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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Nov 11. 2024

웃을 수 있다는 것은

다섯 번째, 캄보디아 해외봉사

 내가 대학교를 다니면서 제일 잘했던 걸 꼽으라면 해외봉사를 갔던 거라고 할 수 있다. 그때는 멋모르고 학교봉사활동단체에 속해져 있었던 터라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되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잘했다-싶다.

 가기 전엔 해외봉사라는 게 뭘까, 말만 들었지 진짜 오지를 가는 걸까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싶었다.

 우리가 갔던 곳은 이미 한인분들이 가서 학교를 세우고, 아이들을 좋은 퀄리티의 교육으로 양육하고 계신 곳이었어서 예상보다도 어렵지 않았다. 아이들은 깨끗한 교복을 입고 있었고, 밝았다.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교문을 열고 들어가니 수업하던 아이들이 와-! 함성 지르며 웃으며 뛰어와 우리에게 안겼다. 

 어쩌면 내 선입견일 수도 있겠다. 아이들은 너무나 해맑았다. 그렇구나, 이곳의 아이들은 알지 못하는 게 많아 어쩌면 더 밝을 수도 있겠구나. 마치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방글라데시처럼. 우린 대화가 통하진 않았지만 손짓발짓으로 충분히 소통이 가능했다. 특히 목에 걸려있던 카메라가 인기였다!


 아이들은 나에게 우르르 달려와 카메라를 가리키곤 그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자신들의 모습이 화면에 담기는 걸 보고 어찌나 좋아하던지. 서로 친한 친구들을 끌고 와 줄을 서고 난리도 아니었다.

 아이들이 얼굴을 들이대는 통에 본의 아니게 얼굴을 큼지막하게 찍을 수밖에 없었는데, 숙소에서 사진을 다시 돌아보다가 문득 결심했다.

 언젠가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아이들의 눈동자 사진을 찍고 싶다고. 너무 투명하고 예뻐서, 삶의 고락에 상관없이 눈만을 집중해서 담아내고 싶다.

 며칠간 우리는 한국에서 각자 팀을 이뤄 준비해 온 수업을 했다. 태권도도 가르쳤고, 줄넘기도 알려줬다. 노래도 했고, 함께 훌라후프도 했다.

 점심시간엔 우리는 옆으로 조금 걸어가면 있는 현지 학교에도 방문을 하게 되었는데, 가서 기타를 치며 노래도 부르고 간식 같은 걸 나눠주었던 것 같다.

 또 배를 타고 가면 메콩강으로 이어지는 한가운데에 뗏목으로 집을 띄워 살고 있는 난민들이 있었는데, 이들에게 가서 빵을 나눠주는 활동도 했었다. 

 내가 굳이 이 두 가지 활동을 꺼내어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때가 진정한 봉사시간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 저 두 활동을 하며 더 많은 인원의 아이들을 마주쳤지만 누구도 웃는 아이들을 본 적이 없었다. 

 이게 정말로 충격이었는데, 나는 어쩌면 당연히 우리가 온 곳의 아이들처럼 인사만 건네도 꺄르르 웃으며 달려올 것이라 생각했다.




 다른 현지 아이들은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하고 있었으며, 어느 정도 교육과 도움을 받은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의 눈빛은 정반대로 달랐다. 학교라고 이름 붙인 뗏목 위 앉아있던 아이들의 그 눈빛들은 뭐였을까. 현지 분들의 가이드 아래 우리는 움직이지 않고 배에 탄 채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경계라기보단 그저 자신의 눈앞에 와있는 사람들이 왔다갈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것 같았다. 참, 복잡한 눈빛이었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지금까지의 내 삶의 지층을 보았을 때 말로 표현할 수 있는 한계였다. 더 나이를 먹은 어른으로서 가지는 감정이었을까.) 눈을 내리깔고 배가 지나가기를, 이 시간이 끝나길 기다렸다.

 아이들이 웃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봉사의 의미가 다 된 거 아니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간 학교뿐만 아니라 현지 아이들과 뗏목 위의 그 아이들도 수많은 손길이 닿으면 언젠간 햇살처럼 환하게 웃을 수 있지 않을까. 그걸 위해 우리는 봉사를 가는 거라고, 그렇게 정의했다.

 실제로 우리가 있는 지역은 위험한 지역이었고, 싼 가격을 위해 그 동네의 민박집에 머물렀던 우리는 동네 건달이라 부르는 청년들에게 숙소를 털렸다. 이게 털렸다고 표현하는 게 맞나 싶은데, 돈도 비싸 보이는 짐도 다 가져갔으니 맞겠지 뭐.

 우리는 밤마다 여자들끼리 같은 방에 모여 문을 잠그고 캐리어를 문 앞에 잔뜩 쌓아두고 잤다. 

 함께 간 우리 봉사센터 어른들은 복도에 앉아 밤에 주무시지도 않고 릴레이로 우리를 지키셨다.

 우리는 숙소를 나갈 때마다 입구 앞에서 오토바이에 모여 히죽거리는 이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기억이 미화되는 건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별일이 없었기에 괜찮았던 것 같다-고 말할 수 있겠다만,

 그때는 정말 다섯 명이 한 침대에 끼여 누워 캄보디아의 뉴스를 찾아보고 난리도 아니었다! 하하

 겁을 잔뜩 먹었던 게지. 다들 여행만 다니다 이런 곳은 처음이었을 테니까.

 여기엔 깨끗한 숙소도, 맛있는 밥도, 멋진 풍경이나 쾌적한 공간도 없었다. 그게 해외봉사였다.

 내가 했던 경험들이 결코 힘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딱 대학생이 할 수 있는 만큼이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그 속에서 배워온 것은 행한 것보다 얻은 것들이 몇 배로 값진 것들이었다. 아이들의 순수한 웃음과 공허의 눈빛이 무지에서 비롯된 범법행위들이 내가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시각을 교정해 주는 시간이었다. 교육에 관해 국가적으로도 큰 상처가 있는 나라임을 안다. 그 나라에서 자라나는 새싹인 아이들에게 양질의 교육은 다시금 아이들에게 순수한 웃음을 찾아 주는 것 아닐까 어림짐작해 본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그 아이들이 집에 돌아가 만날 그 가족들에게까지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언제나 함께하기를. 먼 나라에서 겨우 눈인사 한 번 맞춘 이가 오늘도 기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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