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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냐 Jul 24. 2024

여름 부적응자의 여름나기

여름에 얽힌 사소한 취향

나는 여름과 잘 맞는 사람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사계절 중 여름의 내가 제일 별로라고 생각한다. 여름의 나는 체력이 평소의 0.7 정도로 마치 데친 시금치 같다.(미나리, 숙주 같은 다른 채소로도 대체 가능하다.) 한마디로 맥을 못 추린다는 의미이다. 체력이 떨어지니 인내심의 한계도 같이 떨어지고, 그래서 인성도 함께 추락하게 된다. 참으로 안타깝지만 매 해 여름마다 이런 삶을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름을 싫어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여름의 문화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 냉 면

여름은 입맛 없음의 계절이다. 아무것도 안 먹고 그냥 굶고 싶을 때 입맛을 멱살 잡고 끌어올려주는 음식이(정확히는 음식 종류가) 있는데 바로 냉 면이다. 냉면이 아니라 냉 면이라 표현한 이유는 시원한 면류를 통칭하기 위함이다.(사실 냉면은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냉 면에는 냉짬뽕, 냉우동, 냉모밀, 냉라멘, 초계국수, 비빔 열무국수 등이 포함된다.


냉 면은 시원함과 새콤함으로 더위에 지쳐있던 미각세포를 제대로 자극한다. 그리고 밀가루의 즉각적인 포만감은 지친 몸에 신속하게 에너지를 전달한다. 냉 면은 그저 맛있는 음식이 아니라 여름 부적응자를 위한 생존 음식이다. 시원한 면요리를 처음 발명한 사람에게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매 여름마다 사람을 살리고 계십니다...)


냉 면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메뉴는 바로 냉짬뽕이다. 원래 특유의 느끼함 때문에 중화요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냉짬뽕은 논외이다. 냉짬뽕이 다양한 냉 면 메뉴 중에서도 공고한 1위 자리를 차지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매콤 새콤의 콜라보. 새콤달콤보다 더 강력한 조합이 바로 매콤 새콤이다. 살짝 매우면서도 새콤한 국물은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드는 강력한 자극제이다. 처음 냉짬뽕을 먹었던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살얼음이 떠있는 얼큰하고 새콤한 국물 한 숟갈을 입에 넣는 순간, 이 맛에 중독될 것을 예감했다. 그리고 그해 여름, 주에 한 번은 냉짬뽕을 먹었다지.


둘째, 시원하고 신선한 해산물 고명. 사실 해물은 나에게 치트키 같은 존재다. 해물이 들어간 거의 모든 메뉴를 좋아한다. 해물탕, 대구탕, 초밥, 회덮밥 등등. 그런데 시원한 육수 위에 올려진 해산물 고명은 더 강한 존재감을 내뿜었다. 특히 새우를 국물과 함께 떠먹으면 시원한 국물이 새우의 탱글탱글한 식감을 더욱 부각해 준다.


셋째, 쫄깃한 면발. 중화면은 시원 새콤한 육수와 가장 잘 어울리는 면이다. 가장 쫄깃한 식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식감은 중독성이 있어서 젓가락을 멈추지 못하게 막는다. 식당에서 냉짬뽕을 주문하면 다른 메뉴보다 양이 꽤나 많아 보인다. 그런데 먹다 보면 누가 다 먹었지 싶을 정도로 양이 빠르게 줄어드는데, 그 이유가 바로 식감의 중독성 때문인 듯하다.


# 보사노바와 우쿨렐레

겨우내 캐럴을 듣는 것처럼 여름에는 보사노바를 듣는다. 보사노바는 브라질 삼바와 재즈가 결합한 재즈 장르이다. 보사노바는 바다에서 부는 바람 같다. 약간 습하지만 설레는 딱 그 느낌. 캐럴을 듣다 보면 어느새 한 해가 끝나고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것처럼, 보사노바를 주구장창 듣다 보면 기나긴 여름이 어느새 지나있다. 코끝에서 가을향이 느껴질 때가 바로 보사노바와 이별할 순간이다.


가장 자주 듣는 보사노바곡은 조빔의 <wave>이다. 나는 이 곡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이미 기분 좋아질 준비가 되어 있다. 이 곡의 매력은 은근함이다. 은근히 신나면서 은근히 감미롭고 은근히 중독성 있다. 그래서 이 노래는 새파랗고 청량한 바다보다는 잔잔한 에매랄드빛 바다를 연상시킨다. 이 곡을 들으면 눈앞에 찬란한 바다가 펼쳐지는데 굳이 왜 바다를 보러 가지?


보사노바보다 더 여름스러운 음악을 듣고 싶을 땐 우쿨렐레 연주곡을 듣는다. 보사노바가 기분 좋은 바닷바람이라면 우쿨렐레 연주곡은 뜨거운 태양빛이다. 우쿨렐레 연주곡을 들으면 여름나라에서 정면으로 태양빛을 받는 듯한 느낌이 든다. 뜨거운 태양빛 아래에선 어두운 생각과 감정이 자리할 여지가 없다. 우쿨렐레 연주곡은 피부 속 깊숙이 침투하여 나를 정화시킨다.


여름을 피하고 싶다면 보사노바를, 여름에 맞서고 싶다면 우쿨렐레 연주곡을 추천드린다.


# 제철 도서

계절마다 어울리는 책이 있다. 나는 계절별로 어울리는 책을 ‘제철도서’라 부른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여름 제철도서는 추리, 미스터리, 스릴러이다. 평소 삶과 딱 붙어있는 지극히 현실적인 소설을 좋아하고 많이 읽지만, 이상하게 여름에는 사람 목숨이 참을 수 없이 가볍게 다뤄지는 서늘한 소설이 당긴다.


여름에 이런 책을 찾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더운 여름 체온을 떨어뜨릴 오싹하고 서늘한 느낌을 원하기 때문일 테고, 또 여름에는 집중력이 약해져 더 읽기 쉽고 자극적인 소설을 찾게 되는 이유도 있을 테다. 조금 더 그럴싸한 이유로는 여름의 몽환적인 속성이 있다. 여름에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을 것만 같다. 이 세상이 더 말랑말랑해져서 어떤 모양이든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죽은 인물에 대한 연민이나 죽음 이면에 있는 사회적 배경에 대한 고려 없이 온전히 사건의 진행에만 몰두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여름에는 또 다른 제철도서가 있다. 바로 장마에 어울리는 눅눅한 정서를 담은 책이다. 대표적인 책이 조해진 작가의 <여름을 지나가다>이다. 오래전에 읽어 책의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인물들의 퀴퀴한 감정이 얽히고설켜 소설의 정서가 장마의 불쾌함을 그대로 재현했었던 건 확실하다. 또 다른 책은 레일라 슬리마니의 <달콤한 노래>가 있다. 이 책이 주는 특유의 찝찝함에 매료되어 밤새 읽었던 기억이 있다. ‘아기가 죽었다. 단 몇 초만에‘라는 충격적인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이 궁금하다면 지금 이 시기에 읽어보시길 권한다. 이열치열이 아닌 이습치습을 느끼실 수 있을 것이니.




생각해 보면 여름만큼 나만의 전통과 문화(?)가 계발된 계절이 없다. 여름에 약한 사람이니 어떻게든 버티기 위해 그렇게 된 것일 수도. 악랄한 날씨로 나의 삶을 풍부하게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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