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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E K Apr 26. 2024

계획적인 여행은 안녕

The  Ritz-Carlton Millenia Singapore

밤새 내린 비 덕분에 푹 쉬어서 모처럼 상쾌한 아침을 맞이했다. 익숙한 길을 걸어서 조식을 먹으러 갔다. 배가 불러서 마음의 여유가 생긴 우린 호텔 주위를 가볍게 걸었다. 아침형 인간인 아들 역시 잔뜩 흥이 올랐다. 산책로가 전부 녀석의 무대인 듯 각종 로봇으로 변신하며 알 수 없는 소리를 해댄다. 장꾸미(장난꾸러기)를 발산하는 중이다.


오늘은 무사히 하루를 보낼 수 있을까?



녀석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오늘의 목적지까지 길을 안내하기 시작다. 고작 하루 있었을 뿐인데 벌써 적응했는지 이정표도 척척 읽어 나갔다. 


어딜 가더라도 늘 아들의 손에 지도와 가이드북을 쥐어주었었다. 길 찾는 법을 자연스레 깨우친 녀석은 지금 실력발휘 중이다.


거리며 뛰어가는 아들 덕에 순식간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곳, 살아 숨 쉬는 희귀한 생명체가 무수히 많이 있는 '아쿠아리움'이다.


호기심 가득한 녀석은 친구를 만난 듯 일일이 물고기와 교감하며 구경하는데 열심이다. 아치로 된 수족관이 나왔다. 머리 위에서 상어가 유유히 헤엄치자 꼬마는 한참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좁다란 길을 빠져나가 이번엔 규모가 엄청난 수족관이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곳이다. 에어컨바람 덕에 더 이상 덥지 않은 꼬마는 탄성을 지르며 앞으로 달려갔다.

진지하게 종이접기


한쪽에 마련된 휴게공간에는 아이들을 위 간단한 종이 접기가 준비되어 있었다. 역시나 그냥 지나칠 리 없는 녀석은 꼼꼼하게 물고기를 접어나갔다.


물고기들과 원 없이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출출해진 우린 점심을 먹으러 갔다. 커다란 간판에 한글로 쓰여있는 식당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만두가 먹고 싶었지만 한식을 먹고 싶어 하는 아들을 위해서 식당으로 들어갔다.


배를 두둑이 채운 우린 여유롭게 주위를 둘러보며 구경했다. 기념품가게도 빼놓지 않았다. 연스레 장바구니를 집어 든 녀석은 먹고 싶은 초콜릿을 골라왔다. 계산 역시 아들 몫이다.


한참 동안 시간을 보낸 우린 다음 여정을 위해 호텔에서 짐을 찾고 다른 호텔로 이동했다. 두 번째로 도착한 호텔에서 체크인을 하는데, 직원이 꼬마에게 스탬프북을 주었다. 호텔을 한 바퀴 돌며 도장을 다 받아오면 아이스크림을 제공해 준다고 했다.


숙소에서 시간 보내는 것을 가장 아깝다고 생각하던 나였지만 아이와 하는 여행인 만큼 이 또한 경험이 될 수 있며 흔쾌히 스탬프북을 들고 로비를 휘젓고 다녔다. 환한 미소로 맞이하며 기다렸다는 듯이 도장을 찍어준 직원들 덕분에 쭈뼛대던 녀석이 점점 미션수행에 빠져들고 있었다.


즐거움의 연속인 아들은 지막 코스에서 사탕까지 한 움큼 받고는 레스토랑에서 신나게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아이스크림 하나에 세상을 다 가진 기분 들 수 있다니.. 아들의 순수하고 맑은 영혼이 빛나보였다.


객실은 준비되었지만 3시부터 들어갈 수 있다고 해서 잠시 호텔 밖을 산책하기로 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호텔문을 나서는 순간 정해졌다. 눈앞에 보이는 커다란 건물.. 싱가포르의 새로운 랜드마크인 '마리나 베이 샌즈 '에 가기로 했다.



