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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렐레 Jan 08. 2024

2024년 첫 태양보다 따뜻했던 가족

40대 여자4람, 혼자4는 이야기

어제와 다를 바 없는 태양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1월 1일이면 괜히 일출이 보고 싶어 진다. 

'해맞이 명소'라고 하는 곳까지 굳이 차를 타고 갈 정성은 없고, 청주로 이사하면서 살게 된 집에서 부모산 입구까지 걸어서 5분 거리길래 겸사겸사 산에 오르게 됐다.(정상까지 30분 밖에 안 걸린다. ^^;)

전날 보신각 타종행사까지 챙겨보고 자면 일찍 일어나는 게 여간힘 든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새해 버프라는 것이 있어서 어떻게든 꾸역꾸역  일어나게 된다. 

올해는 서울 엄마 집에서 새해를 맞이했는데 엄마집도 백련산 입구 바로 앞이라 3년 연속 나 홀로 일출보기를 감행했다. 




New Year eve인 12월 31일은 온난화의 영향인지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날이 밝을 때는 남자 친구와 덕수궁을 산책하고 어두워진 후부터는 청계천과 광화문의 반짝이는 전시물들을 보기 위해 하염없이 걸어 다녔다. 



서울에 살 땐 주말에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아까우면 서울시청 홈페이지나 블로그만 검색해도 돈 안 들이고 슝~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는 행사들을 쉽게 찾을 수 있었는데, 청주 내려오고 나서는 갈만한 곳도 없거니와 간다고 해도 도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돌아오는 버스시간까지 신경 써야 하니 '그냥 집에서 유튜브나 보지 뭐.' 하며 잘 안나가게 된다.



손이 시린데도 자꾸 핸드폰 카메라를 켜게 만드는 예쁜 조명들과 만화주인공들을 모티브로 만든 조형물들을 보고 있자니 시민들을 위해 이런 큰 축제를 운영할 수 있는 기획력, 행사 준비를 위한 인력과 예산, 2시까지 지하철을 운행하는 배려. 서울에 살 땐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들이 '정말 고마운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신각에서는 신년 행사를 위한 리허설이 한창이었고 기대한 만큼은 아니었지만 광화문의 미디어파사드까지 챙겨보고 맥주 한잔하고 집에 들어오니 새벽 1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 엄마는 배우 최수종이 대상을 수상하는 장면을 보고 계셨다.

이번에 연예대상을 받은 탁재훈과 연기대상을 받은 최수종은 방송계에서 멀어졌다가 다시 대상을 받았다는 점에서 계속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유재석보다도 더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본인들 스스로 얼마나 부담스럽고 힘든 시간을 보냈을까 싶어서 진심으로 축하하는 마음이 들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얼굴들이 그렇게 없나? 싶기도 했고. ㅋㅋ


남이야 대상을 받든 말든 난 빨리 자야 한다. 1월 1일 응암동 일출 시간을 검색하니 7시 43분. 해가 늦게 떠서  그나마 다행이다. 7시 10분에 알람을 맞추고 내일 바로 입고 나갈 수 있게 옷, 모자, 목도리 등을 고이 개어 머리맡에 두고 바로 잠들었다.

 




다음날 알람이 울리자마자 고양이 세수만 하고 모자 푹 뒤집어쓴 채 집을 나섰다. 날씨도 춥지 않고 계속 걸으니 열이 나서 털모자는 이내 짐이 되어 손에 들렸다. 괜히 갖고 왔네. 

난 목표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가고 구경하는 건 좋아하는데 올라갔다 다시 그 길로 내려오는 등산은 도대체 왜 하는지 이해를 잘 못하는 사람이라 평소 등산을 잘 안 해서 그런지 얼마 가지 않아 숨이 차올랐다. 그래도 두근거리는 심장과 상쾌한 바람, 아침 일찍 등산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 기특해서 기분이 좋다.



산 길을 걷는데 햇볕이 잘 들지 않는 쪽은 이틀 전에 내린 눈이 다 녹지 않아서 한겨울이고 반대편은 낙엽이 떨어져 있어 늦가을처럼 느껴졌다. 그 사잇길로 지나가는데 두 계절의 경계선을 걷고 있는 듯해서 신비롭고 재밌는 인상을 받았다. 


30분이면 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8시가 되어서야 전망대에 도착했다.

다행히 아직 해는 올라오지 않은 상황이었다.

솔직히 2년 짬밥으로 구름 위로 올라오려면 어차피 일출 시간보다 조금 늦어도 괜찮다는 것쯤은 예상했다.

문제는 올해까지 3년 연속 해를 못 보고 있다는 것. 

오늘도 해가 뜰락 말락 하는 하늘만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새해 다짐을 하다가 발길을 돌렸다. 





돌아 올때는 아까 온 길과 다른 길로 가고 싶어서 좀 크게 돌았다. 그러다 내려오는 길을 찾았는데 정말 가파른 오솔길인 것이다. 낙엽 위에 눈이 쌓여 다 녹지 않은 상황이라 미끄러워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딛기가 쉽지 않았다.

내 앞에는 아이넷과 부모님. 총 6명이 이 길이 맞는지에 대해 시끌시끌 실랑이하며 내려가고 있었다. 앞에 가던 꼬마가 뒤를 돌아보며 나에게 이게 진짜 길이 맞냐고 물었다.

"저도 오늘 처음이라... 표지판이 있는 거 보니 맞긴 맞는 거 같아요." 

나 역시 그대들을 따라 내려왔다는 말은 삼켰다.


가장 첫째는 초등학교 4학년쯤 되어 보이고 가장 막내는 한 5살쯤으로 보이는 꼬맹이었다. 막둥이는 아빠의 보호아래 제일 앞에 있었고 엄마는 여긴 길이 아니라고 다시 올라가자는 첫째에게 이제 와서 올라가는 건 더 힘들다고 발에 힘주면서 내려오면 괜찮다며 연신 다독이고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둘째, 셋째는 맨 뒤에 일렬로 서서(나란히 설 공간도 없을 만큼 좁았다.) 서로 손을 잡아 주며 내려가고 있었다. 아니 이렇게 친한 남매가 세상에 존재한단 말인가? 

속으로는 손을 놓고 가야 덜 넘어질 것 같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너무 흐뭇해서 바라만 보고 있었다. 

미끄럽기도 하고 아이들의 걷는 속도가 느리다 보니 답답한 마음도 들었지만, 일단 추월할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정말 겨우 한 명 설 만한 길에서 비켜줄 공간도 없고 나 역시도 너무 미끄러워서 6명을 추월할 만한 속도를 내기도 어려웠다. 애매하게 가족들 사이에 껴 있으면 더 뻘쭘할 테니 그냥 이 가족의 일원이라도 된 듯 바짝 붙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내려오는 수밖에 없었다.


10분가량을 그렇게 하나 되어(?) 내려오면서 나는 3번 미끄러져서 엉덩방아를 찧었고 "아이들은 괜찮으세요?" 라며 나를 걱정해 줬다. 아이들은 본인들도 계속 넘어지면서 틈틈이 맨 뒤에 오는 내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듯 쳐다보면서 내려갔다. 아이들이 보호해주는 듯한 그 눈길이 너무 사랑스럽고 따뜻해서 떡국 한 사발 들이킨 것 같은 훈훈함이 느껴졌다.


그렇게 무사히 내려왔다. 해는 보지 못했지만 시작이 좋다. 

올해도 혼자가 좋다고만 외치지 말고 좋은 사람들과 좋은 시간 많이 가져야지. 그리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 의지가 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모두 Happy New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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