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어머니가 벨기에에 오셨다. 결혼식 후, 씨벌개진 눈으로 얼른 들어가라 하며 손을 훠이훠이 저으시던 아버지는 ( 여자는 일 년에 한 번 친정에 오면 된다던 아버지편참조)그래도 벨기에에서 어떻게 사는지는 한번 보셔야겠는지 어머니와 함께 오시겠다고 했다. 우리가 당시 살고 있던 곳은, 방한칸에 거실이 있던 아파트로 두 사람의 공간으로는 완벽했으나, 부모님을 모시기엔 프라이버시가 제로였다.
부모님은 결국 벨기에 방문하는 동안 우리 시부모님 댁에서 지내기로 하셨다. ( 어찌나 다행이었던지...) 오랜만에 본 아버지는 어쩜 눈곱만큼의 변화 없이 그대로셨다. 10일을 계획하고 오셨는데, 10일 동안 독일과 네덜란드, 프랑스 파리까지 다녀오는 살인적인 일정이었다.
비행기값도 비싼데 이왕 온 김에 여러 군데 다 보고 와야지라고 생각하는 한국인과는 다르게 유럽사람들은 이것을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 집 남의 편도 왜 이렇게 여러 군데를 가는 거냐고 물었지만, 부모님이 언제 또 오실지도 몰랐고 조금이라도 젊을 때 많이 보셔야 한다고 밀어붙였다.
파리에 함께 가서, 시내구경을 했다. 찌는듯한 더위임에도 에펠탑도 올라가고 노트르담 성당에도 가서 구경을 했다. 그날은 날씨가 더워 나는 랩스커트에 검은색 끈나시를 입고 있었다. 시내구경을 다 하고 호텔에 들어가기 전, 파리의 전형적인 멋들어진 카페테라스에서 커피를 한잔하고 들어가기로 했다.
앉자마자, 생각지도 못하게 조선멘탈 아버지의 질타가 쏟아졌다.
"내가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너는 외국 나간 지 1년도 안된 놈이 정신까지 벌써 서양화가 된 거냐? 여기 사는 한국 사람들도 많은데 옷을 왜 그렇게 입냐. 다 벗고 다니지 그러냐. 한국사람들이 너를 보면 뭐라고 생각하겠냐! 너는 한국사람이지 서양사람이 아니다!"
내가 너무 방심했다. 한동안 아버지를 보지 못했어도 아버지는 극강 조선멘탈 아버지인데 1년 동안 못 본 사이에 잠시 깜빡한 것이다. 나는 끈나시 하나에 정신이 썩어빠진, 서양 겉물 든 여자가 되고 말았다.
비록 한국말은 못 하지만 분위기상 싸 함을 감지한 남의편. 아버지의 일방적인 다그침을 들으며 눈물을 쏟고 있던 내 손을 잡고, 남의 편답지 않게,
유교녀는 아버님의 딸이지만, 제 부인입니다. 제 부인에게 이런 식으로 대하지 말아 주세요!라고 말하며 내 손을 붙잡고 끌고 갔다. (물론 영어로. 그리고 우리 아버지도 쉬이즈 마이 와이프, 낫 온리 유어 도터 정도는 알아듣는다. )
그렇게 호텔방에 돌아와서 엉엉 울었다. 남편은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아버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왜 그렇게 상처 주는 말을 하는 건지, 그리고 왜 그런 말을 듣고도 울면서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오지 못하는지...
다음날 우리는 호텔로비에서 만나 루브르 박물관에 가기로 했다. 매우 서먹서먹하게 인사를 건네고 아빠는 "아빠가 어제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미안하다."라고 하셨다. 그런데 어머니의 표정이 냉랭하다. 언제나 문제가 있으면 뒤에서 살뜰히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하셨었는데 어쩐지 오늘은 한기가 날린다.
루브르박물관에 가서도 보는 둥 마는 둥, 자꾸 어머니가 신경 쓰인다. 내가 가서 묻는다. "뭐 기분 안 좋은 일 있어요?"
"네가 쟤 부인이면 네 아빠는 내 남편인데, 사위가 내 남편한테 저렇게 버르장머리 없게 대하면 나는 기분이 좋을 것 같니?
맙소사. 조선멘탈아버지의 부인으로 긴 세월을 산 엄마를 얕봤다. 산 넘어 산이다... 아유 머리야... 나는 그렇게 하루 종일 서먹서먹한 부모님과 남편사이에 껴서 아주 불편한 마음으로 돌아다녔다. 다행히도 그 다음날은 서먹한 한결 풀어져서 베르사유궁전은 나름 화기애애하게 다녀왔다.
이날 이후 깨달은 것 두 가지가 있었으니, 조선멘탈 아버지는 어딜 가도 조선멘탈일 것이며, 조선멘탈 아버지의 사모님을 얕보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남편의 매번 남의 편은 아니라는 것, 덕분에 어머니까지 화나셔서 고생을 하긴 좀 했어도 내편을 들어준 어쩔 때는 내편인 남편이라는 것?
일주일 후, 부모님은 집으로 돌아가셨고 나는 날이 더울 때면 다시 아버지를 화나게 했던 그 문제의 옷을 꺼내 입고 다녔다. 앞으로 죽을 때까지 끈나시를 보면 아버지의 호통이 생각 날 것 같지만 그래도 열심히 입고 다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