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의 편지] 이야기 여섯
당신은 사랑과 연민은 다르다고 했었지. 그리고 나를 볼 때 당신에게 남은 게 있다면 이젠 연민일 거라고. 하지만 연민이랑 사랑은 반드시 같지는 않더라도 말하자면 안개랑 비 같은 거야. 사랑이 안타까울수록 연민이랑 가까워져. 비가 가능한 많은 곳에 흩뿌려지려고 할수록 안개가 짙어지는 것처럼.
그러니까 만약 당신에게 사랑이 이미 사라지고 없는 거라면 내게 연민을 느낀다는 당신의 말은 거짓말이겠지. 빗방울도 없이 낀 안갯속에서는 우린 하루도 버티지 못할 테니까.
이 년 전 여름으로부터.
약을 먹기 시작한 지도 벌써 이십삼 일째다. 자해가 멈췄고 심장에 벽돌을 올려놓은 것 같은 끔찍한 기분도 한결 가라앉았어. 그리고 엊그제에는 방문에 매달아 놓았던 팔이 긴 티셔츠를 다시 끌어내렸어.
세탁기가 내 자살의 실태를 요란하게 쓸어간다.
하지만 깨끗하게 빨아진 티셔츠는 매듭지어졌던 찰나의 생애를 잊지 않았어. 내가 마음 먹을 때마다 막다른 길에 다다랐던 그 찬란한 생애의 끝을.
혀가 길게 빼물리는 상상도 이제는 그렇게 자주 하지 않는다. 축 늘어진 팔다리와 흔들리는 문틀도. 하지만 망각된 건 아니야. 날마다 먹는 약이. 그리고 잠들지 못하는 새벽이. 그걸 상기시켜. 죽음의 꿈은 되살아나고 나는 기쁨과 슬픔을 분간하지 않는다.
모든 게 하나가 돼서 나를 티셔츠의 품 안으로 데려가. 쉼 없이 덜컹거리는 불완전한 피안 속으로.
화가 자주 났었어. 문득 치미는 울분에 온몸이 휩싸이는 작열. 입밖으로 쌍욕을 내뱉지 않으면 없어지지 않는 돌덩이 같은 열기가 늘 나를 짓눌렀다. 그런데 이젠 화가 나면 머리가 알아채기도 전에 심장이 아파. 의사가 왜 혈압약을 처방했는지 알 것 같았어. 심장이 너무 아파서 화가 났다는 생각은 잊게 돼. 그리고 화는 분출되지 못하고 심장 너머에 쌓여가. 그건 잘된 일일까. 아직은 잘 모르겠어.
어젯밤에는 끊임없이 화를 내는 꿈을 꿨어. 꿈에서는 심장이 아프지 않더군. 그래서 엉망진창이 될 때까지 화를 내다가 잠에서 깼어. 몇 번씩이나. 내가 그렇게 화를 내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이었는지 이때까지는 몰랐었다. 그리고 아침이 되니까 다시 심장이 아프고 숨이 막혀온다.
결국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어. 그런 것 같아.
변한 거라곤 방문에 매달렸던 팔이 긴 티셔츠가 마침내 내 몸속으로 들어왔다는 것뿐이겠지.
이 년 전 여름으로부터.
추신.
인연을 맺게 되는 남자가 생길 때마다 나는 번번이 그에게서 내 어머니와 닮은 점을 찾아내곤 했다. 내가 안아달라고 팔을 뻗을 때마다 음식에서 바퀴벌레를 본 사람처럼 미간을 찡그리며 등을 보이던 내 어머니. 그럼에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그 어머니를.
그 어떤 남자를 봐도 아버지가 떠오르지는 않는다는 건 조금 신기한 일이긴 했다. 분명 내 어린 시절에서 그가 차지한 부분도 작지는 않았을 텐데. 하지만 그가 나를 인형으로 안 만큼 결국은 나도 그를 인형으로 알며 그 시간들을 보낸 것 같다. 그것이 아니라면 달리 설명되지 않는다. 어쨌거나 나는 받은 만큼 되갚아주는 데에는 늘 그렇듯 철저했으니까. 아버지는 그저 집에서 부수는 게 좀 많은 인형이었다. 그렇게 부수고 부수다가 언젠가 자기 스스로도 부숴버릴 것이 너무도 자명한. 그래서 좀 성의 없게 규정해도 되는. 반면에 어머니는 어쨌거나 살아있었다. 살아서 나를 사랑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살아있는 것은 언제나 복잡하다. 살아있는 것이 하는 사랑 혹은 하지 않는 사랑 역시 그렇다.
