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층 얼음정수기의 기록

녹지 않는 절망의 결정

by 워터플랜트

작년 9월부터 시작된 무급휴직이 10개월째 이어지고 있었다. 모든 업무를 멈출 수는 없으니 필수인력만 출근을 하는 것으로 하되 전업으로는 생활할 수 없는 직원들은 아르바이트나 소일거리를 위한 시간을 조율하기 위해 시간선택제를 선택했다.


사무실은 나날이 조용해졌다. 키보드 소리도, 전화벨도, 심지어 누가 들락거리는 발소리도 드물었다. 직원들은 점차 섞을 말이 없어졌다. 무슨 드라마가 재밌더라, 예능이 잘 뽑혔더라는 말을 하자니 눈치가 없는 것 같고 '너는 살만한가 보다'는 말이 나올까 몸을 사렸다.


쪼그라든 입은 굳게 닫히고 출근은 지문을 찍기 위한 출석처럼 형식적이 되었다. 지문을 찍는다고 급여가 나올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설마의 그 언젠가를 위한 생각이었다.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는 무급휴직이라는 상태는 사람을 부유하게 만들었다. 현실에서 둥실-한 뼘 정도 발을 떼고 있는 기분이었다. 일거리가 없으니 나오는 직원들조차 반은 이력서를 쓰고 나머지는 자리를 비웠다.

그런데 7층, 복도 중앙에 남은 단 하나의 얼음정수기만이 이상하리만치 성실했다. 공용 카페에 있던 대여용 커피머신과 제빙기는 재정난이 시작되자마자 냉큼 사라졌고, 공용카페는 바로 폐쇄되었다.


그러나 이 얼음정수기만이 고장도 나지 않고 줄어드는 사람 수만큼 적게 뽑아도 항상 제 몫의 얼음을 내보냈다.

지난주, 얼음정수기 앞에 사람들이 모였다.

“그래도 정수기 대여료는 남아있나 봐. 여긴 왜 아직 얼음이 나올까?”

기온이 서서히 오르고 있는 탓에 만들어진 우연한 만남이었다. 나는 얼음을 뽑기 위해 무려 3층에서 올라갔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대충 눈치를 살피며 텀블러를 가져다 댔다.

“그런다고 아직 우리 회사가 살아있다고 볼 순 있는 걸까요?”

7층의 직원 하나가 덜그럭-툭 하고 얼음이 떨어지는 소리에 맞춘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래도 정수기가 돌아간다는 건 전기세는 내고 있다는 거고... 그 말은 아직 우리 회사, 완전히 죽진 않았단 뜻이 아니겠냐. "

이어지는 전기세가 한 달에 얼마라더란 말에, 웃음 같은 것이 흘렀다.


웃음이라기엔 희미했고 절망이라기엔 너무 순진했다.

한숨과 함께 텀블러를 들고 내려와 일과적인 회의에 참석했다. 특별한 주제가 있다거나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출근자 다섯 명은 회사가 정상적으로 돌아갔던 호시절 (好時節)을 잊지 못한 망령처럼 회의실 의자에 앉았다.


어쩌다 보니 팀장보다 상석에 앉아 어색해하던 직원이 말을 꺼냈다.

“지금 저희 팀도 말이에요. 뭐라도 해보면 안 되려나요? "

대답 없는 팀장의 얼굴만 흘끗거렸다. 자원봉사자도 아니고 무급이 일 년을 간당간당 채우려는 이 와중에 뭘 하냐는 낯빛이었다. 하지만 그날따라 회의는 여느 때와는 조금은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채널 구독자 리스트도 아직 살아 있어요.”

“SNS 채널도 정지된 건 아니죠? "

“고리짝이긴 한데 예전에 만든 후원 캠페인 콘텐츠, 지금 다시 꺼내봐도 꽤 괜찮을 것 같아요.”

그렇게 시작된 고작 다섯 명의 회의가 무려 1시간이나 이어진 날이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얼음정수기 앞에서 지친 기색이 역력한 팀장과 마주쳤다. 7층 본부에도 협조 요청을 했었다는 말로 물꼬를 튼 대화는 어제보다 조금 더 구체적이었으나 말투는 몹시도 무기력했다.

그렇게 이름도 없는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메신저에 단체방이 만들어졌다. 누군가는 웹사이트를 뒤적이며 동향을 정리했고, 누군가는 먼지가 쌓인 공문을 다시 다듬었다. 무급을 전제로 한 업무니만큼 쓸모없는 야근이나 피드백이 현저히 줄었다.

고작 회의 한 번에 후원이 쏟아진 것도 아니고, 인사평가의 줄을 틀어쥔 윗선이 잘했다며 칭찬을 해준 것도 없었다. 다만 근면성실한 정수기 앞의 대화에서 부끄러움이 조금은 줄었달까.

오늘은 누군가 A4용지 몇 장을 정수기 위에 올려두었다.

“이것 좀 전달해 주세요.”

얼음을 뽑던 사람들은 예전처럼 물만 마시지는 않았다. 짧게는 뭐 좀 진전은 있냐며 안부를 묻고 누군가는 아 맞다,라며 아이디어를 건네기도 했다. 어쩌다 보니 정수기에서 달그락이며 얼음이 떨어지고, 그것이 곧 아직은 이 조직이 '작동 중'이라는 유일한 증거가 되었다.

언젠가 이 회사가 정상궤도에 오른다면 정수기 앞에서 우리가 어마어마한 회의를 했더라며 즐거워하려나.


그러나 사람들은 예감하고 있었다. 이건 어쩌면 회광반조(回光返照) 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2025년 5월의 마지막 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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