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X세대의 여행산문집 사서고생기(2015, 스페인)
스페인 남부 그라나다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인 알함브라 궁전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바르셀로나에서 그라나다까지 가는 방법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리는 야간열차를 이용하기로 했다.(지금은 야간열차는 없어지고 대부분 비행기를 이용한다고 한다)
야간열차는 이동 시간과 숙박비를 동시에 아낄 수 있어 내가 좋아하는 이동수단인데 무슨 일인지 기차가 정시에 출발해서 중간에 멈춘 것도 아닌데 2시간이나 연착이 되어 10시간 만에 그라나다에 도착했다.
기차역을 나오니 고생했다는 듯, 도시는 파란 하늘과 쨍한 날씨로 우리를 맞이했다. 다행히 알함브라 궁을 오후 시간대에 예약해서 숙소에 짐을 맡기고 여유롭게 점심 겸 낮술을 먹으러 이동했다.
우리의 낮술 장소는 '로스 디아만테스'라는 꽤 유명한 곳으로 타파스 바였다.
타파스란 간식, 작은 접시등을 의미하는데 이곳은 가격은 타파스인데 양은 전혀 타파스 같지 않은 혜자스러운 곳으로 유명하다. 갓 튀긴 튀김은 또 어찌나 맛있던지 두 명이 음식 5개를 시켜서 맥주랑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친 후, 진짜 이곳에 온 목적인 알함브라 궁으로 향했다.
알함브라라는 말은 아랍어로 ‘붉은색’을 뜻한다. 햇빛이 비치면 성벽이 붉게 보인다고 하는데..
그건 원래 벽돌색 아닌가? ㅋㅋㅋ
아무튼 인원제한이 있어서 성수기에는 일주일 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고 해서 여행 오기 전에 남자친구에게 예약을 해달라고 부탁했었는데 막상 발권을 하려고 보기 예약이 안되어 있단다.
에?
이거 보려고 기차 타고 10시간을... 왔..는..데..
카드번호도 다 입력했다고 하는데 예약이 안되어 있다니...
내 추측으로는 영어 사이트다 보니 마지막 단계에서 확인 버튼 같은 걸 모르고 안 누른 것 같다.
미안해서 어쩔줄 모르는 남자친구에게 화를 낼 수도 없고 '아무리 그래도 결재 알람이 안 왔는데 확인도 안 해봤냐'고 따져 묻고 싶은걸 꾹 참으며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 그럴 수 있다.'
'그래... 그럴 수 있다.'
'그래... 그럴 수 있다.'
'그럴 수 있나?'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잠깐 마음 다스림의 시간을 보내고 성벽 주위와 입구 밖에 있는 작은 박물관만 둘러보고 나왔다.
허무했다. 남은 시간은 어떻게 보내면 좋을지 가이드 북을 뒤져 건너편 그라나다 성이 보이는 알바이신 언덕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서 보이는 붉은 성이 파란 하늘과 어우러져 웅장해 보였다.
우린 전망대 난간에 앉아 한참을 바라봤다. 뭐.. 딱히 할 일도 없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지금 저 안에 있어야 하는데..." 라며 남자친구를 타박하기도 하고 이어폰을 나눠 끼고 노래를 듣기도 했다. 이 시간이 참 좋았다.
'아마 이 땡볕에 궁전을 돌아다니는 것보다 더 평화롭고 행복한 시간일 수 있어.'라는 생각이 들었을 만큼.
올라올 때는 버스를 탔지만 내려갈 때는 골목길로 설렁설렁 걸어서 내려왔다. 길 끝에 광장이 나타났고 잠시 쉬어갈 겸 노천카페에 들어갔는데 이게 웬 떡이냐 내 코앞에서 플라멩코 남, 녀 두 무용수가 주섬주섬 발판을 꺼내 바닥에 깔고 플라멩코 버스킹을 하는 것이었다. 바르셀로나에서도 한번 보긴 했지만 바로 앞에서 보니 눈을 뗄 수 없이 매혹적이었다.
플라멩코는 집시들의 애환을 춤으로 승화한 거라고 하는데 시크한 표정과 절도 있는 손동작에 홀딱 반해 버렸다. 이 날 플라멩코에 꽂혀서 캐스터네츠도 하나 사 오고 서울 와서도 플라멩코 배우러 가기도 했었다. 딱 한 번이었지만...
예상치 못했던 시련(?)이 있었지만 덕분에 더 멋진 풍경을 볼 수 있었고 플라멩코를 바로 앞에서 감상할 수 있는 행운을 얻을 수 있었다. "누구 때문에 10시간 기차 타고 가서 정작 보지도 못했다."라는 10년째 우려먹고 있는 놀잇감을 갖게 된 것도 큰 수확이었다.
분 단위까지 계획해 놔야 마음이 놓이는 J형 인간이지만 그렇기에 여행에서의 우연은 더 많은 추억거리가 되어 돌아오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