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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E K May 17. 2024

놀이터가 제일 좋아요.

Darling Harbour

도심 한가운데 있는 호텔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빼곡하게 채워진 건물들로 갑갑한 모습이 아닌 드넓은 땅 위로 파란 하늘이 양탄자처럼 펼쳐졌다.


고층으로 배정돼서 내려다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새로운 호텔이 마음에 든 아들도 창밖 풍경을 감상했다.

창밖의 멋진 풍경


'더워요~!'만 외쳐대던 작년과는 다른, 한 살 더 먹은 형의 모습이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음 장소로 출발했다.


이번 여행 목적은 힐링!


기간이 짧은 만큼 무리하지 말고 쉬엄쉬엄 지내다 오기로 했다. 여행에 대한 모든 욕심과 강박을 내려놓고 왔다. 꼭 봐야 할 '오페라하우스'를 도착하자마자 보고 왔으니 오늘의 할당량은 채운 셈이다.



낭만이 가득한
Darling Harbour


아침부터 지하철을 이용했는데 한번 금액이 빠져나간 뒤 더 이상 결제되고 있지 않는다. 왠지 모르게 횡제 한 기분이랄까..


밖으로 나온 순간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공사현장이었다. 여기도 변화를 하고 있구나.. 그늘진 곳으로 걷다 보니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기분 좋게 걸어가고 있을 때 녀석의 눈에 띈 곳이 있었다.


바로 한번 들어가면 오랜 시간 동안 결코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아이들의 천국!


놀이터다!


"와~~~ 미끄럼틀 한 번만 타도 돼요?"


녀석은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타도 되지~!"


한껏 유연해진 엄마의 허락을 받은 꼬마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곧장 미끄럼틀로 돌진했다. 렇게 좋을까...


머나먼 국까지 와서 놀이터라니..!


나이를 먹긴 먹었나 보다.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너그러워지기 시작했다. 혼자지만 씩씩하게 그네도 타고 그물로 만들어진 정글짐도 오르 아들을 보니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시계만 쳐다보며 조급해하던 작년의 나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아들의 행복한 미소를 카메라에 담으며 나름대로 이 여행을 즐기는 중이다. 낯선 외국인 친구들 틈에 섞여서 전혀 기죽지 않고 뛰노는 모습이 오히려 신기했다.


아이들은 왜 그렇게 놀이터를 좋아할까? 그것은 어른들에게 커피와 술을 왜 마셔요?라고 묻는 것과 같다.


그저 뛰어노는 것이 좋은 아이들은 지금 있는 곳이 우주밖이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별이 반짝반짝 빛나는 신비로운 은하수를 보는 것보다 지금이 몇 곱절은 더 행복해 보인다.


미끄럼틀에서 하강하며 느끼는 짜릿함과 그네에서 허공을 힘차게 가르며 뱃속부터 울리는 간지러움을 이길 수는 없을 테니까..

놀이터는 너의 세상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이 지나서야 녀석은 놀이터에서 제 발로 빠져나왔다. 신나게 놀고 난 아들의 얼굴이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엄마, 여기 정말 좋아요! 제일 재밌었던 게 뭐였면요..."


길을 걷는 중에도 아들의 입은 잠시도 쉬지 않았다. 새로운 놀이기구에 도전한 이야기, 미끄럼틀이 엄청 넓어서 짜릿했던 이야기 등 녀석이 경험한 모든 일들을 얘기하는 중이다. 아들의 수다를 들으면서 나도 새로운 여행을 하고 있다.



항구 쪽으로 가니 저 멀리 '시드니타워'가 보였다. 아직까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계단에 걸터앉아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엉덩이가 가벼운 녀석은 고새를 못 참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에너지를 발산 중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


아들과 지난 여행에서 배운 것들을 열심히 실천하고 있는 중이다. 정신없이 움직이던 것을 멈추고 세상을 바라보니 그동안 눈에 띄지 않던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평온한 일상을 즐기는 그들의 얼굴표정 역시 밝아 보인다. 유유히 비행하는 갈매기마저 평화로워 보다. 햇빛에 반사된 윤슬이 유난히 반짝다. 불어오는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간다. 깊게 심호흡을 했다. 이토록 맑은 공기를 마셔본 적이 있는가! 미세먼지와 씨름을 하느라 머리가 아픈 요즘 더욱 반가운 산소였다.


아들과 인근 상점을 둘러보러 갔다. 이른 저녁을 해결하면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바깥세상을 관찰하다 보니 욕이 사라진 것인가.. 아들이 원하는 생과일주스만 한 잔 사서 나왔다. 녀석은 저녁으로 한식이 먹고 싶다고 했다.


흠.. 외국에서 한식당에 가는 것은 썩 반가운 일이 아니다. 그 나라의 음식이 차고 넘치는데.. 이런 기회에 전통음식과 여기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경험해 보는 것이 좋았다. 외국에서 한식당에 가는 것이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냥 한식당집이 없다고 말할까? 아니야.. 괜히 무리하지 말자. 지난번처럼 코피 쏟으면 어떻게 해...'


그렇다. 힘듦의 연속이었던 지난 싱가포르 여행 마지막 날, 돌아오는 공항에서 녀석은 코피를 한 바가지 쏟았었다. 원래 더위를 잘 타는 아들은 조금만 무리를 해도 코피를 자주 쏟았었다. 괜히 내 탓 같고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에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났다.


