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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E K May 03. 2024

인내심의 위기

China town / Sands sky park

잠이 오지 않는다. 이토록 아름다운 야경을 보고 있자니 아까워서 잠을 잘 수가 없다. 새벽까지 넋 놓고 창밖만 바라봤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행복했다. 문득 집에 있는 가족들이 생각났다. 함께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왜 꼭 떨어져 있어야 그리운 건지.. 미스터리 한 존재가 바로 가족이 아닐까..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


피곤함도 잊고 새벽같이 눈이 떠졌다. 싱가포르에서 마지막 하루가 시작되었다. 동트기 전, 차갑게 식은 빌딩들이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다. 하루종일 창밖만 바라보고 있어도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온한 아침을 맞이하고 있을 때, 부지런한 아들은 오늘도 역시 일찍 일어났다. 배고픈 녀석과 일찌감치 조식을 먹으러 갔다.


맛있는 음식이 종류별로 있었다. 껏 배불리 먹은 뒤 느긋하게 오늘을 시작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시간이 자정이 넘기 때문에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다.  하루를 보내야 하기에 체력을 비축해야 했다.


피곤한 아들은 놀다가 잠이 들었다. 그 사이 짐정리를 하고 떠날 준비를 마친 뒤 마지막일지도 모를 창밖풍경을 또다시 바라봤다. 동그랗게 떠오른 햇살을 정통으로 받은 빌딩들은 오렌지빛을 머금으며 영롱한 색을 자랑하고 있었다.


찬란하다. 예쁘다. 하루만 더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과 괴리가 크기에 더욱더 매력으로 다가오는 것이 여행이 아닌가 싶다.

아침 풍경


보통의 여행이었으면 벌써 두 번째 장소로 이동할 시간이다. 호텔에 있는 시간을 가장 아까워하기 때문에 나의 여행시간은 항상 빠듯했다. 아들과 함께하니 휴식시간도 주어지고.. 이렇게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좋..긴 뭐가 좋아?


내 안의 여행세포가 또다시 꿈틀대기 시작했다.


자고 있는 아들을 깨워서 마지막 하루를 시작해 본다.



어차피 출발 시간은 정해져 있었다. 식당을 미리 예약해 놨기 때문이다. 시간에 딱 맞춰서 출발할 수도 있었지만 여유 있게 도착해서 주위를 둘러보기 위해 조금 일찍 나왔다.


MRT역으로 가서 1일권 티켓을 끊었다. 외국에서 지하철을 처음 타는 녀석은 모든 것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에스컬레이터가 빠르게 움직인다고 호탕하게 웃었다. 아들에게 살며시 MRT노선도를 쥐어줬다. 녀석은 우리가 가야 할 노선을 찾으며 플랫폼까지 차근차근 길을 찾아갔다.


시간이 걸리지만 아들에게는 또 다른 경험이 될 것이다.


오늘의 첫 번째 여행지 '클락키'에 도착했다. 12년 만이다. 오랜만에 찾은 이곳..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그대로다. 예전에 기념사진을 찍은 곳 역시 변하지 않고 기다려주었다. 아들과 함께 새로운 추억을 남겼다. 변치 않은 곳에서 은 포즈로 사진을 찍었다.


시간이 되어 서둘러 예약한 식당으로 갔다. 야외에 앉았던 자리가 그대로 있었다. 추억이 몽글몽글 피어나기 시작했다. 오늘은 더워하는 아들을 위해 실내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이곳에서 유명한 칠리크랩을 주문했다. 짝꿍인 계란볶음밥도 함께.. 둘이 먹기엔 다소 많은 양이지만 이 맛을 놓칠 수 없었다.

표정은 최고


기다리던 칠리크랩이 나왔다. 오랜만에 보는 음식에 눈이 번쩍 뜨인다. 잔뜩 기대에 들떠 한입 맛본 아들은 맵다며 더 이상 먹지를 못했다.


예전에 칠리크랩을 맛있게 먹고 한국에 와서도 따로 식당을 찾아가서 먹을 정도로 애정하던 음식이었다. 달달한 맛일 거라고만 생각했지 매운맛이 느껴질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월이 흐른 만큼 입맛도 변한 이다.


