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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E K Apr 19. 2024

기분은 생각 차이에서 온다.

Sentosa

아침이 밝았다. 여행지에서 맞이하는 첫 아침은 언제나 설레지만 지금은 예외다. 아들과 오늘 하루를 잘 보낼 수 있을지 걱정부터 앞선다.


역시나 나보다 먼저 일어나서 활기찬 아침을 맞이하고 있는 녀석이다. 지금의 컨디션이라면 오늘을 기대해 볼만하다. 부랴부랴 준비하고 조식을 먹으러 식당으로 향했다. 보통 조식당은 호텔 로비나 내부에 있는데, 특이한 점은 밖으로 한참 걸어가야 나온다는 것이다.


부지런히 걸어서 식당을 찾아갔는데, 입구에서부터 사람들이 줄을 서있었다. 여행지에서는 항상 이른 시간에 가서 아침을 먹는다. 사람들이 붐비기 전에 빨리 아침을 해결하고 하루를 시작하기 위함이다.


대체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몇 시에 나온 것일까..? 머지않아 우리 차례가 되어 입장했다.

배고파서 현기증 난다고요


아침을 꼭 먹어야 하는 아들은 재빠르게 접시를 집고 음식을 담기 시작했다. 빵, 삶은 달걀, 시리얼, 과일, 요트 등 담아 오는 음식들이 다양했다. 한껏 배불리 아침을 먹고 재정비를 한 뒤 첫 번째 여행지인 '유니버설스튜디오'로 향했다.



이른 아침이지만 기온이 불쑥 올라갔다. 바깥으로 나가는 첫 발을 내딛자마자 아들의 입에서는 '더워요!'라는 말부터 나왔다. 유난히 더위에 약한 녀석이다.


내 가방에는 더위를 대비한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손에는 오로지 카메라만 달랑 들려있었다. 시작도 하기 전에 덥다고 하면 곤란해는데..


눈앞에 커다랗게 돌아가고 있는 유니버의 상징인 지구본으로 녀석을 유인해 본다.


새로운 것에 관심 갖는 걸 좋아하는 아들은 지구본을 향해 뛰어갔다. 은 돌아가는 지구본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다시 텐션이 올라간 녀석과 힘차게 입장해 본다. 작지만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어트랙션이 갖춰진 놀이공원은 익숙한 캐릭터들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흥미로운 놀이기구들이 많지만 아들이 탈만한 것은 없었다. 회전목마도 무서워하는 녀석이기 때문이다.


입장권만 끊고 들어오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것도 타지 못하고 가면 아쉬울 것 같았다. 겨우 설득해서 트랜스포머를 타러 갔는데 줄도 길고 운행이 지연돼서 그냥 나와야 했다. 포기하지 않고 잔머리를 굴리던 중.. 예전에 슈렉 4D체험을 한 것이 생각났다. 더위에 지친 녀석에게 맞춤형이다.


예상대로 아들은 즐겁게 영화를 관람했다. 의자가 움직이고 앞에서 물이 나오자 신기해했다. 즐거움에 가득 찬 표정을 보니 오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기쁨도 잠시 밖으로 나오자마자 다시 더위와의 싸움이 시작됐다. 마다가스카르 캐릭터들이 우르르 나와서 흥겨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데도 관심이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내가 말리기도 전에 앞으로 달려가서 1열 관람을 할 녀석인데..

즐거움이 한가득인데..


더위에 지친 아들과 이곳을 더 구경하는 것은 무리다. 아쉽지만 과감하게 포기하고 밖으로 나왔다.


지금 아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건 빵빵하게 나오는 시원한 에어컨 공기다. 로 앞에서 기념품가게가 유혹하고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자 비로소 녀석은 씨익 웃었다. 신이 난 발걸음으로 기분 좋게 곳곳을 구경하며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골랐다.


하지만 호락호락하게 사줄 내가 아니다. 가장 갖고 싶은  딱 한 개만 살 수 있다고 했다. 물론 계산도 직접 해야 한다. 몇 번을 망설인 끝에 녀석이 용기 내어 계산대 앞으로 갔다.


수줍게 점원에게 장난감과 돈을 내민 꼬마는 원하는 것을 얻고 씩씩하게 걸어 나왔다. 낯선 곳에서 첫 성취감을 얻은 녀석은 자신감 충만하다.


침에 오면서 봐두었던 라멘집으로 향했다. 익숙한 음식이 나오자 아들은 맛있게 먹기 시작다. 조금 먹더니 원한 주스만 벌컥벌컥 마셔댄다. 우리 집 애들은 왜 이렇게 입이 짧은지.. 나 혼자 배불리 식사를 마친 뒤, 더위에 지쳐있는 녀석을 위해 호텔로 돌아가서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여행지에서 숙소는 그저 잠만 자는 곳에 불과했다.


아이와 함께 여행하다 보니 호텔이 존재하는 이유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꿀맛 같은 휴식시간이 이렇게 좋은 것이었구나.. 녀석은 새로 산 장난감이 마음에 드는지 바로 뜯어서 조립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런데..  이렇게 시간이 안 가지?


남은 시간을 온종일 호텔에서만 보내기엔 하루가 너무 아깝다. 물놀이를 딱히 좋아하지 않기에 벌써부터 수영장에 가는 것은 더더욱 내키지 않았다. 열심히 조립한 장난감을 갖고 노는데 정신이 팔린 아들을 슬슬 구슬리기 시작했다.