바로 핸드폰을 집어 들고 친구에게 도움을 청했다. 사실 호주에 입국한 순간부터 이곳에 사는 친구와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시드니에 살던 친구는 하필 내가 오기 몇 달 전 '누사'로 이사를 갔다. 우리의 만남의 아쉽게도 불발되었지만 같은 하늘 아래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반가운 건 사실이다.


친구의 추천을 받은 한식당으로 갔다. 한식을 먹을 수 있다는 말에 아들은 뛸 듯이 기뻐했다. 너의 기쁨은 나의 기쁨이니까.. 아들과 어깨동무를 하며 신나게 거리를 걸었다.


이토록 자유로운 느낌이 참 .

냉면과 떡갈비


아들은 한국인이 많은 식당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먹고 싶은 음식이 많아서 행복한 고민 중에 있다. 녀석이 고른 냉면과 떡갈비를 주문했다. 냉면? 평소 잘 먹지 않던 음식인데 저걸 고르다니.. 의심쩍지만 일단 주문한 음식을 받았다. 역시나 한 입 맛보더니 취향이 아닌지 나에게 미룬다. 그럼 그렇지.. 결국 떡갈비 한판은 아드님 몫이 되었고 냉면은 내 차지가 되었다.



천의 얼굴
The Sydney Opera House


배가 부른 우린 아들이 보고 싶어 하는 야경을 보기 위해 하버브리지로 다. 야경을 보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다. 온종일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아주 신기한 경험을 처음으로 하는 중이다.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지려면 조금 더 있어야 했다. 한층 낮게 깔린 태양이 오페라하우스를 오렌지 빛깔로 물들였다. 름다운 석양을 열심히 카메라에 담으며 하버브리지까지 걸어갔다.


그때도 이 시간쯤이었던 것 같다. 야경을 보기 위해서 이곳을 찾았었다. 아름다운 거리를 활기차게 걸으며 즐거운 추억을 남겼었. 아.. 지금의 내 모습은 예전과 달리 영락없는 아줌마구나... 세월이 이렇게 야속할 수가.. 차가워진 초저녁의 공기가 숨어있던 나의 감성을 깨웠다.


잠깐 들러서 야경만 살짝 보고 나오는 것인 줄 알았던 아들은 "왜 안 가요?" 라며 재촉하기 시작했다.


"멋진 야경을 보려면 조금 더 있어야 해.. 저쪽 의자에 앉아서 기다릴까?"


기왕 멀리까지 온 거 완벽한 야경을 보여주고 싶었다. 해가 지금 막 떨어진 색빛 하늘아래 오페라하우스는 아직 빛을 감춘 채 희미하게 형상을 보일 뿐이다. 하얀 외관이 시간이 흐를 때마다 다양한 색을 뿜어 내는 천의 얼굴을 가진 건축물이다. 


그나저나 해가 지면 어두워지는 건 순식간인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가는 거야?


아뿔싸!!


여기는 아직 서머타임이 적용 중이다. 원하는 풍경을 보기 위해서는 몇 분이 아닌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분위기를 봐서는 곧 어두워질 거 같은데.. 어둠이 쉽게 가라앉질 않고 나와 실랑이 중이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은근히 빡빡한 시간을 보내느라 피곤한 아들 점점 힘들어하기 시작했다. 내 안에서는 또다시 갈등이 시작되었다. 그냥 들어가서 쉬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기다려 온 시간이 아까웠다. 그렇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를 말하며 캄캄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괜히 왔던 길을 다시 걸어가 보고 아들의 사진을 찍어주는 척, 녀석이 좋아할 만한 주제의 이야깃거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들과 긴 시간 대화하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궁금한 것이 많은 녀석은 한번 질문하기 시작하면 궁금증이 풀릴 때까지 물어봤다. 그때 하버브리지 뒤 쪽에 있는 테마파크에 불이 켜졌다. 이제 곧 완벽한 어둠이 내려앉을 것이다.


실오라기 같은 희망이 생겼다. 아주 좋은 신호다. 아들과 불이 켜진 테마파크를 바라봤다. 조금씩 불빛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인내의 시간
완벽한 야경


"저기 좀 봐! 오페라하우스에 불이 켜졌어!"


아들은 신기한 듯 달려갔다. 드디어 어둠을 뚫고 오페라하우스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아들은 하얗고 뽀얀 속살을 드러 낸 오페라하우스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정말 아름다워요~!"


"멋지지? 엄마가 이걸 보여주고 싶어서 조금만 더 있자고 한 거야.."


"정말요? 안 보고 갔으면 후회했을 거예요!"


평생 잊을 수 없는 야경에 홀딱 반한 우린 눈을 떼지 못한 채 보석처럼 반짝이는 오페라하우스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기나긴 하루를 보낸 우린 그렇게 돌고 돌아서 처음 여행을 시작한 장소에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아들의 일기

제목 : 두근두근 설레는 호주의 밤

호주는 정말 멋진 곳이다. 내가 거기서 기절할 정도로 멋지다. 호주에서 꼭 볼거리는 오페라하우스와 하버브리지다. 야간에 보면 진짜 멋있다. 호주가 덥고 더운 바람이 불어도 오페라하우스와 하버브리지만 봐도 다 잊어버린다. 완전 감동이었다. 그리고 감탄도 했다. 다음에 또 어떤 멋진 일이 일어날지 기대가 된다. 다음번에 더 멋있는 걸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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