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쉽게 안 변해
침수에 주의하라는 안전문자가 반복해서 왔다. 비는 쏟아지는데 전날 밤에 받은 LPG 렌터카 차량은 연료가 거의 없었고 석모도는 초행길이었다. "인천에서 충전하고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육지는 제주처럼 LPG 충전소가 많지 않을 것이고, 또 외곽의 섬으로 가는 길이라 걱정되어 남편에게 말했다. 인천도 우리에게는 낯선 곳인데 미리 검색하지 않은채 충전소가 보일때까지 계속 가다보니 이미 차량은 강화도로 향하고 있었다. 남편은 운전대만 잡으면 목적지를 정하기도 전에 일단 출발하는 버릇이 있다. "강화도에도 LPG 충전소 있어." 강화도에서 군 복무를 한 적 있다는 남편의 말에 안심했다.
네비게이션은 큰길이 아닌 외곽으로 안내하고 있었고 주유소는 간간이 보였지만, LPG충전소는 나오지 않았다. 남편도 슬슬 걱정되었는지 그제야 충전소를 검색해보라고 했다. "15분 정도 왔던 길로 돌아서 가는 길인데 어쩌지?" 바쁜 일은 없었지만 석모도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기로 한 터라 배가 고팠다. "가다 보면 나오지 않을까?" 안일하게 생각하고 가던 길을 계속 갔는데 충전소가 없을 것 같은 시골길만 나왔다. 남편은 급하게 나에게 충전소를 찾아보라고 하면서도 차를 멈추지 않았다. 두 군데가 나왔고 가장 가까운 거리는 15분이었다. 지도를 잘 못보는 나는 왔던 길을 돌아가는 길인지 석모도 쪽으로 가는 길인지 알 수 없었다. 차를 계속 움직이면 우리가 충전소에서 더 멀어질 수도 있으니 지도를 보면서 위치 파악을 잘하는 남편이 차를 세우고 확인했으면 싶었다.
제주에서도 종종 있는 일이다. 애월을 지나가는 길에 "뭐 먹을까?" 물으면 나는 검색 중인데 차는 계속 움직인다.
"00해물라면 먹을까?"
"방금 지나버렸네."
"차를 좀 세워서 확인하고 가자. 차 세우는 게 안 돼?"
"차 세울 데가 없어."
세우려면 못 세울 것도 없고 어려우면 출발 전에 검색하고 가면 되는데 그게 절대 안 된다. 화가 나지만 다투는게 귀찮아 크게 불평하지 않고 몇 마디 중얼대고 만다.
남편은 강화도가 너무 변했다며 "여기는 원래 아무것도 없었고, 어쩌고" 충전소를 못 찾으니 말안되는 핑계를 대고 있었다.
"아니, 차를 세우고 확인하고 가자고."
"차를 어디다 세워?"
한적한 시골길이었고 잠시 정차해도 큰 문제는 없을 도로였다. 가는 동안 충전소는 점점 멀어져 가는 것 같았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 멈추고 확인하는 게 뭐가 어렵다고, 어휴 속 터져.'
"차를 움직여야 멀어지는지 가까워지는지 보고 방향을 알 수 있지."
내 표정이 굳은 걸 보고 남편이 궁색한 변명을 했다. 계획 없는 부부의 여행 방식이다. 종종 겪는 일이지만 궂은 날씨에 처음 가는 길에서 긴장했고 평소 쌓였던 감정이 터진 것이다. "배고파?" "배고파." 별로 배고프지는 않았지만 심술이 나서 대답했다. 배는 본인이 더 고팠을 것이다. 내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으면 남편이 평소보다 말을 아주 조금 더 한다. 지나친 길을 더 많이 돌아가서 충전을 했다. 연료를 채우니 마음이 놓였다. 인천에서 조금 돌더라도 연료를 채우고 왔어야 했다며 처음으로 돌아가 잔소리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외포항을 지날 때 남편이 예전에는 그곳에서 배를 타고 석모도에 갔었다고 말하며 눈을 반짝였다. 남편은 군대 이야기를 할 때면 들뜬 아이같다. 비 그친 산에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모습이 신비롭게 보였다. 바다를 가르며 석모대교를 지나는 기분이 상쾌했다. 남편이 검색으로 찾은 광고 상단에 있던 맛집은 석모대교에서도 십여 분을 더 가서 보문사 입구에 있었다. 남편은 그 근처에 부대가 있었다며 또 반가워했다. 나는 해물 부추전, 남편은 칼국수, 좋아하는 메뉴를 하나씩 시켰다. 해물 부추전에 낮부터 막걸리 한잔 했더니 좀 전의 불편했던 마음이 사라지고 나는 세상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남편도 행복해 보였다. 예전의 나였다면 불편했던 감정을 끝까지 끌고 가며 먹는 내내 인상쓰고 툴툴거렸을 것이다. 지금은 그래봤자 서로에게 좋을 것 없다는 걸 잘 안다. 남편의 습관은 아마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냥 그 습관을 지켜보며 다투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화해하며 길을 만든다. 삐걱거리다가도 맛있는 걸 먹고 웃는것, 그것이 우리의 여행이고 우리 삶의 방식이다.