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르시시스트에게서 도망친 임상심리사입니다.
또 전화벨이 울린다. 이제는 받아야한다.
"응"
[어디야? 왜 이렇게 늦게 받아?]
"친구 집이야"
[집에 언제 갈 건데?]
"10시쯤 갈 거야"
[10시? 그렇게 늦게?... 알았어]
"응"
[10시에 나가는 거야? 집에 도착하는 거야?]
"10시에 나갈 거야"
[음... 알았어 그럼 딱 10시에 전화할게]
"응"
통화가 끝나자 친구는 의심의 눈초리를 하고 물어본다.
- 누구야?
"나르시시스트"
친구는 한숨을 쉰다.
- 또 찾아왔어? 왜 그렇게 못 헤어져?
"헤어지는 건 불가능해. 나는 지금 도망치는 중이야."
나와 나의 나르시시스트의 러닝타임은 총 1년 10개월이다. 처음 6개월은 종종 통화하고, 가끔 만나서 커피 한잔, 밥 한 끼 하는 정도의 지인이었다. 그 후 한 달 정도 썸을 타고 연인이 되었다. 그렇게 사귄 지 딱 한 달이 되었을 때 나는 헤어지자고 말했고, 나머지 1년 2개월 동안은 도망쳤다. 어느 연애처럼 이별이 아쉬워 헤어지는 과정이 오래 걸렸다고 말하고 싶지만, 이건 도망이다.
나는 더 빨리 도망칠 수 있었다. 어쩌면 도망이 아니라 보통의 이별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처음 헤어지기로 결심했을 때는 나르시시스트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연인 되고 처음 2주와는 다르게 잦은 트러블이 생겼고 소통이 전혀 되지 않았다. 누가 맞고 틀리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는 감당할 수 없는 관계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별을 결정을 했다.
그때 말이야 어떤 말과 행동에도 흔들리지 않았다면,
도망이 아니라 이별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나르시시스트는 이별한 다음 날 집 앞으로 찾아왔다. 우리는 길고 긴 대화를 했고 끝내 나는 설득당했다. 그동안 전혀 통하지 않는다고 느꼈던 대화가 이렇게 잘 된다는 게 신기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에게 바라는 건 그저 관심과 사랑인데 나의 공감력과 표현력이 부족했구나 생각했다. 나르시시스트 설득에 다 수긍할 수 있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세상에 완전히 똑같은 사람은 없지. 우리는 다른 사람이니까 부딪치고 싸우면서 조금씩 맞춰지는 거지. 헤어지자고 해서 미안해" 나의 사과를 끝으로 해피엔딩인 줄 알았다. 나는 얼마 안 가 우리가 다른 게 아니라 내가 틀린 거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것을 '후버링'이라고 부른다. '후버링'은 '다시 끌어들이다'는 의미로 [HOOVER]라는 진공청소기 회사 이름에서 가져온 용어이다. 자신을 벗어나려는 상대방을 다시 자신의 통제권 안에 넣어 두려고 하는 일종의 매달리는 행위이다. '후버링'은 상황과 상대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말 그대로 매달리기도 하며, 무작정 떼를 쓰기도 한다. 또 회유, 반성, 다짐, 약속과 같은 설득하는 방법도 있다. 협박이나 죄책감, 동정심 유발 같은 감정을 자극하기도 한다. 보통은 이것들이 혼합되어 있거나 하나씩 돌아가며 사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첫 후버링은 매우 중요하다. 후버링 성공 경험을 통해서 상대방의 취약점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상대의 어떤 부분을 건드려야 마음이 약해지는지 설득당하는 포인트는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학습한다. 그리고 상대방가 자신을 떠날 것 같은 상황에서 본능적으로 사용한다.
나의 약점은 자부심이라고 생각했던 임상심리사라는 직업적 성향이었다. 임상심리사나 심리상담사들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이해하고 수용하는 범위가 넓어야 한다. 내담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수용과 공감적 이해 몸에 배도록 배우고 훈련받는다. 또 하나는 심리적인 문제에 대해서 거부감이 없다. 머릿속에 '그럴 수 있지'가 항상 깔려있고 왜 그런지를 자동적으로 분석하게 세팅되어 있다.
나의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의 심리적 문제에 대해서 나에게 말했다. 어린 시절에 외롭고 힘들었던 일, 애착 대상에게 느껴지는 불안감, 혼자 있을 때 느껴지는 공허함, 완벽하고 싶은 강박 등을 고백했다. 나에게 관심과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 같아서 불안해서 그랬다고 했다. 이 부분에서 '응? 나르시시스트가?' 이런 생각을 한다면 그건 오해이다. 일반적인 사람이 저렇게 말했다면 용기 있는 고백이다. 나르시시스트가 했다면 저 또한 '특별한 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나는 자주 언급 하겠지만, 겉으로 보이는 말과, 행동만으로 나르시시스트를 알 수 없다. 우리는 말과 행동이 항상 늘 거만하고, 잘난 척하는 이기적인 모습이 한눈에 티 나지 않는 나르시시스트를 만날 확률이 더 높다.
그렇게 난 첫 후버링에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