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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E K May 24. 2024

동물원에 동물이 없어요.

Taronga Zoo

고요한 아침이 밝았다.


여행 첫날부터 무리했으니 오늘은 푹 자야지.. 하는 작은 바람은 이미 끝나버렸다. 눈치 없이 눈이 말똥말똥 떠졌으니 말이다. 쓸데없이 부지런함을 탓하며 이른 조식을 먹으러 갔다.


아침부터 활기 넘치는 식당 분위기가 좋다. 웃으면서 아침인사를 나누는 모습, 맛있는 걸 먹기 위해 음식을 가지러 가는 설레는 발걸음, 달그락 거리 식기 부딪히는 경쾌한 소리..


에너지를 잔뜩 받고, 또 한가득 몸속에 채우고 나면 든든하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문득 어제 하루종일 화장실을 가지 못한 녀석의 장이 걱정되었다. 이 좋아하는 요트를 권했다. 흔쾌히 먹고 싶다고 대답한 꼬마!


"응~ 그런데 네가 가서 직접 가지고 오는 건 어때? 저기 끝에 보이지? 그릇에 요거트를 담고 원하는 토핑을 얹으면 돼."


친절하게 가지고 오는 방법을 알려줬지만 녀석은 엄마가 대신 가지고 와주길 바라는 눈치다. 아들의 독립성을 기르기 위한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 없다. 근처에 있는 직원에게 물어보면 된다고 쿨하게 대답하고는 식사를 마저 했다. 한참을 고민하고 망설이던 녀석은 이내 결심한 듯 용기 내어 요트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꼬마가 앞에서 서성이고 있으니 직원분이 기꺼이 다가와서 도와주었다. 녀석은 수줍게 먹고 싶은 과일을 가리켰다. 도움을 받아 소담하게 담아 온 요거트를 입가에 묻히며 맛있게 먹는 녀석의 얼굴에 자신감이 가득했다.



숨은 동물 찾기
Taronga Zoo


인상 깊었던 조식을 마치고 드디어 녀석이 학수고대하던 코알라와 캥거루를 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오늘은 어제와 달리 몸이 가볍다. 아침햇살이 눈부다. 유난히 상쾌한 아침, 그 이유는 바로 페리를 타고 이동하기 때문이다.


한강에서 유람선도 타본 적이 없는 아들과 처음으로 배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다. 녀석도 한껏 들떠서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서큘러 '까지 단숨에 이동했다. 우리가 타야 할 페리선착장 앞에 섰다.


커다란 유람선이 바로 코앞에서 웅장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와~ 이거 타고 가는 거예요?"

"아니, 이건 먼 곳으로 여행 가는 사람들이 타는 배야. 우리는 거 타고 갈 거야."


상기된 목소리로 대답하면서 반대쪽에 있는 작은 페리를 가리켰다. 크기가 어찌 됐든 아들은 배를 탄다는 사실에 몹시 흥분했다.

손으로 가리고 사진 찍는 기술


눈앞에 건물들이 점점 작아지며 배는 출발신호를 알렸다. 시원한 바람을 가르고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쾌속질주 하는 중이다. 어제 봤던 오페라하우스를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었다. 하버브리지도 손만 뻗으면 닿을듯한 거리를 두고 스쳐 지나갔다. 저 멀리 도심의 스카이라인이 멀어질수록 우리는 도착지에 가까워져 갔다. 미어캣처럼 경치를 감상하느라 정신없던 아들이 배가 육지에 다다르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페리에서 내리자 바로 동물원으로 가는 케이블카가 연결되었다. 따로 헤매지 않고 갈 수 있어서 좋았다. 케이블카를 타고 들어간다는 사실에 꼬마는 방방 뛰며 좋아했다.


지하철, 페리, 케이블카.. 연이어서 갈아타는 이동수단이 신기한 모양이다. 마치 신비한 곳으로 모험을 떠나는 기분이랄까.. 그렇게 하나씩 교통수단의 미션을 클리어한 우리는 드디어! 동물원에 입장했다.


넓디넓은 에서 가장 먼저 반겨준 동물은 바로 기린이었다. 높은 곳에 매달려 있는 먹이 먹고 있느라 정신없는 기린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윤기가 반질반질 흐르는 기린 뒤로 시드니 도시 전경이 한눈에 보였다.


이토록 낭만적인 동물원이라니!

기린과 도시


설렘지수가 한껏 올라간 우린 지도를 따라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뭔가 휑한 이곳에는 사람도 많지 않았고 귀여운 동물들도 어디 가고 없었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어딘지 모르게 어수선한 분위기와 곳곳에 방치되어 있는 호스, 철판으로 막아져 있는 우리 등.. 부분적으로 보수공사를 하고 있었다.


