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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을 내리다

그를 사랑한 첫 날

by 윤하

봄 그리고 가을의 시작점이었다.

봄, 우연히 마주친 그는 정말로 내 이상형......의 완전히 반대였다. 이미 한철 지난겨울이 떠오르는 흰 피부와, 크지 않던 키, 풍기는 복숭아 같은 분위기마저 그랬다. 그저 찰나의 생각뿐이었다. 이어지지 않던 생각이었다.

그렇게 수개월이 지난가을의 어느 날, 시험기간 학원에서 본문을 바득바득 외우던 그날, 그가 떠올랐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유도 계기도 그 어떤 것도 없었다. 그날은 그냥이었다.

마음을 부정할 여지조차 없었다. 그의 안부를 생각함과 동시에 내 마음이 보였다. 숨길 수도 없었다. 나를 마주친 모든 사람들이 내게 기분이 좋아 보인다고 말했고,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일상적이고 일방적인 안부의 말들을 가을의 단풍에 돌돌 싸 그의 머리로 톡 던졌고, 수업시간의 장난처럼 누군가 내 머리에 휴지를 던지면 즉시 돌아볼 법도한데, 그는 간결하고, 가볍고, 느리게 반응해왔다.

자세하게 말하기 부끄럽다. 결론이 나진 않았지만 현재 성사의 여부에 대한 질문에는 부정의 답일듯싶다.

“나는 실패 중인가?” “역시 망하게 되는 건가?”

끊임없는 실패의 단어는 성공을 꿈꾸지 않던 나에게도 잔인한 시간들을 주었고, 과정과 내면에서 뜻을 찾기보다는, 오지않을 결과만을 좇기 바빴던 그 가을의 나는 암울했다.

2달은 그렇게 보냈다. 표현하고, 슬퍼하고, 행복해하면서. 실없이 웃다가도 운 지난날을 생각하며 또 울었다. 그렇게 울다가도 핸드폰 화면의 한두 줄에 또 웃었다. 정말 바보같이 보냈다. 당연히 시험은 제대로 봤을 리가 없었고. 내가 망해서 우는 건지 다른 게 망해서 우는 건지 구분조차 안 갔다.

결심하기도 했었다. 새해부터는 그에게 연락하지 않기로, 그래서 모두에게 돌린 새해 덕담을 유치하게 그에게만 보내지 않았다. 내가 하지 않으면, 그에게 먼저 연락이 올 일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 줄 알았다.

그날 나는 새해의 기쁨의 불씨를 끄고 잠에 들었다. 꽤나 늦은 기상일 줄 알았으나, 이상하게도 일찍 눈이 떠졌다. 습관적으로 일어나자마자 집어든 핸드폰 화면에는 그의 민트빛 기본 프로필사진, 그리고 나를 흔들기에 충분한 단 여덟 글자가 있었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아, 맞춤법이라도 틀려주지. 정 떨어지게 “세헤 복 만이 받아라" 라고 하지. 그러면 지금 조금은 덜 흔들릴텐데, 지금 정신없이 써내리는 여러 말들을 하지 않을 수 있었을텐데. 생각하던 찰나 더하여 온 세줄인가 네줄인가는 길이만큼이나 내용도 나를 붕 띄웠고, 나는 이 드넓은 지구에서 나 홀로, 아니 내 마음 홀로 중력따위 무시하고 붕방 잘만 날아다닌 줄로만 알았다.

뭐 이제 고2니까 힘을 내라나 뭐라나, 성적이 잘 안 나와도 낙담하지말고 더 열심히하라고 했다. 흥, 누구때문에 시험을 망쳤는데. 핑계다, 내가 공부를 안 한 건 맞다. 물론 공부 안 하고 종일 그 생각만 했다. 아무튼. 그는 나의 정신적 지주이다. 그러나 그는, 내 정신을 가장 피폐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공부가 하고싶어졌었다. 거짓말이다. 그냥 그의 말을 듣고싶어졌다.

다들 하루에 한 번쯤은 각자의 그를 떠올리곤하지 않나...... 난 딱 한 번 그를 생각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끊기지 않았다. 뭐, 한 번 아닌가?

그때면 과거를 떠올렸다. 떠오르기를 바랐던 나쁜 기억은 뇌리를 스치지도 않고, 오지 말라는 좋은 기억만 나를 찾아와 나를 괴롭게했다. 그렇게 내 하루는 과거들과 새로운 과거들에게 영향받아 형태를 바꿨다… 무형의 마음이 매섭다. 두렵고, 원망스럽다. 잘라낼 수 없음에 아프다. 그를 보며 보낸 허송세월. 글과 함께 쓰며 쓴 외사랑의 막을 내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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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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