그리고 사실 나는 언제나 사랑한다는 말보다 미안하다는 말이 더 듣고 싶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연애는 확실히 달랐다. 물론 나는 그때까지도 연애의 경험이 없었지만 친구들을 보면 그랬다. 초등학생의 연애는 기껏해야 같이 손을 잡고 걸어가거나 구석에서 어른들이 하는 짓거리를 잠깐 흉내 내다가 마는 수준이지만 중학교로 올라가면 이 모든 게 한순간에 난투극으로 변한다. 온 교실에 울려퍼지는 처절한 울음소리. 공용화장실의 세면대에서 씻겨 내려가는 혈흔. 아. 남자애와 여자애가 만나는 일이란 이다지도 귀찮은 일이로구나. 나는 저런 거 하지 말아야지. 딱 그만큼의 거리감이 들 만한 전장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 직접 싸우는 역할로 뛰어들기엔 나는 어떤 면에서도 부적합한 인간으로 보였다.
한 번도 받아준 적이 없음에도 분기마다 한 번씩 들어오는 고백은 나중에는 그저 연례행사처럼 여기고 말았던 것 같다. 나뿐만이 아니라 주변의 다른 애들도 사정은 다 비슷했다. 여고라는 게 뭔지도 모를 만큼 남녀공학이 당연한 세대였기 때문에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누구든 숨만 붙어 있다면 고백을 받았다. 다만 여타 친구들과 내가 달랐던 건 그것에 수반되는 고민의 크기였다. 나는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애에게서 온 러브레터 때문에 사귈까 말까 하루에도 열 번씩 마음이 흔들린다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미칠 지경이었다. 안 좋아한다면서. 응. 그럼 사귀지 마. 근데 그러면 너무 미안하잖아. 매사 그런 식이었다. 좌우간 내가 나를 좋아해 달라고 협박을 한 것도 아니고 칼로 위협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지가 멋대로 좋아하고 멋대로 고백한 건데 대체 왜 그걸 거절하면서 내가 미안해야 하는 건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도저히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불평하곤 했다. 유독 연애를 자주 하던 한 친한 친구는 그런 나에게 무혈한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피가 차가운 것을 넘어 아예 없을 것 같다는 뜻이었다. 나는 이 또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좋아하는 남자애가 없는 건 아니었다. 분기마다는 아니더라도 학기마다 한 명씩은 있었던 것 같다. 단지 사귀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은 스스로 용납하지 않았을 뿐이다. 어쩌다가 그 애도 나를 좋아하는 것 같으면 괜히 이러다 또 고백을 받을까 겁이 나서 애써 더 무심한 척 피하고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중학교 삼 년을 꼬박 보내자 나는 이내 피 없는 무혈한에서 인외의 신선으로 격상되는 명예를 얻기에 이르렀다. 반쯤은 존경이 또 반쯤은 경멸이 담긴 묘한 별명이었다. 틀림없이 무성애자일 거라는 소문도 왕왕 도는 듯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상대와의 아무런 교집합 없는 짝사랑을 제외한 어떤 다른 행위도 할 수 없는 사람이다. 군대로 치면 무조건 면제 대상이다. 그게 당연하고 마땅하고 이치에 맞는 거라고 믿었고 그런 믿음으로 나 자신을 세뇌했다. 그렇게 아무에게도 미안하지 않은 채로 그저 무사히 지나가면 그것으로 만족스러웠다. 그거면 나는 충분하니까. 나는 어떻게 해도 그런 인간일 뿐인 것이다.
폭풍과 조우하듯 이십 대가 되었다. 무성애자가 아니라는 걸 반드시 증명하라는 하늘의 계시인 양 말도 안 되는 계기로 첫 연애의 물꼬를 트게 되었다. 내 애인으로 불리게 된 남자에게서 내 어머니의 모습을 겹쳐보고 있었다. 이 모든 게 난투극처럼 순식간에 그러면서도 처절하게 이루어지는 걸 나는 뜬눈으로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가끔은 헛웃음이 났던 것도 같다. 내가 그간에 그토록 집착했던 것의 대가란 결국 겨우 십 년짜리 유예에 불과했던 것이다. 타협이라곤 없던 불완전 협정은 그다지도 시시하게 끝을 맺어버렸다.
