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3회로 나뉘는 에세이입니다.
2.
이튿날 페어가 열리는 마리나베이샌즈에서 동생이 다녔던 싱가포르 대학 교수들과 가까이 지냈던 동창들과 조우했다. 그중 몇은 나도 본 적이 있는 얼굴들이었다.
동생은 평소 말수가 적은 타입이지만 오랜만에 만난 그이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동생의 모습은 누구보다도 활기가 넘쳤다. 마치 그 옛날, 오후 네 시의 내가 스쿨버스에서 내리는 아이를 맞을 때와 같은 싱싱함이 그의 얼굴에 가득했다.
그런 동생을 낯설게 바라보며 나는 소외감 비슷한 것을 느꼈던가. 그랬던 것도 같다. 동생을 비롯한 그 자리의 모두가 교수이거나 작가이거나 저마다의 타이틀을 가졌는데 나만 아무런 명함이 없다는 생각을 해서였을 거다.
한 때 동생의 선생이었고 그날 행사를 같이 한 중국계 남자 교수가 나를 붙들고 약간은 과장되게 동생을 칭찬했다.
"너의 동생은 정말 특별했어. 그녀의 열의와 노력에 나는 늘 감동했었어. 언젠가는 분명 좋은 작가가 되리라 생각했지. 그녀가 매일 밤 학교 스튜디오에 혼자 남아있던 것, 너도 알지?"
물론 알고 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싱가포르에서는 물론 서울로 돌아온 지난 십 년간, 동생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8시간 작업실을 지켜왔다. 그 몰두와 고립이 동생을 여전히 성장 중인 인간으로 만들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아흔아홉 가지 반대 이유를 말할 때 자신의 고집을 꺽지 않았던 동생의 주장은 단 한 가지였고 그건 반드시 나의 일을 찾고 싶다,는 거였다. 그간 해왔던 공부를 집어치우는 문제에 대해서도 간단히 해명했다.
"그 산인줄 알았는데 그 산이 아니더라고."
내가 볼 때 그 산은 에베레스트는 못 돼도 북한산 중턱쯤은 되는 것 같았는데 동생은 그 산도 그저 동네 언덕쯤처럼 말했다. 버리는 것도 시작하는 것도 쉽게. 한 번 해보지 뭐,였다. 태도는 명료했고 그 용기만큼은 나도 조금 부러웠다.
엄마는 고집 센 동생을 못마땅해하기도 했다. 그건 다른 말로 딸들에 대한 욕심이 없다는 건지도 몰랐다. 용감이고 뭐고 고집 세서 버거운 자식보다는 온순히 커주는 자식을 바랐던 것도 같다.
그런 엄마가 나의 엄마이기만 한 것도 아니련만, 무엇인가를 악착같이 해내기에 어렸을 때의 나는 동생과는 다른 아이였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나는 지나치게 겁이 많았다. 나이도 반에서 가장 어렸다. 당연히 학급 친구들보다 키도 몸무게도 정신연령도 한참은 모자란 축이었고 덕분에 초등학교 시절 내내 친구들 사이에서 어린애 취급을 받았다.
한 번은 전교생이 다 주사를 맞는 날인데 내가 어찌나 울고 불고 떼를 썼는지 교실이 다 아수라장이 됐었다. 내가 울기 시작하자 비슷한 애들 서 넛이 따라 울었던 것이다. 그 애들을 겨우 붙들어 주사를 놓는 동안에도 나의 맹렬한 울음이 그치지 않자 양호선생이 화를 내고 나가 버렸었다. 모두가 다 맞은 주사를 나 혼자만 안 맞았다는 게 이번엔 또 다른 의미로 겁이 났고 내 울음에선 급기야 쇳소리가 다 날 지경이었다. 담임선생이 목이 쉰 내게 물 한 모금을 겨우 먹이고 어르고 달래, 업고는 옆반의 옆반 그 옆반까지 찾아가 주사를 -굳이 그렇게 해서까지 꼭 주사를 맞혀야 했을까. 그때의 선생님들은 참 직업정신이 투철하셨나 보다- 맞힌 기억이 난다.
겁보에 울보, 고무줄이나 공기놀이에선 맡아놓은 깍두기, 등하교 길엔 친구들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덜 떨어진 나를 어쩌자고 부모님은 그리 일찍 입학을 시켰을까. 한번 맛 좀 보라는 생각이셨을까.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겁이 많다는 건 사춘기를 겪으면서도, 대학생이 되어서도, 그리고 진짜 어른이 되어서도, 가장 깊이 감추고 싶은 나의 콤플렉스가 아니었을까. 그런 것도 같다. 겁이 많다는 건, 어딘지 가늘고 길게 사는 것에 대한 집착 같아 구차했기 때문이다. 모르긴 몰라도 치열할래야 치열할 수가 없고 담대할래야 담대할 수가 없었으리라.
속을 모르는 친구들은 나를 시크하게만 봤다고도 하지만 고백하자면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이 내려앉곤 했다. 살면서 아주 드물게 만나는 우연한 행운들에 조차 나는 겁을 먹었는데 예컨대 이런 식이다. 왜 이 행운이 내게 오지? 이럴 리가 없는데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겁은 많고 배짱은 없고, 그 조합으로는 그저 얌전한 보통사람이 처음부터 제격이었는지도 모른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