한 달 전, 아들에게 싱가포르 관광책을 사주었다. 가고 싶은 곳을 직접 고르게 하기 위해서이다. 센토사에 숙소를 잡은 것도 녀석이 원하는 곳들이 전부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에너지를 재충전한 지금, 다시 관광을 시작할 이유가 충분하다.


아들이 보고 싶어 했던 머라이언타워로 향했다. 전망대 위에서 내려다보는 전경이 멋진 곳이다. 시원한 바람이 불거란 기대와 달리 현실은 내리쬐는 태양을 피할 수 없었다. 하늘과 가까운 곳에 올라가서 모든 햇빛을 온몸으로 받고 있자니, 녀석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재빠르게 전망대를 탈출했다. 다시 1층으로 내려오니 그곳에는 황금색의 머라이언동상이 있었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황금주화를 받아가는 것을 본 꼬마는 호기심에 다가가 본다.

황금주화


아들은 가지고 있던 티켓을 다 넣고 황금주화를 얻었다. 행운이 올 거라는 기대와 함께.. 작은 기쁨을 누린 녀석과 자연스레 밖으로 나갔다.


예전 모습 그대로의 풍경이 펼쳐졌다. 여전히 변하지 않는 모습인데 나만 세월을 정통으로 맞았다고 생각하니 괜히 울컥했다. 아줌마가 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는 사실이 여전히 어색하다. 나는 여전히 나란 사람으로 살고 싶을 뿐인데..


오락가락하는 내 마음을 알리 없는 꼬마는 기다랗게 늘어져있는 뱀형상을 띈 작은 분수로 뛰어갔다. 더위를 잘 타는 아들에게 잠시 시원한 휴식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자유롭게 타일을 만지기도 하고 물줄기를 손으로 느껴보기도 하며 이곳을 만끽하고 있는 중이다. 역시 아이들에겐 놀이터와 물놀이 만한 것이 없나 보다.


천천히 길을 따라 걸어가며 구경했다. 자연스레 섬 끝으로 다다랐을 때 누군가 지나가면서 외친 한마디가 귀에 들어왔다.


"지금 정말 행복해!"


그 말을 듣고 나니 평범하게만 보였던 풍경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온종일 아이의 컨디션에 따라 움직이느라 놓치고 있던 경관이 눈에 들어왔다. 화려하게 아름다운 석양은 아니지만 은은한 주황빛의 하늘이 평온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카메라로 담을 수 없는 따뜻함


원하는 대로 하루가 흘러가지 않아서 답답해하고 있던 중이었다. 어딜 가든 미리 짜놓은 스케줄대로 하루를 완성하곤 했었다. 원하는 바를 이룬 뒤 오늘도 해냈다는 성취감이 좋았다.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에서 계획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맞춰가는 것이 심신안정에 좋을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에 매료된 순간 모든 욕심을 내려놓게 되었다. 꼭 어디 가서 무엇을 보느냐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아들과 천천히 길을 따라 산책했다. 녀석이 운동기구를 발견하고 뛰어갔다.


그래! 이것도 여행이지!


운동기구 위에 올라가서 함박웃음을 지으며 놀고 있는 아들을 보니 마음이 편해졌다. 아들에게 그토록 원했던 수영장에 가자고 했다. 행복이 두 배가 된 우린 또다시 호텔로 돌아갔다.



이럴 수가!


한껏 들떠서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수영장에 들어선 순간 우린 좌절했다. 어두컴컴한 하늘에서 느닷없이 천둥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시원하게 내리는 빗줄기가 당황스러울 지경이다.


온종일 쨍하게 예쁜 하늘은 아니었지만 우중충하지도 않았었다. 왜 하필 지금 비가 내리는 것인가! 수영장 입구에는 우천으로 인해 사용이 불가하다는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더 이상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멍하니 바깥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우두커니 서 있는 우리를 본 직원이 수영장 운행을 안 한다고 다시 한번 일러줬다. 꼬마의 얼굴은 실망감으로 가득 찼다. 그도 그럴 것이 떠나기 전부터 물놀이하는 것에 잔뜩 기대를 하고 왔기 때문이다. 물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아들과 놀아줄 생각에 작은 튜브도 챙겨 왔다.


하~~~~ 캐리어에 반이나 차지하는 짐보따리가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되었다. 

사테는 사테거리에서..


뜻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여행의 매력 아니었던가!


아들과 나는 다시 옷을 갈아입고 가까운 식당에서 이른 저녁을 먹었다. 녀석이 좋아하는 햄버거를 시켜줬다. 더 이상 덥지 않은 곳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아들의 얼굴은 행복이다.


그래도 관광은 마쳤으니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힘들어하는 아들을 데리고 그만 나가라는 하늘의 뜻인 건가.. 비록 유명한 분수쇼와 센토사의 야경은 보지 못했지만 내일을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 될 것이다.


그래, 쉬는 것도 여행이지 뭐.. 생각을 바꾸면 기분이 좋아진다. 아들과 나는 오랜만에 느긋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아들의 일기

공룡 뼈 있는데 거기서 사진도 찍었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성에서 슈렉 영화도 봤다. 그리고 저녁쯤에 머라이언동상도 봤다. 장난감도 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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