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르시시스트에게서 도망친 임상심리사입니다.
친구랑 대화를 하다가 오랜만에 나르시시스트 이야기가 나왔다.
- 최근에 찾아온 적 없지?
"응"
- 전화는?
"안 와. 이제 안 올 것 같은데"
- 과연 그럴까, 너 그 말 전에도 했어!
"솔직히 나한테 얻을 게 없잖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어."
- 얻을 거?
"나르시시스트는 감정적 이득이 중요해. 우월감을 얻든, 부정적인 감정을 떠넘겨야 하는데 나는 받아주는 성격이 아니잖아. 우쭈쭈도 안 해주지. 리액션도 잘 안 하지. 틀린 건 곧 죽어도 틀렸다고 해야 하고, 팩트만 말하지. 편도 안 들어줘. 시비도 안 받아줘. 헛 소리하면 상대도 안 하지. 잘해주지도 않지 칭찬도 안 하지. 다정하게 대하지도 않지. 이 정도면 정서적 착취가 아예 안되는데 대체 왜 옆에 두려고 하는 거야?"
- 네가? 아닐걸? 그건 알고 나서야.
"어? 알고 나서?"
- 너무 초반이라서 까먹었나 본데, 너 되게 잘해줬어. 나르시시스트라는 걸 알기 전 까지는. 내가 알고 있는 너의 연애 중 제일 잘해줬던 것 같은데?
친구는 장난치듯이 말했지만 나는 진심으로 놀라 내 입을 틀어막았다.
"아..... 기억났다."
"1년 넘게 도망치면서 대처방법만 사용하다 보니까 난 원래 그랬다고 기억하고 있나 봐."
그렇게 첫 후버링에 넘어간 후 나는 더 노력하기로 했다. 나의 나르시시스트가 불안 애착 유형이라고 생각해서 불안감을 최소화시켜주려고 했다. 나는 매일 일정을 미리 알려줬다. 연락에도 많이 신경 썼다. 일 할 때를 제외하고는 함께 있었고 그러지 못할 경우는 항상 통화를 했다. 그 당시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었던 나는 나르시시스트의 생활 패턴에 자연스럽게 맞추게 되었다. 우리는 장거리였고, 시간의 여유가 있는 내가 가는 게 당연하게 되었다. 일이 없을 때는 하루종이 대신 운전을 해준다거나 나르시시스트의 일을 도와주기도 했다.
모든 상황을 나의 나르시시스트 입장에서 생각했다. 일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스트레스를 다 받아줬다. 매일 같이 누군가의 욕을 했다. 그러면 나는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방이 얼마나 잘못했는지 말해줘야 했다. 혹시나 나의 나르시시스트의 기분이 더 나빠지기 전에 내가 먼저 상대방을 욕 할 때도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하는 노력에 고마워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불안 애착은 둘째치고 왜 저렇게 분노가 많고 남 탓을 할까? 처음에는 분노와 남 탓의 대상이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었지만 곧 나도 포함되기 시작했다. 나르시시스트의 자잘한 지적과 시비에 해명하고 설명해야 할 상황들이 점점 늘어났다. 이건 대화로 맞춰가는 과정이 아니다. 대화에는 논리가 없다. 자기 말이 맞다고 떼쓰고 우기 세 살짜리 아이로 밖에 안보였다. 결국 내가 수긍하고 '알겠어'라고 해야 상황이 종료된다.
이런 일은 2주 동안 하루에도 두세 번씩 매일 같이 일어났다. 체감 상 반년 같은 2주를 보내고 우연히 나르시시스트와 관련된 영상을 보게 되었다. 나의 검색 알고리즘이 그 영상을 뜨게 한 것이다. 내가 검색한 키워드는 '불안애착유형, 대화 불가능, 남 탓'이다. 2주 동안 나는 틈만 나면 이 세 가지를 키워드를 검색했다. 그 영상에서 나의 답답했던 마음을 풀 실마리를 찾았다. 사실 언 듯 자기애성 인격장애는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지만 그냥 넘겨 버렸다. 진단기준에 완전히 부합하지 않았고, 좋아하는 사람을 그런 식으로 진단하고 싶지 않았다.
나르시시스트와 자기애성인격장애는 다르다. 정신 질환을 진단하기 위한 기준을 제시해 놓은 ‘DSM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매뉴얼)’ 전공 책이 있다. 여기에는 나르시시스트(Narcissist)라는 진단명은 없다. 우리가 흔히 나르시시스트라고 알고 있는 자기밖에 모르고 이기적이며, 타인을 무시하고 특권의식에 사로 잡혀 소위 ‘갑 질’ 하는 사람들은 DSM에 명시된 진단 기준 중 5개 이상 충족 되어야 자기애성 성격장애(Narcissistic personality Disorder)라고 진단할 수는 있다. 즉, 자기애성 인격 장애는 나르시시스트의 한 종류이지만 나르시시스트는 반드시 자기애성 인격 장애는 아니다.
그 영상을 본 이후로 나는 '나르시시스트'라는 키워드가 들어간 모든 자료를 찾아봤다. 전문가, 일반인 가리지 않고 책, 영상, 강의까지 최대한 많은 정보를 모으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재밌었다. 나의 지적 욕구가 자극되어 도파민이 터졌다. 유레카를 발견한 듯 눈이 반짝거렸다. 또 한편으로는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일관성 없는 행동과 말에 논리적인 판단을 하기 모호했기 때문이다. 또 남 탓만 하는 나르시시스트와의 대화에서는 '내가 문제 인가?' 하는 혼란스럽고 이해할 수 없었던 모든 것들이 설명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다시 답답했다. 나르시시스트가 정말 맞을까? 내심 아니길 바랐다. 머리로는 맞는 이유를 찾고 마음으로는 아닌 이유를 찾았다. 상담할 때 내담자들이 많이 보이는 반응이기도 하다. 처음에 상대방에 나르시시스트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의외로 기뻐한다. 이 기쁨은 즐거움이 아니다. 통쾌와 안도에 가깝다. 답이 없던 문제의 원을 찾았다는 안도감 그리고 내가 아닌 상대방의 잘못이라는 통쾌함이다. 이것도 잠시 다시 막막해한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