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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추장와플 Aug 11. 2024

워라밸 따위는 없는 미국계회사에 취업했다.

Work Life Balance - 외노자는 해당사항 없음

외국회사는 안 부려 먹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대단한 착각이었다.


네덜란드어 레벨 5까지 다 수강을 하고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돈부터 벌어야 했으므로 나는 구직활동을 시작했고, 네덜란드어를 못해도 영어로 일 할 수 있는 직장을 찾아나섰다. 다행히도 EU 본부가 있는 브뤼셀에는 다국적 기업들이 많이 있었고 미국계 메디컬 리서치 회사에 계약직으로 취직을 했다.


내가 사는 앤트워프에서 기차를 타고 40여분, 또 지하철을 타고 20분정도를 가야 회사가 있었다. 천안에서 서울 여의도로  기차타고, 지하철 타고 출퇴근하는 정도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미국계 회사지만 전세계 의료시장을 조사하는 회사이기에 중국, 브라질, 이탈리아, 캐나다, 호주, 독일, 전세계 곳곳에서 온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맡은 일은 각 의료 학회에 속한 의사들과 교수들의 이름과 정보를 수집하여 빅데이터를 만들고, 누가 가장 파워가 쎈 지를 뽑아내는 것이었다. 죽도록 네덜란드어를 공부 했더니 네덜란드는 단 한마디도 할 필요가 없다니 참 어이가 없었다.


양적연구를 통해 데이터를 뽑아내는 것이다 보니 일이 정말 겁~~나게 많았다. 얘들은 죽도록 일을 시키는데, 문득 든 생각은 워라은 타국에서 살아가는 외노자를 위한것이 아니고 벨기에에서 자기네 나라 말을 쓰면서 자기네 나라 회사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자들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젝트 기한에 맞추어 우리는 전 세계의 제약회사들에게 결과를 담은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해야했다. 기한에 맞추려면 한국만큼 개고생과 야근을 해야했다.


그래도  동료들과 개고생을 함께하며 서로 의지하고 친해졌다. 야근하고 술한잔 하며, 외노자끼리 우정을 쌓아갔다. 동료들에게는 정이 쌓였지만, 일에는 도무지 정이 들지 않았다. 지금처럼 정보가 발달하고 AI기술이 발달한 시기가 아니라 많은 작업들을 삽질하듯 무식하게 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내가 처음으로 갔던 인스턴트 음식 포장공장인데, 사무직 버전이었다.  그나마 다른 점 이라면 동료들은 서로의 외노자처지를 잘 이해하기에 따듯하고 의지가 된 다는 것이었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과는 연락을 하면서 잘 지내고 있다. )

어느날인가는 내 생일에 휴가를 내고, 저녁에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한창 음식준비를 하고 있는 와중에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프레젠테이션이 앞당겨 졌으니 오늘 저녁까지 결과를 보내 달라고 했다.아니 내가 무슨 알라딘도 아니고, 결과를 내 놓으라고 하면 뚝딱 내 놓을 수 있냐고...


 나는 오늘 휴가 냈는데요...라고 했지만 자기네도 알지만 니가 빨리 일을 해 줘야 겠다고 했다. 결국 회사의 종용에 나는 음식준비고 나발이고 손가락에 불나게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며 안되면 되게하는 한국인답게 상사의 퇴근시간 이전에 결과물을 보낼 수 있었지만... 친구들 다 불러 놓고 음식이 하나도 되어 있지 않았다. 원래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갈비찜 등을 하려 했지만, 불가피하게 불로 후다닥닥 볶요리 종류로 바꾸어 다행히도 그 날은 잘 넘어갔다. 생일인데 이런 예상치도 못한 스트레스 서프라이즈 선물이라니.... 고맙다 회사야..


이 일이 있은 후, 네덜란드어로 학위를 따서 네덜란드어 말로 일을 해야 겠다는 생각이 더욱 더 간절해 졌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정말로 아니었다. 내가 무슨일을 이 곳 벨기에에서 하게 될 지 알 수는 없지만, (사무직으로 일하고 싶은건 이미 공장체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벨기에 공장취직기 참조) 이런 종류의 일이 아닌것은 분명했고, 나도 유럽의 복지제도도 잘 되어 있고 워라벨이 있는 회사가 가고싶었다. 이렇게 일하는거면 한국이랑 다를바가 없었다. 특히 요즘엔 한국에서도 이렇게 안한다는데...


그렇게 1년여가 지나갔다. 아침에 애들이 학교가기 싫어서 배아프다고 하는것을 나는 이 시기에 경험했다. 회사만 갈라치면 배가 아프고, 꾸역꾸역 기차를 타고 가면서도 속이 울렁거렸다. 1년 뒤  회사는 계약직 대신, 정규직을 제안했고 월급도 아주 준수했다. 그러나 이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워라과는 빠이빠이였다.

그 사이에 나는 앤트워프 대학의 대학원과정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자원봉사자로 뮤직페스티발과 박물관에서 일 했을 때 너무 재미있고 적성에 잘 맞았다고 생각했었었는데 때마침 문화경영이라는 전공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주 단호하게 저는 공부하러 갈 겁니다. 하고 정규직제의를 당차게 거절했다. 다 잘 될 줄 알았다. 일만 그만두면...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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