헬릭스브리지의 절반을 걸어갈 쯤이었다. 게 웃고 있던 아들의 얼굴이 서서히 구겨지기 시작했다. 더위와의 싸움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래도 오늘은 오래 버텼구나..


후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를 외치며 힘을 실어줬다. 착한 아들은 엄마의 채근에 다시 힘겨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평소 같았으면 10분도 안 걸리는 거리인데 더위에 취약한 아들에게는 이마저도 고역일 것이다.


어차피 정해진 일정은 따로 없었기에 시원한 음료수를 마시며 쉬었다가기로 했다. 쇼핑몰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유명한 찻집으로 갔다. 달콤한 음료를 마시며 앉아서 쉴 수 있다는 생각에 아들의 기분은 다시 살아났다. 녀석이 좋아하는 마카롱도 쾌히 주문해 주었다.


뜻하지 않게 오후의 티타임이 시작되었다.


다시 미소를 되찾은 아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지금을 기록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자 녀석이 그런 내 모습을 흉내 냈다.

안과 밖, 대비되는 너의 모습



순간포착! 아들의  미소가 잘 나온, 지금의 행복을 사진에 가뒀다.



즐거운 티타임을 마치고 힘찬 발걸음으로 다시 호텔로 향했다. 돌아가는 길은 발걸음이 가볍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객실문을 열자 탁 트인 도시뷰가 창문너머로 펼쳐졌다.


"우와~~~~~~ 정말 멋있어요!"


멋진 풍경에 반한 아들이 창문 쪽으로 달려가며 외쳤다. 녀석은 신이 나서 구석구석 꼼꼼히 구경했다. 특히 욕실에서 보는 경치가 최고였다. 정말이지 이렇게 좋은 호텔은 살면서 처음이다. 그새 탐색을 마친 아들은 곳곳을 데리고 다니며 안내해 주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동영상에 담아본다.


별거 없지만 창밖 풍경 하나만으로도 행복했다. 가만히 서서 경치를 감상해 본다. 조금 전 우리가 다녀왔던 마리나 베이 샌즈 몰이 눈앞에 있었다. 그 옆으로는 '가든스 바이  베이'가 넓게 펼쳐졌다.


시선을 따라가다가 멈춘 곳이 있었다. 독특하게 생긴 나무들이 우뚝 솟아있는 슈퍼트리.. 저 안에 들어가면 어떤 기분일까? 음악에 맞춰 빛을 뿜어내는 레이저쇼가 볼만하다던데.. 내면의 또 다른 자아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평화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들의 눈치를 살폈다. 이미 한번 다녀온 길이라 또 가자고 하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뭐라도 기억에 남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 저거 보러 갈까? 저 나무가 엄청 멋지대~~!"


용기를 내어 아들에게 말을 건넸다. 컨디션이 올라온 아들의 반응은 다행히도 긍정적이었다. 그렇게 우리의 마지막 투어가 시작됐다.


어둠이 내려앉기 직전의 하늘이 유난히 파랗다. 우리가 걸어가는 길을 따라 하늘색도 서서히 짙어지고 있었다. 강렬한 태양이 지면 더위도 사그라들 거란 기대와 달리 습한 더위가 아들을 또다시 힘들게 하기 시작했다.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걸어도 소용이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쇼핑몰에 다시 들어왔다. 영국에서 봤던 햄리스 장난감가게가 아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장난감에 홀린 녀석은 힘든 것도 잊고 총총거리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만 들어오면 생기를 되찾는 녀석은 이것저것 구경하며 더위를 식혔다.

지금은 사라진 장난감 가게


집에 있는 동생이 생각난 오빠는 동생을 위 선물을 열심히 골라본다. 마음에 드는 분홍색 토끼인형을 집어 들며 씩~ 웃어 보다. 동생이 좋아할 거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계산은 내가 하는데 왜 생색은 요 녀석이 내는 건지.. 하하~!