볶음밥에 양념과 크랩을 조금 넣고 맵지 않게 비벼주었다. 하지만 한번 매운맛을 본 녀석은 좀처럼 먹지 않다. 양념이 묻지 않은 부분만 먹는가 싶더니, 역시나 시원한 주스만 마시고 있다. 결국 남은 것은 전부 내 차지가 되었다. 생각보다 많은 양에 헉헉 거리며 우걱우걱 먹고 있는데, 녀석이 이번엔 춥다고 찡찡대기 시작했다.


작은 크로스백에는 걸칠만한 얇은 바람막이조차 없었다. 계속 덥다고만 했으니 굳이 짐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급한 마음에 초스피드로 먹기 시작했다. 배부르고 맵고 정신없고.. 내가 생각한 건 이게 아니었는데.. 비싼 칠리크랩의 맛을 제대로 음미하지도 못한 채 대충 먹고 나와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토스트박스나 갈걸..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밖으로 나왔다.



두 번째 목적지는 녀석이 출발 전부터 그토록 가보고 싶다고 했던 '차이나타운'이다. 녀석이 원하는 곳으로 가면 시 텐션이 오 것이라는 기대감을 안고 MRT역에서 내렸다. 하지만 밖으로 나옴과 동시에 녀석이 외친 한마디는..


"더워요!"였다.


여행 다니는 내내 달고 다녔던 저 말을 또 듣기 시작하니 나도 이제 슬슬 지쳐간다. 조금 전에는 그렇게 춥다고 난리 더니.. 기분을 맞춰주는 것이 조금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식물로 뒤덮인 독특한 건물


차이나타운 거리 역시 변치 않고 예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상인들도.. 사원도.. 모두 제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다. 중소녀의 거리공연, 발마사지, 털이 박힌 치킨수프.. 나만 홀로 기억하는 옛 추억을 떠올리며 걷고 있을 때, 아들은 점점 더위에 기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화려한 소품들이 진열되어 있는데 녀석에게는 관심 밖이었다. 기대했던 것과 다른 모습에 실망한 눈치다.


녀석이 뱉은 말이 무한반복 재생되는 도돌이표가 되기 전에, 눈에 띄는 건물로 무작정 들어갔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간 곳에는 도서관이 있었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입장하는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아들의 손을 꼭 잡고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더로부터 자유로워진 녀석은 어린이도서 코너로 가서 읽지도 못하는 책을 꺼내왔다.


아, 아니.. 설마 여기서 책을 읽으려고?


여행지에서 책은 어디론가 장시간 이동할 때나 허락되는 것이다. 물론 유명한 서점은 꼭 들른다. 진열된 책의 표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사서 갖고 나오면 그만이다.


영특한 우리 꼬마친구는 좋아하는 도서관에 들어오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자연스레 자리를 잡고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수많은 한자 중에 숨어있는 글자 찾기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아는 글자를 발견할 때마다 녀석은 뛸 듯이 기뻐했다. 단순한 글자들로 조합된 단어는 뜻도 유추해 본다.


그, 그래.. 너만 행복하면 그걸로 되었지..


녀석과 함께하면서 다양한 여행방법을 깨치는 중이다. 더 이상 스케줄에 연연하지 않고, 순간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무려 3권의 책을 읽은 아들은 그제야 밖으로 나가도 좋다는 사인을 보냈다. 녀석이 기억할 차이나타운은 '도서관'이 될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차이나타운은 '발마사지'였던 것처럼..



잠시 에너지를 충전한 우린 다시 호텔 근처로 돌아왔다. 녀석을 데리고 새로운 관광지를 찾는 것은 무리다. 시간을 때울만한 곳은 마리나 베이 샌즈 몰뿐이었다. 힘겨워하는 아들을 위해 근처 카페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실내 폭포가 때마침 가동돼서 뜻하지 않게 바로 앞에서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콸콸 쏟아져 나오는 물줄를 바라보고 있자니 속이 후련했다. 내 속에 쌓인 스트레스를 함께 내려보내 있는 중이다. 