큰 규모에 비해 가뭄에 콩 나듯 보이는 동물들을 찾아가며 볼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핵심 멤버인 코알라와 캥거루는 어디에 있는 걸까? 아침이 주는 혜인 선선한 공기가 제법 달아올라 뜨거워지고 있었다. 어제보다 기온이 더 올라간 느낌이다. 헉헉 거리면서 걷고 있을 때 저 멀리 사람들이 모여서 무언가를 올려다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코알라예요!"


아들이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코알라를 발견하며 미소 지었다. 얼른 뛰어가서 코알라를 반겼다. 책에서만 보던 동물을 직접 마주한 녀석은 뛸 듯이 기뻐했다.


"코알라는 빨리 걸을 수 있을까, 없을까?"


문득 예전에 코알라가 엄청 빨리 움직이며 걷던 것이 생각나서 아들에게 질문을 했다.


"글쎄요.. 코알라는 나무 위에서만 있는 거 아니에요?"


그렇지..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코알라와 그동안 사진으로만 봤던 코알라 모두 나무 위에서 있는 모습이었다. 움직이는 모습을 본 나는 운이 좋았던 것이었다.


녀석은 처음 보지만 친근한 코알라를 뒤로하고 이번엔 캥거루를 찾아 걷기 시작했다. 브리즈번에 있는 동물원에 갔을 때는 넓은 들판에 각종 동물들이 다 나와 있어서 말 그대로 자연 친화적인 느낌이었다. 걷다가 보면 누워서 쉬고 있는 캥거루를 아무렇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뻥 뚫린 자연 속에서 동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좋았다.


그에 반해 이곳은 숨어있는 동물들을 찾아다녀야 하는 것이 다. 어디에 있을까.. 멀지 않은 곳에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은 출입문이 보였다. 망설이고 있는데 앞에 있던 관광객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따라서 들어가니 그곳에는 또 다른 작은 동물원이 마련되어 있었다.

동물 친구들


아들이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캥거루가 있었다. 그 뒤로는 에뮤도 보였다. 유니폼을 맞춰 입은 사육사들도 함께 있어서 안전했다. 녀석은 곳곳에 있는 동물들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호주에서 꼭 봐야 하는 코알라와 캥거루를 봤으니 오늘도 해야 할 일을 일찌감치 마친 셈이다.


이젠 어디 가서 뭘 해야 하지?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히 움직인 탓에 오늘도 하루가 길다. 간단히 먹을 것을 사서 호텔에서 점심을 먹고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우린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 


어느새 여행 중에 호텔에서 쉬어가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 모양이다.



보석처럼 빛나는
Sydney Observatory


한낮 온도가 껑충 뛰었다. 강렬히 내리쬐는 직사광선을 피할 길이 없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아들이 힘들다는 신호를 보냈다. 후.. 예상했던 일이다. 녀석과 함께 바로 앞에 보이는 건물로 무작정 들어갔다.


'시드니 현대 미술관'


신난다. 일정에 없는 곳인데 우연히도 그곳이 미술관이다. 아들과 호주의 현대미술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이상 시간에 쫓기지 않은 우린 천천히 작품을 감상했다. 시원한 에어컨 공기에 지친 아들도 다시 살아났다. 한쪽에선 한국인 작가의 특별전이 전시되고 있었다. 외국에서 한국인 작가의 활동 볼 수 있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진지하게 관람해 본다.


한차례 문화생활을 마친 녀석과 지도를 살펴봤다. 다음 목적지인 천문대로 가는 길을 확인했다. 친구가 알려 준 괜찮은 카페도 마침 가는 길에 있었다. 차를 마시며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다.


The tea cosy


이름 그대로 카페는 일반 가정집을 개조해서 만든 안락하고 편안한 분위기였다. 예전에 브라이튼에서 생활할 때 지냈던 집과 비슷한 구조였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생각들은 순식간에 숨어있던 감수성을 끌어올린다. 빨간색 카펫이 깔린 계단을 오를 때 둔탁하게 나는 삐그덕 소리가 바로 눈시울을 촉촉하게 해 준 포인트였다.


매일 아침 흥겨운 음악을 틀고 리마켓에서 사 왔다는 200년 된 현관문을 수리하던 집주인아저씨가 생각났다. 소일상에 행복해하며 환하게 미소 짓는 모습이 생하게 떠올랐다. 옛 추억을 회상하며 잠시 시간여행을 다녀온 듯한 묘한 기분이 온몸을 감쌌다.


벽면에 걸려있는 액자들과 계단마다 놓여있는 소품들을 구경며 다시 현실을 자각했다.


조심조심 올라간 2층의 아늑한 방에 있는 작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위를 식혀 줄 시원한 음료수와 빼놓을 수 없는 스콘을 주문했다.

