧 사라질 운명을 타고난 존재. 그 모습이 왠지 여러 관계 속에서 점점 희미해지는 나 자신과 겹쳐 보였다. 무언가를 위해 애쓰고, 열정을 다했지만, 결국 누군가에게는 흐려지고 지워져 가는 듯한 기분. 마치 나 자신이 내가 아닌 듯한 착각. 나는 그 눈사람의 사진을 와츠앱 프로필로 올려놓았다. 그 작은 존재가 나의 감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말로 하지 못한 이별을, 설명하기 어려운 공허함을 그 사진 속에 담아두고 싶었다.


지난해 나는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에 온 마음을 쏟았다. 끝없이 고민했고, 질문했고, 나를 깊이 들여다보며 불씨를 키워왔다. 그러나 정신없이 흘러간 지난 두 달 동안, 나는 그 모든 에너지를 다른 곳에, 그리고 어쩌면 하나의 거대한 의미를 창조하는 데 쏟아부었다. <엄마의 유산>이라는 시간 속에 모든 불꽃을 바쳐 버린 것이다.


그러다 보니 문득, 내 안에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았다. 불꽃을 피워 올렸던 손바닥에는 그을린 흔적만이 남아 있고, 내가 바라보던 길은 사라져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나를 다 소진한 걸까? 이 모든 과정 속에서 내가 사라진 건 아닐까?


그러나 며칠 동안 내 마음의 방향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나는 깨달았다. 불씨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단지 지금은 그 불꽃이 숨을 고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눈사람이 햇살 아래 녹아 물이 되어도, 그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존재하는 것처럼. 모든 존재는 흐르고, 변화하고, 결국에는 또 다른 의미로 남는다. 내가 심어 놓은 불씨 또한 그렇게 어딘가에서 새로운 불꽃으로 피어나고 있을 것이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올것이다. 지금 나는, 한국의 겨울과 봄사이에 존재하는 호주의 여름에 살고 있다.


이제 나는 다시 나의 자리로 돌아온다. 지난 시간들이 흔적 없이 흩어진 것이 아니라, 깊은 곳에 뿌리내렸음을 믿으며. 그리고 다시금 나를 들여다보며, 또 다른 불씨를 지펴갈 준비를 한다.


내 마음이 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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