이제 공항으로 가기 전까지 무엇을 하든 시간을 보내야 한다. 뱃속 가득 차있는 칠리크랩의 무게가 여전히 위장을 누르고 있다. 벌써 저녁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다. 소화도 시킬 겸 잠시 주변을 걷기로 했다.


한걸음을 떼기가 무섭게 아들은 덥고 배고프다며 또다시 호소하기 시작했다. 바로 저녁을 먹으러 가자는 말에 그동안 참아왔던 분노가 폭발했다.


지금 바로 이 순간! 태양이 가장 강렬하게 내리쬐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 찍기 좋은 이 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무도 없는 유람선 선착장에서 아들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쌓인 정을 두서없이 쏟아낸 것이다.


녀석은 영문을 모르겠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왜 화를 내는지도 모르는 철없는 꼬마를 상대로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순간 멈칫하며 다시 정신줄을 꼭 붙들어 맸다. 아들에게 닿지 못할 나만의 분노를 다시 고이 접어 마음속에 집어넣었다.


엄마와 함께한 첫 해외여행이 상처로 남을까 걱정되었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 되었다.

이렇게 예쁘잖아


크게 숨을 고르고 천천히 생각했다. 어찌 보면 점심을 제대로 먹지 못한 아들이 배고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음료수가 밥이 될 수는 없으니까..


미리 알아보고 온 유명한 피자집으로 갔다. 음식은 맛있었지만 마음이 불편해서 쉽게 먹지를 못했다. 역시나 울상을 하며 피자를 먹고 있는 아들을 보고 있자니 요 녀석이 무슨 잘못이 있나 싶었다. 조금 전 일에 대해 아들에게 사과했다. 녀석의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끝내 울지는 않았다.


우리 아들 많이 컸네..


한차례 소동이 있은 뒤 사이가 더 돈독해진 우린 식사를 마치고 근처에 있는 '스카이파크'에 올라가기로 했다.


해 질 무렵 전망대 위에 올라가니 생각보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제법 선선했다. 햇빛이 강렬히 내리쬤던 어제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 인지 이곳에 앉아서 풍경을 내려다보는 사람들이 평화로워 보였다. 높은 곳에 올라와서 자연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역시나 마음이 편안해진 아들은 다시 활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느긋함이 좋았다. 입가에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우리가 다녔던 곳들을 내려다보며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다시 행복바이러스가 장착된 아들과 함께 사진도 찍으며 우리만의 추억을 저장했다.

마지막은 행복


여행의 끝이 다가올수록 시간 빠르게 흘러갔다. 어느덧 이번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할 분수쇼가 시작할 시간이 되었다. 젯밤 호텔방에서 구경한 분수쇼를 아들도 꼭 보고 싶어 했다.


예전에 센토사에서 본 레이저분수쇼가 뇌리를 스쳤다. 사회자의 말에 따라 캐릭터가 자유롭게 움직이고 화려한 조명이 수놓은 아름다운 모습들에 감동받았었다. 마리나 베이 샌즈 앞에서 하는 분수쇼는 어떤 모습일까.. 사람들 틈에 섞여 아들과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음악에 맞춰서 물줄기가 춤을 췄다. 피어오르는 미스트를 캠퍼스 삼아 그 위로 비추는 레이저로 움직이는 영상들이 인상 깊었다. 거의 끝날 때쯤.. 아기부터 노인까지 사람의 성장과정이 나오는데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Louis Armstrong

What A Wonderful World


흘러나오는 음악이 분위기를 한층 더 끌어올렸다. 숨어있던 감수성이 폭발했다. 이 순간이 조금 더 계속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상이 끝나면서 우리의 꿈같은 여행도 끝이 났다. 다시 돌아가야 하는 현실이 시작되었다.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발걸음을 무겁게 옮겼다. 그동안 힘들어했던 녀석도 막상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자 무척 아쉬워했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야경이 마지막까지 배웅해 주었다. 우리에게 다음 여행이 또 있을까?


아들의 일기

오늘 점심때 클락키에 가서 칠리크랩을 먹었다. 그리고 차이나타운에 갔다. 그리고 전망대에 갔다. 8:00에 분수쇼랑 레이저쇼를 봤다. 그리고 창이 국제공항에 갔다. 그래서 기분이 좋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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