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은사 산책 1

<총 4회로 구성된 에세이입니다. 일/목에 발행합니다.>

by 새림

뜨거운 물에 손을 넣고 있는 사람은 찬물에 손을 넣고 있는 사람과 똑같이 느낄 수 없다.
오카 마리의 <기억, 서사> 중에서



1.


남편과 봉은사로 산보를 갔다. 초파일 오기 며칠 전 일요일이었다. 하루 종일 책과 티브이를 번갈아가며 펼쳤다 덮고 켰다가 끄며 게으름을 떨고서였다. 저녁을 먹고 났을 땐 어디라도 나가 바람을 쐬야 할 거 같았다.


차도 없는 5월의 초저녁. 걷기 좋은 날이었다. 삼성중앙역을 지나자 초파일을 앞두고 절에서 매단 오색의 연등들이 양쪽 도로변을 알록달록 비추고 있었다. 봉은사나 구경 가자, 남편이 말했다.


우리는 둘 다 불자도 뭣도 아니지만 시내 한복판에 있는 절집의 초파일 연등치레는 연말 백화점 앞의 크리스마스트리 구경만큼이나 볼만했다. 색색의 한지로 만든 사천왕에서 시작된 화려한 연등행렬은 대웅전 마당을 지나 뒤쪽 산책로까지 끝도 없이 이어져 빨강 파랑의 거대한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밤시간인데도 우리처럼 연등에 취해서 들어온 관람객들이 많았다. 낯선 이국의 풍경을 담으려는 외국인들과 젊은 연인들 -아마도 코엑스쯤에서 영화를 보거나 밥을 먹으며 시간을 보내고 왔을-이 연신 휴대폰 셔터를 눌렀다. 조명을 환히 밝힌 종이 아기부처와 보리수나무와 귀 큰 코끼리가 있는 중앙화단 가운데에, 굳이 나를 세워두고 남편도 사진을 찍었다.

그러고 보니 작년 이맘 때도 우리 부부는 밤연등 구경을 했다. 순천 송광사 가서였다.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순천 어디에 마당 달린 집을 마련한 남편 친구네가 뒤늦은 집들이를 한다 했고 절집 좋아하는 남편은 그럼 거기까지 간 길에 송광사 들러 하루 자자고 했었다.


그 밤, 인적도 없고 불빛도 없던 캄캄한 절마당에도 빨강, 노랑, 초록의 오색 연등들이 줄지어 매달려있었다. 이리저리 찍었던 그 연등사진들이 아직도 내 휴대폰 어딘가에 있었고 그것들을 들여다볼 때마다 아련했던 그 밤의 느낌도 잊히질 않았다.


산속의 밤은 칠흑 같았다. 그 검은 어둠에 발을 내디뎠을 때 이상하게도 나는 선잠에서 깨어났던 아이 적이 떠올랐다. 실눈 너머로 보이던 한없이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이었던 밤. 시커먼 어둠을 얼키설키 가르던 방울뱀처럼 화사한 연등들. 미궁의 전생, 혹은 아지 못할 내생으로 이어지는 길목이 있다면 이런 곳이 아닐까, 송광사 마당 한가운데서 잠시 그런 생각을 했었다. 산속의 밤공기가 목덜미를 선뜩하게 훑으며 지나갔었다.

"춥다. 그만 들어가자."

"왜 금방 좋다 하더니 무슨 변덕이야... 이런 장면 언제 또 볼 거야? 실컷 보라고."

계곡물을 가로지른 *능허교를 건너 바깥 마당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며 남편이 말했다. 그의 검은 점퍼가 캄캄한 숲 속으로 스르르 지워지듯 사라질 것 같았다.

"아아 천천히 가. 같이 가잔 말이야."

다리 위에서 나는 과장되게 소리를 질렀다. 낮에는 분명 졸졸 흐르던 다리 아래의 물소리가 천길 아래의 그것처럼 철철 철철 낮고 크게 들려왔다. 햇빛에 빛나던 연초록의 나뭇가지들과 적당히 낡고 퇴색해 멋스럽던 다리 옆 *우화각 담벼락이 스산하고 시커멓게 버티고 있었다. 검은 숲에 파묻힌 남편의 점퍼가 더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 있어?"

대답 않는 남편의 발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나는 어둠 속에서 또 한 번 소리를 쳤다.

"어디 가냐고?"

"이 나이 되도록 무서운 것도 있고... 아직 멀었네."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난 남편이 나를 보고 장난하듯 웃었다. 빨강, 파랑의 연등 불빛이 그제야 알캉달캉 그의 얼굴을 비췄다. 그러게. 이 나이에 무서울 것이 아직도 있단 말인가.(계속)


*능허교(凌虛橋)... 송광사로 건너가기 위한 계곡 앞의 무지개다리. 허허로운 하늘로 오른다는 뜻이다.

*우화각(羽化閣)... 능허교 위의 팔작지붕 건물. 날개가 돋아 하늘로 날아간다는 뜻의 우화는 속세를 떠나 부처의 세계에 들어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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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