계속해서 구경을 하던 녀석은 한쪽 구석에서 책을 발견했다. 집에 있는 책과 같은 것을 발견하고는 신기해했다. 갖고 있지 않은 주제로 한 권 사주었다.


잠시 샛길로 샜던 우린 다시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물 밖으로 나가자 다양한 식물들로 조성된 다리가 나왔다. 이곳을 건너면 드디어 원하는 곳에 갈 수 있게 된다. 지만  발걸음이 빨라질수록 녀석의 칭얼거림도 심해지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녀석을 어르고 달랬다.


피곤함과 힘듦에 지배당하기 시작한 녀석이 말했다.


"엄마, 여기를 지나가면 못 돌아올 거 같아요."


녀석의 한마디의 울림이 컸다. 눈앞에는 그토록 보고 싶었던 슈퍼트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손을 뻗으면 잡힐 것만 같았다.


내 안의 천사와 악마가 싸우기 시작했다.


왜? 여기까지 왔는데 저걸 안 본다고? 기왕 왔으니까 보고 가야 하는 거 아냐?


애가 힘들다잖아.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모른 척할 거야?


힘들더라도 계획한 모든 것은 다 봐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일정에 없던 곳이라도 마음에 들면 발걸음을 주저하지 않았다. 디를 여행하든 나의 시간표는 항상 아침부터 저녁까지 꽉 차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다르다.


나보다는 아이가 우선이 돼야 하니까.. 힘겨운 갈등 끝에 내 안의 천사가 승리의 깃발을 들었다.


"그래, 그럼 저 나무랑 기념사진만 찍고 가자. 우리 호텔 가서 파티할까?"


"예~~~~~!! 좋아요. 미역국 파티해요!"

야경은 창밖으로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이 방방 뛰며 소리를 질렀다. 


그래, 가자. 가!!!


나무가 별거 있겠어? TV로 보면 그만이지.. 애써 서운한 마음을 달래며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해가 완전히 저문 캄캄한 하늘에 밝은 조명이 빛을 밝히고 있었다. 야경은 또 왜 이렇게 아름다운 거야? 건물마다 빛을 내는 조명들이 내 혼을 쏙 빼놓다. 조금만 더 머물고 싶다는 나의 바람과 달리 빠른 발걸음으로 줄행랑치는 아들을 부지런히 쫓아갔다.


단숨에 호텔로 돌아온 아들은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서 피로를 풀었다. 집에서 가지고 온 미역국밥과 컵라면, 주스와 과자 등 평소 먹지 않는 것들을 잔뜩 펼쳐놓고 우리만의 파티를 조촐하게 시작했다.


창밖에서는 마침 마리나 베이 샌즈에서 하는 레이저분수쇼가 시작하고 있었다. 위에서 쏘는 조명줄기가 현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아쉬워하는 나를 위한 작은 선물 같았다. 그래, 멀리서 바라보는 것도 행복이지..


내게 있어 여행이란..


새로운 곳을 끝없이 찾아 헤매는 것이었다. 주어진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는 것이 중요했다. 


어쩌면 아들이 원하는 여행은 하루종일 물놀이와 함께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관광이 중요한 나이는 아닐 테니까.. 녀석과 함께 하면서 소소하게 보내는 시간도 여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렇기에 아이와의 여행에서 계획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아들의 일기

오늘 아침에 개운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조식을 먹었다. SEA아쿠아리움에 갔다. 거기서 신기한 물고기 상어를 봤다. 그리고 나와서 초콜릿가게랑 밥을 먹으러 갔다. 그런데 신기한 게 초콜릿가게에서 초콜릿을 엄마가 떨어뜨렸는데 장바구니에 떨어졌다. 그래서 기분이 엄청 좋았다. 그리고 숙소를 다른 호텔로 바꿨다. 여기서 물놀이도 했고 파티도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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