첫 연애에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미안하다는 말을 많이 했다. 그리고 많이 들었다. 미안함이라는 그 단어는 거의 견우와 직녀를 이어주는 까마귀 떼와 같았다. 미안함이 없이는 우리는 단 하루도 서로를 사랑할 수 없었다. 나에게 어울리는 연애 같기는 했다. 다만 애인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그게 좀 미안했다. 그렇게 계속 미안하기만 하다가 물방울이 쌓여 강을 이루듯 일 년이 넘게 이어진 그 우문우답은 어느 날 문득 찰나의 마지막을 예견하듯 지지하게 풀어져 힘을 잃고는 감정의 파고 앞에서 고꾸라졌다. 그것이 우리에게 차라리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을 것이다. 서로에게 작별을 고하며 등을 돌리던 우리의 눈빛은 어쩌면 우리가 처음 만나기 전의 그것보다도 훨씬 더 형형했을 만큼이나.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중에 그가 가장 내 어머니와 가깝게 도달한 지점은 그와 내가 내 진료를 위해 정신과에 함께 손을 잡고 가던 그 순간의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나는 병원에 가는 나와 동행하는 일이 자기에게는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하는 행위인 것처럼 굳게 믿고 있는 듯한 애인의 옆얼굴을 보며 그로부터 내 어머니의 미간을 떠올렸다. 그제서야 확신했다. 이 사람은 정말이지 어머니와 닮았구나. 그래서 진심으로는 나를 사랑하지 않겠구나라는 걸.
그리고 그건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라는 사실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나는 너무도 잘 이해할 수가 있었다.
초등학교에도 들어가기 전의 나이에 오른손 손가락 네 개가 부러진 적이 있었다. 그때도 나는 병원의 그 진료실에 앉아 선명하게 끊어진 뼈마디들의 눈부시게 하얀 엑스레이 사진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이번에야말로 어머니에게서 미안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아 기뻤다. 몇 달간 어깨까지 동여매 깁스를 하고 다녀야 한다는 사실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나는 그 말만을 너무도 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병원을 나서며 나는 조그만 목소리로 어머니에게 물었다. 나한테 미안하지 않나요. 나 엄마가 세게 닫은 자동차 문 때문에 손가락이 네 개가 부러졌어요.
그날 어머니는 미간에 한가득 힘을 주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왜 너한테 미안해야 하냐고. 내가 일부러 니 손을 부러뜨리려고 그런 것도 아니고 하필 차 문을 닫는데 니가 빨리 내리지도 않고 굼뜨게 움직여서 거기에 끼인 것뿐이지 않냐고. 그걸 왜 내 탓을 하냐고. 왜 그런 걸로 내가 너한테 미안해야 하냐고. 그게 왜 나 때문이냐고. 꼭 지 애비새끼 닮아서 뭐든 나 때문이라고만 한다고. 참 내. 그깟 손가락 가지고.
그 이후로 나는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내 오른손을 눈앞으로 들어올렸다. 한 번 부러졌다 붙은 것은 다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손가락의 주름들은 어색한 모양으로 변형된 채 그대로 굳어져 있다. 그 기괴해 보이는 모습이 나는 차라리 좋았다. 이 정도면 면제될 만하잖아. 쓸데없는 기대는 갖지 말자고. 사랑이란 건 어차피 손가락 네 개의 값어치조차도 되지 않는 일이다. 다치거나 병든 사람을 병원에 데리고 가는 시간조차 아까워할 만큼. 그 정도의 희생조차 거부하고 싶을 만큼 한없이 무가치한 일.
그것이 내가 배운 최초의 사랑이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그 모습 그대로 굳어져 어느덧 이토록 장대한 역사가 되어간다. 외면하려고도 노력해 봤고 벗어나려고도 발버둥도 쳐봤지만 결국 종착지는 언제나 이 마음속에 있다. 그래. 차리리 팥으로 메주를 쑨다면 믿겠다. 그러나 사랑이라 함은. 차라리 철저하게 입을 틀어막고 숨어 지내던 그 어린 시절의 신념에 승기를 쥐여줄 정도로 아득히 먼 신기루인 것만 같다. 그 누구도 아닌 내가 그런 사람일 뿐인 이유다. 다른 근거는 필요하지도 존재하지도 않을.
평생 단 한 사람도 진심으로 믿으며 사랑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라고 하는 이도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다.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인간을 사랑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를 모르는 이라면 필히 그럴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만 한없이 열려있는 세상이. 이따금씩은 아프지만 아무려나 그런대로 견딜 만하다. 이것은 그저 끝이 없는 양극단의 사이로 아득히 침전하는 덫에 걸린 비루한 청춘밖엔 아니다. 아무리 흘러도 고임을 멈추지 않는 파국. 나의 푸른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