스콘은 행복


방안 곳곳에 놓인 물건들이 친근함을 주었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뜨개질 바구니는 마치 할머니댁에 놀러 온 기분이 들었다. 녀석은 갓 나온 따끈한 스콘에 딸기잼과 생크림을 듬뿍 발라서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처음 먹어보는 맛이 신기했지 음료수와 함께 맛있게 먹었다.


모처럼 포근한 공간에서 아들과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웠다.



천문대로 가는 길은 인적이 드문 동네길이었다. 높은 곳에 있으니 가는 길이 경사진 언덕인 것은 당연했다. 빼곡히 늘어선 가정집들을 천천히 구경하면서 걸었다. 초록으로 우거진 가로수길이 정다웠다. 천천히 걸으며 동네 정취를 만끽하는 나와 달리 아들은 더위를 못 참고 슬슬 시동걸기 시작했다.


흠.. 오르막 길이 힘든 모양이다. 조금만 더 걸으면 천문대까지 오를 수 있다고 얘기해 줬지만 지금 당장이 힘든 녀석은 왜 높은 곳까지 올라가야 하냐며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지난 여행에서 깨우친 것이 많았던 나는 녀석의 말에 크게 동요되지 않았다. 주위의 고요함이 나를 차분하게 다스려주었다.


어차피 가기로 한 거 여기까지 왔는데 되돌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드디어 천문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비탈진 작은 언덕을 올라가자 시원한 바람이 반겨주었다. 언덕 아래로 탁 트인 풍경에 가슴이 시원하게 뚫렸다.


저 아래에서 인상 쓰며 힘겹게 올라오는 녀석의 얼굴 점점 펴지기 시작했다. 내게 성질낸 것이 미안했는지 아니면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마음이 풀렸는지 두 팔 벌려 달려와 폭 안겼다.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녀석이다. 

보석처럼 빛나는 숨은 명소


바로 앞에 보이는 하버브리지와 도시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지금 이 순간이 평화롭다. 걸어오느라 힘들었던 아들이 가방을 베고 바닥에 철퍼덕 누웠다.


'앗, 가방!'


하... 여행 온다고 새로 산 가방인데 아무렇지 않게 바닥에 내려놓다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는 아직도 물욕을 버리지 못한 것이 확실하다. 온전히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은 아직 무리였나..


풍경이 아름다운 곳에서는 모든 욕심이 사라진다. 자연의 위대함 앞에서 인간의 탐욕은 한낱 먼지에 불과하니까.. 쓸데없는 생각을 그만두기로 하고 아들과 천문대를 구경하러 나섰다.


직원이 친절하게 인사하며 마음껏 둘러봐도 된다고 했다.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들의 맑은 웃음은 기분을 좋게 해주는 힘이 있었다. 행복한 감정이 몽실몽실 피어올랐다.


다시 기분이 좋아진 우린 천문대 내부를 꼼꼼히 구경다. 밤에 왔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을 보지는 못했지만 별보다 빛나는 이곳의 아름다운 풍경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배가 고픈 우린 허기진 위장을 달래기 위해 시내 곳곳을 누볐다. 뭔가 맛있는 것을 먹고 싶은데 딱히 눈에 띄는 곳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해가 떨어지자 도시 분위기는 낮과 판이하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아이와 함께 갈 만한 식당이 많지 않았다.


그저 힘없이 걸어가고 있던 중 아시안 음식점이 눈에 띄었다. 일본, 태국, 싱가포르, 베트남, 대만 등 아시아 국가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잔뜩 기대감을 안고 들어갔는데 생각보다 음식의 종류는 많지 않았다.

소고기덮밥과 어린이정식


메뉴보다 더 신기한 게 있었는데 테이블 옆에 붙어 있는 터치스크린이었다. (당시에는 앉은자리에서 주문할 수 있는 태블릿이 국내엔 없었다.) 처음 본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진 우린 차근차근 메뉴를 살펴보며 음식을 주문했다.


익숙한 맛의 음식으로 잔뜩 배를 채운 우린 그렇게 포만감 가득한 하루를 마무리했다.


아들의 일기

제목 : 타롱가 동물원

타롱가 동물원에 갔다. 타롱가 동물원에서 무슨 동물들을 봤냐면 에뮤, 새, 개구리, 코알라, 캥거루, 오리, 너구리, 생쥐, 박쥐, 두더지를 봤다. 그리고 호주를 상징하는 동물은 캥거루와 코알라다. 너무 신기했다. 또 재밌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멋있기도 하고 그랬다. 내가 봤던 동물원 중에서 제일 멋있고 신기했다. 물론 덥긴 하지만! 좋았다. 다음에 또 타롱가 동물원을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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