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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낫띵nothing Oct 27. 2024

<나도임>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

나는 나르시시스트에게서 도망친 임상심리사입니다. 

나는 나르시시스트 영상을 보고 친구에게 바로 이 사실을 전했다. 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믿을만한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있었던 일과 나르시시스트에 대해서 알려줬다. 한두 번의 대화로 끝나지 않았다. 친구는 나르시시스트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될 때마다 나와 대화를 해주었다. 


"근데 나르시시스트가 아니면 어떻게 하지?"

- 아니라고 생각해?

"아닐 수도 있잖아."

-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은 거 아니고?

"알면 알수록 더 헷갈려. 오히려 내가 나르시시스트 같기도 하고..."

- 야! 나르시시스트고 나발이고 난 모르겠고, 나한테는 그냥 미친 X이야. 이제 나르시시스트 공부는 그만해. 그만하고 신경 꺼. 










알고 있다. 답은 정해져 있다. 이 관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나는 나의 나르시시스트를 구원할 수 없다. 스스로 달라지고 자 하는 내 환자가 아니다. 나의 연인이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관계로부터 나를 지키고 안전하게 도망치는 것뿐이다. 알고 있지만 인정하기 싫었다. 확신이 필요했다. 어쩌면 확신이라는 핑계로 시간을 끌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의 나르시시스트가 100% 나르시시스트라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병원에 심리 검사 보고서를 작성할 때도 확신하지 않는다. 100% 단정 짓지 않는다. '~할 수 있다. ~ 한 것으로 보인다.~ 유추할 수 있다'처럼 가능성으로만 진단해야 한다. 그러니까 확신이 아니라 머리로 아는 걸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했다. 


특히, 나르시시스트를 연인관계로 만나고 있는 내담자의 경우 상담에서 이 부분을 주기적으로 확인하고 싶어 한다. 지금 당장 인터넷에 접속해 '나르시시스트의 특징'을 검색 보아라. 적게는 대여섯 가지 많게는 열 가지도 넘는 나르시시스트의 특징 목록이 있다. 그 특징 중에 딱 맞는 것도 있고 애매한 것도 있다. 심지어 '나도 이런 면이 있는데 나도 나르시시스트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 '미성숙한 사람의 특징, 당장 손절해야 하는 사람의 특징'을 검색해 보아라. 그 항목에도 나르시시스트에게 해당되는 부분들이 많고 나에게 해당되는 사항도 있다. 나르시시스트를 확신하기란 어렵다. 


나르시시스트는 스펙트럼으로 존재한다. 그 말은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뜻이다. 물론 자존감이 건강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명확하게 다르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으로 알 수 없다. 그저 유추할 뿐이다. 모든 기준은 본인 자신이 되어야 한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는 어느 선까지인가?'를 명확히 해야 한다. 감당할 수 없다고 해서 부족한 사람도 감당할 수 있다고 해서 대단한 사람도 아니다. 예를 들어 떡볶이를 먹을 때 나에게 맞는 맵기 정도는 몇 단계 인가 와 같다. '중간맛'을 먹는다고 '아주 매운맛'을 먹는 사람보다 못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사람을 확인하는 기준은 필요하다. 나르시시스트는 꽤 괜찮은 어른을 흉내 낼 수 있어도 절대 못하는 세 가지가 있다. 바로 1 일관성, 2 지속성, 3 언행일치이다. 기본적으로 나르시시스트는 겉으로 티가 나든 안 나든 유아적 전지전능한(나는 어떠한 사물이라도 잘 알고, 모든 일을 다 행할 수 있으며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 자아상을 가지고 이다. 즉, 스스로 예의 있고 배려하고 공감하는 괜찮은 어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실제로 그런 행동하기도 한다. 또 본인이 생각했을 때 자기 반성하고 자아 성찰하는 누군가 혹은 그런 장면을  보고 멋지다고 생각하면 자기 객관화를 한다. (그리고 자기는 그런 사람이라고 꼭 말해준다)


사과할 줄 알고 반성할 줄도 안다. 상대방을 위해서 자신의 불편을 기꺼이 감수하며 자신을 희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일회성 또는 단기성으로 끝난다. 좋아 보이는 인격을 흉내 내고 있기 때문에 지속하는 것은 힘들다. 짧으면 하루 길어봐야 한 달이다. 그리고 이런 모습에는 일관성이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보이고 싶을 때만 하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행동을 하는 자신이 스스로 멋있다고 느끼고 싶을 때 하는 행동이다. 그 모습이 진짜 자신이라면 일관성 있는 패턴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들은 일시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하기 때문에 일관성이 없다. 화를 내거나 분노하는 것도 일관성이 없다. '응? 갑자기? 뭐 때문에?'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자신의 기분에 따라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나온 분노이기 때문이다. 같은 상황에도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나르시시스트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기 어렵다. 말로는 세상을 구할 수도 있다. 그들은 실제 자신보다 훨씬 더 특별하고 대단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의 말은 과장되어 있다. 그러니 행동으로 옮기기 어렵다. 무엇이든 해줄 수 있을 것처럼 말하고 무엇이든 잘한다고 말한다. 스스로는 자신의 능력을 높게 평가하기 때문에 진심으로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할 수 있는 능력이 안 돼서 못하거나 아예 안 해 버린다. 여기서 좀 될 것 같아서 시도했는데 못하는 경우는 핑계를 대거나 남 탓을 한다. 




그래 남 탓, 그러니까 내 탓. 
내가 쓰레기가 되는 과정을 겪고 
드디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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