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은사 산책 2

by 새림

2.

순천 친구집 대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상추를 따던 남편의 친구가 먼저 우리를 보고 뛰어나왔다. 곧이어 그의 아내가 녹두색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으면서 나왔다.


"어서 오세요"


남편이 친구의 손을 잡았고 나도 그들 부부와 오랜만의 인사를 나눴다. 다행히 햇빛 아래서 웃고 있는 부부의 얼굴은 서울에서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친구 내외는 오래전 하나뿐인 딸을 잃었다. 자식을 잃고 십 년쯤, 부부는 두문불출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뭐랄까. 그때의 둘은 꼭 달팽이 같았다. 기억과 세월을 일부러 붙들려 작정한 사람들도 같았다.


그 사이 너 번쯤 그들 부부를 봤었. 몇 년 전엔 죽은 딸아이의 방을 아직도 치우지 못한 채 고스란히 두고 산다는 소리를 들었다. 책상이며 옷이며 노트며... 심지어 연필 하나까지도. 딸의 뼛가루를 담은 작은 유골함도 차마 어디로 보내지 못하고 부부의 공부방 한편에 놓고 있다고도 했다. 그런 얘기들을 가슴 아프게 듣기만 했다. 그러면 안 되는데...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데... 이대로 인생을 놓아버리기엔 아직도 너무 젊은데... 그런 혼잣말 밖에는 아무것도 해 줄 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재작년인가 부부는 이윽고 딸을 잃은 서울을 떠나겠노라, 했다. 멀리 남도 끝에 허름한 농가 한 채와 인연이 닿았다고 했다. 자식을 잃은 마음을 나나 나의 남편 같은 사람들이 헤아릴 수가 있을까. 없을 것이었다. 영원히 모를 것이지만 우리는 무조건 잘했다, 잘 생각했다, 축하를 해주었다. 더 이상 나쁠 수는 없으므로 무조건 잘하는 일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순천으로 떠난 부부의 생활은 달라진 것도 같았다. 이따금이지만 사진을 보내오기도 했다. 사진 속, 부부는 폐허와 다름없는 농가를 쓸고 닦고 있었다. 늦가을 내내 무너진 벽을 돋우고 지붕을 새로 얹고 창을 키우고 도배를 했노라고, 인사도 없이 불쑥 그렇게 쓰기도 했다. 봄이 되자 마당에 잔디씨를 뿌린다고도 했다. 딸이 죽고 꼬박 십 년 만에 부부의 일상에 물기가 도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작년 초파일 무렵 부부는 우리를 집으로 초대했었다. 마침 미국으로 나가 자리를 잡고 살던 다른 친구 A가 잠시 한국에 나왔다 하여 엉겁결에 잡힌 약속이었다.


공이 많이 들어간 마당의 잔디는 푸르렀다. 잔디 한가운데 암갈색의 나무 데크를 깔고 테이블과 의자를 놓고 그 위에 긴 채양도 얹었는데 그 모든 것은 목공일 한번 안 해본 남편이 손수 해냈다고 했다.


우리 부부와 곧이어 도착한 미국서 온 A네 부부를 그 채양 아래 식탁에 앉혀놓고 집주인 내외는 아침부터 열심히 준비했을 샐러드며 잡채, 애호박 부침개와 수육을 부지런히 날랐다.

"많이 먹어. 많이 드세요. 자기들이 많이 먹고 가야 우리도 행복하고 우리 ㅇㅇ이도 행복하지."

ㅇㅇ이는 그의 죽은 딸아이 이름이었다. 갑자기 죽은 딸아이 이름이라니.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수저를 들던 우리 모두는 잠시 멈칫했다. 친구의 아내가 그런 우리를 보고 수줍게 말했다.

"우리 ㅇㅇ이 저기 있잖아요."

그의 손가락이 마당을 한편을 가리켰다. 잔디와 맞닿은 꽃밭 끄트머리엔 장미와 함박꽃이 한창이었다.

"항아리 안에 있기가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내가 우리 ㅇㅇ이 분홍 한지로 싸서 저기 함박꽃 핀 자리 아래..."

분홍 한지 때문인지 함박꽃은 마침 연연한 핑크로 벙글어져 있었다. 친구의 아내는 벙근 꽃처럼 해사하게 웃었지만 콧잔등이 잠시 빨갰다.


부부가 그날만큼 죽은 딸 얘기를 오래 하고 많이 하는 것은 십 년 만에 처음이었다. 그 아이가 태어났을 때 얼마나 숱이 많고 똘망했는지, 서너 살 때부터 못하는 말이 없이 얼마나 배꼽을 잡게 했는지, 학교 다닐 땐 얼마나 똑똑하고 친절했는지, 야무지고 착해 뭐 하나 버릴 것 없던 아이에게 천청병력 같은 사고가 났을 때는 얼마나 기가 막혔던지, 마지막 얼마간, 삶과 죽음을 오갔던 그 고비고비마다엔 얼마나 애가 끓고 피가 말랐는지... 얘기는 뒤로 갈수록 어쩔 수 없이 어둡고 어두워져 결국에는 말하는 부부나 듣는 우리나 눈시울이 붉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죽지 않고 살아있어요. 이담에 우리 ㅇㅇ이 만나려면 남은 날도 기쁘게 살려고요."

그 말을 하는 남편 친구가 애써 웃었고 우리도 웃는 얼굴로 그를 격려했다. 미국서 온 A의 일본인 부인만이 듣는 내내 손수건으로 눈물을 연신 닦아내고 있었다.

"이십 년도 더 된 우리 아기 요셉이 생각이 나네요. 나도 요셉일 그리 보낼 줄 꿈에도 몰랐어요. 아들이란 소리에 하늘색으로 커튼을 하고 침대와 보행기, 장난감으로 가득 채운 방도 미리 다 꾸며놓고 기다렸었는데..."

A부부는 한 번 찾아온 아기를 뱃속에서 놓친 이래로 평생 자식을 얻지 못했다. 요셉은 가톨릭 신자인 그들 부부가 뱃속의 아이를 기다리며 붙인 태명이었다고 했다. 요셉의 엄마 되기를 간절히 원했던, 그러나 이제는 아이 같은 건 가질 수 없을 만큼 늙어버린 A부인의 눈물이 멈추질 않아 후식을 가지고 나온 집주인 아내가 오히려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면서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어쩐지 조금 민망했다. 나는 찡그리듯 웃어 보였다. 미안해요,라고 내 눈은 말하지 않았을까. 집주인 아내가 나를 보고 너그러이 미소 지었다.


슬픔이나 상처란 어차피 저마다 각자의 것이기에 그 크기를 남이 가늠한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은 일일 테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아마도 슬픔의 무게에 대한 나름의 기준과 선입견을 갖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얼굴도 보지 못한 뱃속의 아기가 아무리 아쉬워도 열다섯까지 키운 자식을 잃은 사람 앞에서는 왠지 입을 열어서도 눈물을 보여서도 안될 것 같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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