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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추장와플 Aug 04. 2024

경축* 네덜란드어 모든 과정을 수료했다.

그런데 아직도 말을 못 알아먹겠는데?

1단계부터 5단계까지 있는 네덜란드어의 모든 과정을 마쳤다. 여기까지 오는 게 1년이 걸렸다.. 매 단계마다 80만 원 정도가 들었다. 3단계 즈음하여 내가 한국에서 가져온 돈이 다 떨어져 갔고, 남편이 나의 미래에 4단계, 5단계 학비를 투자해 주었다. 어차피 결혼하면 한 배를 탄 거니 내 목숨과 니 목숨은 어차피 쌤쌤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세뇌를 시켰다.


말하기, 듣기, 쓰기, 읽기로 매 단계의 마지막에 테스트가 있는데, 대학부설이라 분위기가 매우 심각했다. 다른 나라에서 비자까지 받아와서 대학 진학을 위해 네덜란드어 공부하는 학생들도 있었는데 5단계까지 통과해야 대학에서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종종 레벨업 시험에서 떨어져서 우는 친구들도 더러 있었다. (아마도 비자를 다시 받아야 했던 듯하다)  50퍼센트를 넘어야 통과인데, 사실 3단계까지는 할 만했다. 4단계부터 써먹을 기회가 없이 막무가내로 외우는 식의 공부를 해서  너무 어려웠다. 4단계도 턱걸이 62프로로 통과...


그즈음에 나는 어차피 이곳에 와서 살 것이라면 이곳 학위는 하나 있어야 사는 것이 편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종이쪼가리의 힘을 믿는 사람이다. 경험이 중요하다 하지만, 증명서가 주는 명쾌함을 나는 사랑한다. 졸업증명서, 어학증명서, 결혼증명서 기타 등등. 구구절절이 설명하지 않아도 종이 한 장만 내밀면 수긍이 가게 하는 마법 같은 종이들을 나는 너무 좋아한다.


특히 지지난 에피소드에서 설명했다시피 가공식품 포장공장에서의 정신적 충격이 좀 강했다. 못 배워먹은 이빨 없는 화이트 트래쉬들이 나를 무시하던 것이 머릿속에서 워지지 않았다. 벨기에의 학위가 있다면 나와 가치관이 비슷한 사람들과 함께 일 할 수 있을 테니 사무직 쪽으로 가고 싶었다.


5단계가 끝나고 나면 대학원에 가서 다시 공부를 해 보자 결심하고 5단계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4단계를 턱걸이로 통과해 5단계는 정말로 버거웠다. 1년 만에, 영어도 아니고, 생판 들어보지도 못한 네덜란드어를 이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대학에서 공부하는 수준까지 올린다는 게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였다.


5단계... 결국은 떨어졌다. 48프로... 내 이럴 줄 알았다.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해야 했나.


 벨기에의 네덜란드어권에서 중등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은 , 대학(원)에서 공부하려면 대학부설의 5단계 수료증 혹은, 벨기에와 네덜란드가 함께 만든 네덜란드어 협회의 가장 높은 레벨의 시험통과 증명서를 제출해야 했다. (벨기에 사람일지라도 프랑스어권에서 중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네덜란드어 시험 증명서를 내야 네덜란드어권 대학에 진학이 가능하다. )어 차피 첫 번째 옵션은 물 건너갔고, 두 번째, 네덜란어 협회 시험을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시험은 토익처럼 자주 있는 시험이 아니었다. 날짜를 체크해 보니 두 달 뒤에 있었다. 시험신청을 하고 나름 열심히 공부를 하며 두 달을 보냈다. 시험은 사립 언어교육기관에서 치러졌다. 안으로 들어가니 시험을 치러 모인 십 대 후반의 학생들로 바글바글 했다.


여기저기서 프랑스어가 들려왔다. 벨기에의 불어권 학생들이었다. 아마도 벨기에 네덜란드어권으로 어학공부를 하러 온 듯했다. 벨기에에서 출세를 하려면 불어권에 살아도 네덜란드어를 해야 하고, 네덜란드어권에 살아도 불어를 해야 했다. 벨기에 정당에서도 잘 나가는 정치인들은 두 언어를 거의 완벽하게 한다.


 입은 것을 보아하니 다들 부잣집 자식들처럼 보였다. 나중에 내가 시험을 친 사립 교육기관을 찾아보니 학비가 내가 다닌 대학부설의 다섯 배는 되는 것 같았다. 금수저 집안에서 네덜란드어 공부하라고 불어권에서 부모들이 엄청 비싼 곳에 등록시켜 공부한 것이었다. 얘네들... 아직 어리고, 노는 것에 정신이 팔려 공부는 했나 모르겠다. 말하기 시험에서 애들 하는 것을 보니, 정말로 공부는 개뿔 했나 싶다. 내가 다닌 대학부설 어학원이 공부하나는 정말 빡세게 시켰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금수저 아그들 사이에 껴서, 산전수전 다 겪은 나는 시험 감독관의 찬사와 함께 시험을 마쳤다. 운이 절반이고 실력이 절반이었다. 이런 금수저들이 다니는 어학원에서 보는 시험이 훨씬 쉬울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렇게 나는 운 좋게도 5단계까지 통과할 수 있었다. 이제 대학원에 갈 수 있겠다.



그런데 더 이상 마칠 수 없는 단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어의 장벽은 높았다. 공부를 하기 위해 배운 네덜란드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대화를 하면 잘 들리지 않았다. 5단계를 다 마치면 잘 들릴 줄 알았던 나의 착각이었다. 대학원에 가면 나아질 거야...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학원... 다 좋은데 돈은 어디서 나서? 가지고 온 돈은 다 썼고 남편이 벌고 있는 돈으로 둘이 겨우 먹고살고 있었다. 대학원이 우선이 아니었다. 일단 5단계까지 마쳤으니 일을 찾아보고 돈을 모아서 대학원에 가기로 했다.


한 배를 탄 운명공동체이지만, 남편의 돈으로 먹고살고, 대학원까지 다니기엔 내 양심이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네덜란드어 5단계를 마치고 구직활동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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